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7:29 수정 : 2014.03.02 14:26

그곳은 야경이 제법 아름다운 서울의 한 오래된 주택가에서 작은 재래시장과 교회, 슈퍼마켓을 지나 옴팡하게 들어앉아 있다. ‘생활커피 콩밭 커피 로스터’. 번쩍이는 화려한 간판 대신, 밤이면 나팔꽃 줄기를 휘감은 조그마한 전구 하나가 재봉틀 테이블 위를 밝힌다. “난 여기 있어, 잠깐 쉬어가”라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불빛에 끌려 문을 열면, 사장님 책상에 앉아 있던 아낙네가 참한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혹은 “어서 오세용~” 하며 일어나 반겨준다. ‘아낙네’라는 닉네임 때문에 남자 독자들이 아낙네를 참한 여자로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 아낙네는 34살의 남자다. 뭐, 참하긴 하다.

아낙네가 손님을 기다리면서 앉아 있는 책상은 널찍한 사장님 책상이다. 책상에는 사장님 책상과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자개 명패가 있다. 명패에는 ‘勞動者 아낙네’라고 적혀 있다. 아낙네는 노동자에게 그 자리를 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커피를 내리고, 설거지를 하는 그는 한 카페의 사장님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였다.

서울의 거친 호흡 달래는 34살 남자

‘작명을 참 잘했다. 한번 들으면 까먹진 않겠네.’ 처음 콩밭카페와 아낙네에 대해 들었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 왜 하필 아낙네라고 지었을까? 수시로 콩밭카페를 드나들면서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 <칠갑산>을 들으며 흥얼거리다 문득 깨달았다. 아낙네는 <칠갑산>의 아낙네로구나! 숨겨진 고대 보물의 비밀을 알아내기라도 한 양, 혼자 희열을 느꼈더랬다. 옛날 노래를 좋아하는 아낙네의 취향이 반영된 이름이리라.

조용한 그 카페에는 빈티지한 전등 아래 커피콩과 마른 꽃잎이 담긴 컵, 장난감들이 곳곳에 있다. 콩밭카페 아래에 있는 가내 의류공장을 연상케 하는 재봉틀도 있고, 재봉틀 옆에는 디저트들이 앙증맞게 서 있다. 로스터 기계 옆에는 칠갑산을 형상화했다는 책장이 있다. 책장에는 롤랑 바르트 책이 많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집과 만화책, 범상치 않은 옛날 영화 DVD들도 눈에 띈다. 창가에는 더치커피가 참기름 병에 담겨 있고, 뽑기를 하면 나오는 조그마한 공룡과 곰돌이 인형이 지키고 있는 초록색 행운목 화분도 있다. 사진집과 독립영화 잡지, 고양이 잡지도 있다. 화장실로 통하는 뒷문에는 비틀스의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Magical Mystery Tour) 앨범 커버 디자인과 흡사한 무지개 디자인이 있다. 거기엔 ‘Magical Mystery Tour’ 대신, ‘Kongbat Coffee Roaster’라고 적혀 있다.

콩밭의 아낙네가 내려주는 커피는 밝고 다정한 맛이다. 집에 가서도 자꾸 생각나는 달콤한 끝맛을 가진 커피. 커피가 이렇게 달 수 있다니. 아낙네가 정성스럽게 내린 맛있는 커피 한 잔에 오늘 하루의 조급함과 불안함, 때로는 외로움과 피로함까지 가시게 된다.

서울 도심의 거친 호흡과는 다른 호흡으로 그림처럼 서 있는 콩밭카페. 내가 사랑하는, 앞으로도 더 사랑할 것만 같은 콩밭카페를 인터뷰해보았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그리고 천천히 아낙네는 말을 시작했다.

싫증난 직장, 여전한 영화, 재미난 커피

콩밭의 아낙네는 원래 영화를 전공했다. 한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일했고, 프로덕션에서도 있었으며, 프리랜서로도 일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그와 맞지 않았고, 꼭 자신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에서 보람을 느낄 수 없었다. 재미도 없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안 할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에는 영화를 도구로 생각했다면 지금은 영화 자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콩밭에서는 금요일마다 영화를 상영한다. 그리고 kongbatcoffee 트위터에서 상영 영화가 공지된다.

커피는 4년 전쯤 취미로 배우게 되었다. 커피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콩밭카페를 오픈하기 얼마 전,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일하면서였다. 그러니까 커피 일을 한 것은 1년 몇 개월밖에 안 된 거였다. 그는 원래 조그만 카페를 좋아하는 커피 애호가였다. 대학로의 학림다방이나 성균관대 앞 카페를 자주 다녔다.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카페를 열겠다고 했지만 아주 진지한 것은 아니었고, ‘말하다보면 할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커피 일을 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하기 싫은 일을 피하다보니, 덜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커피 일을 하겠어!’가 아니라 질리지도 않고 자신과 잘 맞아서 한다.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제하면서 가는 것도 방법이라며, 운 좋게도 갑자기 하고 싶은 게 뚝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재미가 없으면 안 하겠다는 생각도 있고, 싫증도 잘 내는 성격인데 커피는 그렇지 않아서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카페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인도네시아 여행이었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친구 아버지가 커피 농장을 소개해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인도네시아에 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당시 아낙네는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때였는데, 취업 문제로 아버지와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갔다 와서 뭐라도 안 하면 취업을 하겠다고 아버지와 담판을 짓고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바이어 행세를 해야 보여준다는 말을 듣고, 그는 “쑤뻐르 그레이드 꼬삐를 찾아온 미쓰따르 낌”이라고 소개하면서, 바이어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다. “그냥 보고 하는데 기분이… 아, 이 정도면 취미… 이상인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약간… 책임을 져야겠다…”라는 생각도 들었고, 더 유예하기 힘든 상황이어서 귀국하자마자 부동산 중개소에 들러 자리를 알아봤다. 출퇴근을 싫어해서 집 주변에 카페 자리를 알아봤다. 2~3일 만에 그냥 계약했다. 경기도 남양주까지 가서 로스터 기계를 주문하고, 다른 기계도 중고로 구하고, 인테리어도 모두 직접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낙네가 손수 다 했다. 내부 공사에만 두 달이 걸렸다. 당시까지 하던 것을 다 접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하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낙네가 담뿍 묻어나는 콩밭카페가 2012년 10월14일에 문을 열게 되었다.

좋은 커피 골라 좋은 가격에 전달하는 사람

그에게 커피에 대해 물어보았다. 좋은 커피에는 좋은 생두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좋은 커피를 골라서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의 은혜와 농부의 수고가 없으면 불가능한 거겠죠. 우리가 커피를 마시는 것은 어느 정도 착취의 산물이기도 하고. (중략) 하여튼 좋은 재료.”

“하지만 나는 장인이 아니에요. 커피는 내 생계 수단이고 직업일 뿐이고. 하지만 좋아하니까 하겠지. 커피의 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요.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지. 돈 받기 부끄럽지 않게. 일단 커피를 하니까 남보다 잘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고.” 정작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낙네. 자신보다 커피를 좋아하는 손님이 더 많을 거라고 했다. “의외로 미식의 영역에는 관심이 없어요.” 먹고 싶은 것이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고 그저 맛없는 게 많을 뿐이라고 했다.

맛을 확인하는 차원에서만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요즘엔 하루에 한 잔도 안 마실 거라는, 쉬는 날에는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는 아낙네. 현재 그에게 커피는 노동이 되었다. 커피를 처음 배웠을 때보다는 덜 재밌지만 그래도 여전히 할 만하다. 예전처럼 커피를 즐기지는 못하지만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아낙네는 늘 단골손님들에게 “커피 마실 만해요?”라고 묻는다. 인터뷰를 한 날, 내 빈 커피잔을 치우면서 아낙네는 말했다. “이렇게 싹 비우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손님이 커피를 남기면 꼭 맛을 본다는 아낙네. 소심해서 커피를 남긴 손님이 자기 전에 생각난다고 했다.

커피는 변수가 많아서 잘하기 워낙 힘들다고 한다. 심하게 말하자면 똑같은 한 잔의 커피는 없는 거라고. 아낙네는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이런저런 생두를 구해오고, 블렌딩도 볶는 것도 추출도 다르게 해본다. 한 단계 한 단계가 모두 변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재밌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커피는 그만큼 정성을 전달하기 좋은 매체라고. 자신이 커피콩을 볶고, 추출해야 맛을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직접 한다. 물론 모두가 로스팅과 추출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잘 볶은 커피를 가져와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아낙네의 경우는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일관된 맛을 위해서라도.

그에게 좋은 커피란 나도 맛있고, 다른 사람도 맛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좋은 커피의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단맛이 좋고 적당한 산미와 아로마가 있으면서 깨끗해야 한다. 또 불쾌할 정도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쓴맛, 담배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면서. 그래서 마시고 나면 속 쓰리지 않는 커피를 만들려고 한다. 커피나 음식이나 똑같이 정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성 없는 음식을 먹는 것은 비참하다고. 그에게 정성이란 주문을 외우고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하자면 다정한 커피죠.”

아낙네는 마시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기분 좋은 가격으로 커피를 판다고 했다. 늘 ‘기분 좋은 가격이 뭘까?’ 생각하며 가격을 책정한다. 단가도 단가지만 최대한 싸게, 그렇지만 자신이 하기 싫을 정도는 아니게. 내가 하기 싫을 정도면 커피도 맛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싸게 가격을 책정하지만, 콩밭에서의 커피 한 잔 값(3500원)은 누군가에게는 한 끼 식사 가격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커피가 그만한 가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체 불가능한.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카늘레를 구웠다. 오래 두면 눅눅해져서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날그날 팔아야 한다는 카늘레. 보통 주말에 굽는다고 했다. 바닐라 빈을 끓여 유기농 설탕과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고, 동으로 된 카늘레 틀에 밀랍을 붓고, 반죽을 붓고, 또 오븐에 넣은 카늘레를 시간에 맞춰 뒤집어주었다.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그에게 음식에 정성을 들이는 것에 의미를 갖게 해준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런 건 없다고 했다. 외식을 안 좋아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낙네 집은 외식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군것질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경상남도가 고향인 그는 대학교 때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 자취를 했다. 그러다보니 밥을 자주 사먹게 되었는데, 좋은 식당도 많지만 좀 정성이 없다고 느꼈다. 회사 다닐 때도 그게 가장 싫었다. “푸드코트 같은 ‘띵동띵동’ 소리 나는 데 있잖아요. 이건 뭐지? 너무…. 어떨 때는 혼자 그런 데서 먹어야 할 때도 있어요. 그럼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너무 사무치는 거지.” 끼니를 중요시하는 그는 그날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하루 기분이 좌우되기도 한다. 편리한 음식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항상 하신 말씀이 “한 번 거른 끼니는 다시 찾아 먹을 수 없다”였다.

그는 또 장갑을 끼고 일어나 뜨거운 카늘레를 네 번째 뒤집었다.

동네 좋은 가게가 소망, 좀 놀면서…

꿈이 뭐냐는 질문에 “원래 길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라서 장기적인 질문엔 할 말이 없어요. 꿈이 뭐냐라든가. 훗날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어서. 그래서 이렇게 됐는지도. 계획적으로 살지 않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가게가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봐도 좋은 가게, 동네에 있는 좋은 가게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낙네는 가게를 위해서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가게를 안정되게 하는 것을 처음으로 꼽았다. 같이 일할 사람도 구하고 싶고, 인터넷으로 원두도 팔고 싶다. 그리고 노동시간을 좀 줄이고 싶다.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세운 목표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노동시간으로 일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자가 착취를 많이 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옹박, 또깨, 설이란 이름을 가진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사는 아낙네. 집에 가서 고양이들을 껴안고 자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거의 풀린다고 했다. 겨울에 고양이가 이불 안에 들어오면 일어나지 못하겠다고…. 콩밭 휴전(田)일인 월요일이면, 밀린 집안일과 고양이들의 생식(밥)을 만들어주며 고양이와 함께 집에 있다고 한다. 집에 가서도 가게일로 초과근무를 하게 돼서 자기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을 흐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가 내려주는 다정하고 정성 어린 커피에는 아낙네와 그의 삶이 담겨 있었다. 이날 아낙네가 구운 카늘레는 굉장히 행복한 맛이었다.

글 박진솔 대학생

■ ‘독자의 인연 인터뷰’는 독자에게 열린 지면입니다. 독자가 인터뷰어가 되어 자신의 부모, 자식, 친구, 친척, 동료 등 가까우면서도 정작 궁금한 것을 묻지 못했던 이를 직접 인터뷰하는 형식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못하는 이야기가 많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인터뷰를 하면 뜻밖에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0자 원고지 30장 안팎 분량에, 일문일답이나 수필, 일기 등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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