등록 : 2014.03.04 15:30 수정 : 2014.03.30 14:12

2003년 1월9일 새벽 경남 창원시 두산중공업 노동자광장에서 50대 노동자 배달호가 분신해 숨졌다. 노조 파업에 대한 회사의 손배·가압류로 그 또한 극심한 생활고에 내몰렸으나, 유서에는 개인적 고통보다 “노조 말살 정책”에 대한 분노와 해고자 복직에 대한 염원이 가득했다.한겨레 박승화
두 손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까맣게 타버린 몸은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차가운 바닥에 마치 마네킹처럼 누워 있는 그의 몸에선 연기가 났다. 현실이 아닌 듯 보였다. 2003년 1월9일 새벽 6시께, 경남 창원시 귀곡동 두산중공업 안 노동자광장에서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목숨을 끊었다. 1970년 11월 전태일처럼 그의 죽음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볼펜으로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유서는 죽음의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출근을 해도 재미가 없다. 해고자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두산이 해도 너무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으로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두산이 사택 매각, 식당 하도급화…, 노동조합과 합의 사항인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시행한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얼마 전 징계자들이 출근 정지가 끝나고 현장에 복귀하였지만 무슨 재미로 생산에 열심히 하겠는가. 이제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 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나에게 들어오는 돈 없을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 아닌가. 나는 매일같이 고민을 해본다. 두산의 노동조합 말살 정책 분명히 드러나 있다. 얼마 전 구속자 선고재판 어처구니없이 실형 2년이라니. 두산은 사법부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눈 보인다. 공정해야 할 재판부가 절차를 거쳐 쟁의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법이라니 가진 자의 법이 아닌가.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내가 먼저 평온한 하늘나라에서 지켜볼 것이다.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주기 바란다. 불쌍한 해고자들 꼭 복직 바란다. 나는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볼 것이다. 내가 없드라도 우리 가족 보살펴주기 바란다. 미안합니다.”

그의 죽음은 단호했다. 배달호, 50살의 노동자. 그는 1953년 10월14일 경남 김해시 봉림동에서 2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8살 때인 1981년 1월 한국중공업(현재 두산중공업)에 들어왔다. 평범하던 배달호의 삶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노조가 생기니 차별이 없어지고 관리자와 대등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그 시대, 대부분의 가장들이 그러하듯 직장은 생활의 전부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장시간 노동 탓에 모든 인간관계가 직장에서 이뤄졌다. 노조 활동으로 배달호는 ‘사는 맛’을 느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으로 떠밀려야 했던 그에게 노동조합은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배달호는 대의원을 하며 현장에서 묵묵히 노조를 뒷받침하는 활동을 했다.

‘휘익~ 어이, 빨리 안 모이고 뭐하노!’ 배달호와 같이 일했던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은 호루라기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고 말한다. ‘호루라기 사나이’. 그의 별명이다. 대의원 조회나 집회 때 호루라기를 불며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기계 소리가 크게 나는 공장 안에서 조합원들을 모으기 위해 그는 항상 호루라기를 불었다. 배달호의 부인 황길영은 빨래를 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호루라기가 여러 번 나왔다고 전했다. 그는 뛰어난 기술자이기도 했다. 22년 동안 스카핑(scarfing) 기계로 보일러 패널을 가공하는 일을 했는데, 동료들은 그를 ‘스카핑의 1인자’라고 불렀다. 회사에서 상도 몇 차례 받아 특별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11년 전 두산중공업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10분을 가면 경남 창원이다. 2010년 창원과 마산, 진해가 창원시로 통합됐다. 창원과 마산은 노동자들에게 특별한 도시다. 1987년 12월 마산·창원에서는 기업별 노조의 약점을 보완하고 좀더 강력한 연대를 하기 위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역조직인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만들어졌다. 기업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연대는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출범시키는 힘이 됐다. 지금도 창원 노동자들은 ‘내 사랑 마창노련’이라 부르며 그 시절을 추억한다.

마창노련의 역사를 이어가는 민주노총 경남본부 2층에 금속노조 경남지부가 있다. 지부 문화체육부장을 하며 ‘배달호 열사 정신계승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강웅표(56)씨를 지난 2월11일 만났다.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 단체 관람으로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1천여 명이 함께 볼 예정입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네요.” ‘배달호’라는 이름을 꺼내자, 강 부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었다. 1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는 생생하게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화단 앞 담배꽁초들, 배달호의 마지막

“분신 장소에 가보니 화단 앞에 담배꽁초가 10개 넘게 있었습니다. 죽음을 결심하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렇게 예뻐하던 딸이 둘이나 있었는데….” 배달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해고자들 농성장을 찾아가 안부를 확인했던 사람이다. 죽기 며칠 전 배달호는 강 부장을 만나 ‘아내가 김치냉장고 경품에 당첨됐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걸 그때 알았다고 했다. 강 부장은 두산중공업 해고자다. 배달호가 마지막까지 걱정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대상이다. 2003년 18명이던 해고자는 이제 4명 남았다. 강 부장에게 배달호는 마음속 ‘응어리’다.

배달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추적하려면 2000~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5조원의 자산가치를 가진 공기업 한국중공업은 2000년 12월 3057억원을 받고 두산에 팔린다. 헐값 매각이라 특혜 의혹이 컸다. 새로운 경영자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2001년 1월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기 때문에 근로자들이 회사의 가치를 나누어 갖자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를 향한 경고였다. 그 뒤 1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으로 쫓겨났다. 회사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노무관리 인원도 17명에서 45명으로 늘렸다.

2002년 2월 노조가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민영화를 반대하며 4시간 연대파업을 했다고 201명을 징계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회사는 2001년 협상에서 ‘집단교섭을 하겠다’고 합의해놓고도 2002년 노조가 10차례나 교섭을 요구했지만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노조는 산업별노조로 전환하고, ‘대공장 이기주의’를 뛰어넘어 비정규직 등 전반적인 노동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집단교섭을 요구했다. “노조는 싸울 마음이 없었어요. 하지만 계속 협상을 거부하는데 정당한 노조라면 싸움을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조합원들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되니까요.” 노조를 이끌고 있던 강 부장(당시 위원장 직무대행)은 5월22일 파업에 들어갔고, 47일 동안 힘겨운 싸움을 했다.

대가는 끔찍했다. 18명 해고 등 620명이 징계를 당하고, 9명 구속에 6명은 수배됐다. 6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와 함께 노조 조합비·임금·부동산 등 가압류 금액만 45억원이나 됐다. 일반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임금까지 가압류한 건 노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압류는 가족들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줬다. 배달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파업, 구속 2개월, 정직 3개월, 가압류 등으로 6개월 이상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떤 달은 월급명세표에 5만8천원이 찍혀 있기도 했다. 허름한 집까지 압류되자 가족의 불안감이 커졌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딸의 학원을 끊고, 먹는 것도 줄여갔다. 보일러나 수도, 전기가 고장나도 고치기가 힘들었다. 카드를 긋거나 돈을 빌려 생활비를 마련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배달호는 미안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합원 급여가 압류되면서 노조 활동이 상당히 위축됐습니다.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주니까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죠. 조합비도 묶이니까 대출도 어렵고, 손배·가압류를 푸는 조건으로 회사 회유에 넘어가는 조합원도 많이 있었습니다.” 강 부장은 손배·가압류가 노조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했다. 이 무기는 효과가 좋아 노동현장에서 빈번하게 이용됐다. 2002년 7월 민주노총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당시 손해배상 청구 사업장은 39곳이고, 액수는 약 1264억원에 달했다.

이상한 건, 두산의 사례에서 보듯 회사가 잘못을 했는데도 노조가 왜 이처럼 가혹한 상황에 내몰려야 하느냐는 점이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노조의 파업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불법 딱지가 붙으면 노사관계에서 분쟁의 원인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합법파업은 하늘의 별 따기

노조는 왜 불법파업을 하게 됐을까? 노동법을 잘 살펴보지 않으면, 노조가 엄청난 불법행위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쉽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에게 파업할 수 있는 권리는 줬지만, 합법으로 가는 문을 극한적으로 좁혀놨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생존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민영화나 정리해고를 놓고 파업을 하면 불법이 된다. 회사의 잘못된 경영이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파업도 불법이다.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했을 때만 합법이 된다. 대신 ‘귀족노조’라는 욕을 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파업의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오늘 한국 노동자의 현실이다. 정부와 경영계는 불법파업을 엄단해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말하지만, 정작 합법파업의 범위를 늘리자고 하면 거세게 반발한다.

두산은 행정절차 하나가 문제가 됐다. 노조가 파업을 하려면 반드시 노동위원회 조정을 거쳐야 한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2002년 5월 두산중공업 조정 사건에 대해 “집단으로 할 것인가 사업장별로 할 것인가, 교섭 방법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쟁의가 발생하였다고 보기 어려워 조정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행정지도를 내렸다. 이는 사실관계조차 어긋난 어이없는 판정이다. 교섭 방법은 이미 2001년에 노사가 합의했기 때문이다. 노조는 행정지도가 내려진 상태에서 파업에 들어가 불법이 됐다. 대법원은 ‘행정지도’ 뒤 파업이 합법이라고 판결했지만, 노동부는 여전히 불법으로 해석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방용석 당시 노동부 장관은 2003년 2월 국회 사회·문화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두산중공업 노조의 2002년 5월 파업이 합법적이었다”고 답변했다. 장관조차 노동부의 입장과 달랐다는 얘기다. 강 부장은 “대법원 확정판결도 나오지 않았는데, 회사와 노동부가 노조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 징계를 하고, 법원은 너무도 손쉽게 손배·가압류를 받아줬다. 배달호 열사의 유서에서 보듯 법은 가진 자의 것”이라고 말했다.

배달호를 괴롭힌 것은 손배·가압류만이 아니었다. 2002년 7월27일 구속되고 9월17일 보석으로 나와 보니, 현장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노조 파업이 47일 만에 별 소득 없이 마무리되면서 회사는 단체협약을 해지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등 막무가내로 나왔다. 새로운 집행부까지 꾸린 노조는 11월15일부터 사흘간 파업 찬반투표를 하려고 했으나 회사의 방해로 무산됐다. 어려울수록 단결해야 하는데, 조합원들은 슬슬 노조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배달호의 가슴은 무너져내렸다. 힘이 약해진 노조는 그해 12월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집단교섭 조항을 단체협약에서 되레 삭제하고, 해고자 18명과 손배·가압류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협상을 마무리해야 했다.

배달호는 이 협상을 주도한 교섭위원 중 한 명이었다.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회사의 회유도 시작됐다. “생산 활동에 매진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전환배치를 받아들이면 가압류를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건 차가워진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회사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장에 오면 한숨부터 나오고, 집에 가면 가족에게 미안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배달호에겐 전부였던 공장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답답했다.

노조 잡는 덫, 손배 잔혹사

‘110000000000원.’ 민주노총이 지난 1월 집계한 노동현장의 손해배상 청구 금액이다. 빼곡하게 늘어선 ‘0’의 개수에 현실감각이 사라진다. 1100억원.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준다는 로또에 당첨돼도 해결할 수 없는 금액이다. 노동자들의 목을 옥죄는 손배·가압류는 특정 시기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늘 계속됐고, 어느 순간 노동현장에 ‘암세포’처럼 퍼져 걷잡을 수 없는 상태까지 돼버렸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에 손해배상이 청구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꽃피운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현장에서 우후죽순 노조가 만들어져, 1989년 노조조직률이 19.8%까지 치솟았다. 노동자들은 힘을 모아야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었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부담스러워했다.

1989년 8월1일 대구에 있는 자동차부품회사 (주)건화. 휴가를 마친 이 회사 노조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여름휴가 시작인 7월26일 지급된 상여금이 문제였다. 회사가 그때까지 월 240시간분의 임금을 기준으로 상여금을 줬는데, 이번에 말 한마디 없이 월 230시간으로 따져 적게 준 것이다. 노조는 8월1일 오전 8시 조합원들을 운동장에 불러 긴급 총회를 열고, 회사의 해명을 요구했다. 회사는 아무런 해명 없이, 빨리 작업을 시작하라고 맞섰다. 노동자들은 해명 없이는 일할 수 없다고 버텼고, 회사도 공장의 전원을 모두 끄면서 압박해왔다. 노조는 파업을 결심했고,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일단 낮 1시부터 일을 시작하겠다고 회사에 통보했다. 회사는 기계 예비가동을 하려면 3시간이 걸리니 야근을 요구했고, 노조가 거부하면서 결국 이날은 작업을 하지 못했다. 회사는 다음날 위원장 등 노조 간부 2명을 하루 불법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노조는 반발하며 농성을 시작하는 등 거세게 항의했다. 회사는 노조의 방해로 일주일 동안 정상적인 조업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해고자 2명을 상대로 1795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징계와 손해배상 문제는 모두 법원으로 넘겨졌다.

1990년 7월2일 대구지법은 ‘묘한’ 판결을 내렸다. 회사가 상여금을 적게 지급한 것과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징계한 것은 부당한 만큼 이들의 해고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8월1일 얼떨결에 이뤄진 작업 거부를 파업으로 봤고, 절차(쟁의 발생 신고 뒤 10일간 냉각 기간)를 거치지 않아 불법이라고 했다. 다만 회사가 원인을 제공했으니, 피해액 1795만원 중 30%인 538만원을 해고자 2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노동법의 특수성이 무시된 채, 민법에 있는 손해배상 조항이 노조 간부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당시 건화 노동자들의 임금은 월평균 50만원이었다. 월급의 10배가 넘는 손해배상 액수 앞에 가난한 노동자들은 암담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결국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회사는 손해배상 청구를 취하했다. 구심점을 잃은 노조는 와해됐다.

건화의 사례는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신종 노동탄압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줬다. 노태우 정부와 경영계는 노조를 약화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르는 노조를 기반부터 와해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최영철 노동부 장관은 1990년 10월22일 전국 근로감독과장회의를 열고 기업이 노조의 불법 쟁의행위로 재산상 손실을 입으면 민사소송을 제기하도록 지도하라고 지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 등으로 구성된 ‘경제단체협의회’도 지침을 통해 기업들에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독려했다. 정부와 기업이 손을 잡으니 파급력은 컸다. 1989년 1건이던 손해배상 청구가 90년 10건, 91년 23건으로 늘어났다. 노조는 파업 한 번에 경찰 투입, 구속, 해고에 손해배상이라는 고통까지 겪게 됐다.

사법부 또한 노동자들을 외면했다. 1994년 3월25일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첫 대법원 판결이 나오게 된다. 대구의 동산의료원 노조는 1991년 5월 임금의 차별 인상(일반 직원 3만5천원, 교수 40만원)에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으나, 지금은 ‘악법’으로 폐지된 직권중재(노동위원회가 중재를 결정하면 쟁의행위를 할 수 없다) 때문에 불법이 됐다. 9일 동안 진행된 파업으로 7명이 구속되고 29명이 해고됐다. 병원은 노조 간부 39명을 상대로 4억1600여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임금과 노조비 일부를 가압류했다. 대법원은 대구 동산의료원 사건에 대해 “정당성이 없는 쟁의행위는 불법행위를 구성하고, 이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사용자는 노조나 근로자에 대해 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노조 간부 7명에게 5천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노동현장에서 손배 청구는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정부가 먼저 칼을 휘둘렀다. 1994년 6월 철도전국기관차협의회,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 노동자들이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들며 파업에 나섰다. 이 건으로 서울지하철노조는 3천 명이 징계를 받고 공사는 51억12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며 조합비는 물론 노조 간부들의 부동산, 임금, 퇴직금까지 가압류했다. 배상 규모도 상상을 초월했고, 가압류의 범위도 잔혹했다.

손배·가압류는 노동현장에서 노조를 잡는 덫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덫은 ‘사냥감’을 잡든 잡지 못하든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다.

배달호가 죽음을 선택한 뒤, 회사가 노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공작을 펼쳐왔는지가 만천하에 폭로됐다. 2003년 2월 두산중공업 노조는 조합원들을 성향별로 분류해 감시하고 회유하는 등 노조를 와해시키겠다는 내용이 담긴 ‘신노사문화 정립계획’ 문건과 회사 간부의 수첩을 공개했다. 회사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노조 무력화 3단계 전략을 짠 뒤 ‘의식개혁활동’ ‘오피니언 리더 밀착관리’ ‘건전세력 육성방안’ 등 세부 작전을 추진했다. 조합원을 온건·조합추종·강성·초강성으로 등급을 매겨 관리하고, 파업에 참여하는 등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할 경우 잔업·특근을 통제하고 기피 업무로 전환배치를 하는 불이익을 줬다. 심지어 ‘구제불능’ 조합원들은 ‘천적을 발굴해 설득하라’는 메모까지 나왔다. 노동계는 ‘두산수용소’라고 비난했다. 노동부의 특별조사 결과, 불법 사실이 인정됐으나 구속된 경영진은 없었다.

기업의 손배·가압류는 늘 노동탄압과 함께 이뤄진다. 손해에 대한 보상보다도 노조를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손배·가압류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도 노조를 지키고 싶은 절박함이 컸기 때문이다. 배달호가 분신하고 같은 해 10월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이해남 세원테크 노조위원장도 손배·가압류와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2월 노·사·정은 손배·가압류를 자제하자는 사회적 합의까지 했으나 노동현장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결국 2012년 12월 한진중공업에서 또 한 명의 노동자(최강서)가 ‘민주노조 사수. 158억, 죽어서도 기억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목매어 숨졌다. 158억은 손해배상 액수였다. 지난 1월 기준으로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손해배상 소송이 걸려 있는 금액만 1128억원, 가압류는 168억원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대법원 판결 이행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132억원의 손해배상이 결정됐다. 민영화 반대 투쟁을 했던 코레일 노동자들은 162억원의 손배 소송을 앞두고 있다. 지금 이대로라면 ‘불행한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돈 때문에 모두가 모른 척하는 외로움에 삶을 포기하는 분들이 더 없기를 바랍니다.” 가수 이효리씨가 지난 2월15일 손배·가압류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동참하면서 쓴 편지의 일부분이다. 아름다운재단과 시민사회 연대기구 ‘손배가압류 잡자, 손잡고’는 공동으로 노동자들의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강 부장도 노동계가 손배·가압류 투쟁을 어떻게 전개할지 활발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사회가 손배·가압류 문제에 나서고 있지만, 우선은 주체들이 싸움을 해야 합니다. 1996~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노개투)의 경우 노동계가 전부를 걸어 이긴 거예요. 내 몸뚱이를 거기에 갖다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배달호, 김주익, 이해남, 최강서. 더 이상은 안 된다.

글 김소연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기자 dandy@hani.co.kr

■ 참고 문헌

‘쟁의 손실 노조에 청구하라, 노동부 지침’, <한겨레> 1990년 10월23일치 기사

대구지법, (주)건화 1990년 7월3일 판결(89가합13541, 90가합4543)

대법원, 동산의료원 1994년 3월25일 판결(93다32823)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단체행동권, 노동정책토론회> 자료집, 1995년 5월9일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 <배달호 열사 투쟁 자료집>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회의록, 2003년 2월19일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손배·가압류로 인한 노동탄압의 실상과 해결방안’

김순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평전 <인간의 꿈>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