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2:06 수정 : 2014.02.05 13:57

록은 차라리 죽은 것만도 못해

진짜 충격적인 일은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고

섹스와 마약이나 가르치고 있지

그러니 저항 같은 소리 그만해

신은 TV 안에 있어

-, 메릴린 맨슨

메릴린 맨슨이 ‘록의 죽음’을 선언한 지 15년이 지났다. 그래도 그에게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이라도 있었다. 후배들의 자기인식은 처연할 지경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쓸데없는 개멋에 취해

미련하게 청춘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네

이런 비호감적인 음악을 해봤자 더 이상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늦지 않았어 그 기타를 팔아버리고 옷 한 벌을 더 사

노래방에서 연습한 알앤비를 그녀에게 들려줘 베이베

다시는 홍대 앞에서 기타 메고 폼잡지 않을 거야

함께 불러 알앤비, 리듬 앤 블루스

-,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Feat. 크라잉넛·갤럭시 익스프레스·10cm·술탄오브더디스코)

-5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한 록의 여제, 혹은 아름다운 로커, 무엇보다 ‘록이 죽은 시대’에 ‘살아남은 로커’인 서문탁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다. “록은 죽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문탁- 하필 미국 록가수 메릴린 맨슨이 <록 이즈 데드> (Rock is dead)를 발표한 해에 제가 데뷔했죠. 저는 한 번도 장르로서 ‘록’의 상황을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록만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음악을 해본 적도 없고요. 음악 신 전체가 죽어간다는 느낌은 있죠. 정확히는 인간의 놀거리가 많아졌다는 느낌? 문화가 다양해지면서 음악이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작아진 거죠. 록은 죽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록이 죽었나보죠. 저는 모르겠네요. 그런데 힙합은 살았나요?

-흥미로운 반문이다. 대답은 벌써 나와 있다. 2007년, 힙합 뮤지션 나스가 <힙합 이즈 데드>(Hiphop is dead)로 메릴린 맨슨에 화답했기 때문이다. ‘록은 죽었다’는 표현이 적당치 않다면, ‘록은 변했다’는 어떤가? 언젠가부터 록 신에서 반체제 아이콘을 찾기 어려워졌다. 보이는 건 온통 악동들뿐이다.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서문탁- 유행이 도는 거죠, 패션처럼. 음악도 직진만 하지 않아요. 그럼 ‘복고’란 표현이 있을 수 없죠. 타이밍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록의 타이밍, 록의 시대가 아닌 거죠.

-지난 시절 로커들이 보여준 저항적인 태도 역시 유행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인가.

서문탁- 그런 부분도 있다고 봐요. 록은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 ‘록은 저항이다’라는 규정 자체가 록의 정신에 위배되는 거예요. 그럼 ‘록은 자유다’라는 말은 어떻게 되는 거죠? 1960년대와 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저항음악으로서 록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사회적인 불안과 갈증의 영향이 컸어요. ‘저항’이 바로 그 시절의 대세적 흐름이었던 거죠. 하지만 그게 록의 전부는 아니에요.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것도 록이죠. 우리는 지금 엄마와 아빠에게 저항해보는 게 우선인 사회에 살고 있잖아요? 록에 대한 정의를 섣부르게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대중음악 장르로서 록의 기반이 협소해진 건 분명해 보인다. 로커인 임재범도 박정현과 함께 부른 리듬앤드블루스(R&B)풍 발라드 <사랑보다 깊은 상처>로 더 알려져 있지 않은가. 사실 허스키하면서 울림이 깊은 임재범의 목소리는 R&B에도 굉장히 잘 맞는다. 단독 콘서트에서 어리사 프랭클린의 <내추럴 우먼>(Natural woman)을 부르는 걸 들었는데, 서문탁의 목소리에도 솔(Soul)이나 R&B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인음악 쪽으로 전향해볼 고민을 한 적도 있는가.

서문탁- 고민할 필요가 뭐 있어요. 제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하고 싶고, 할 생각이에요. 솔과 블루스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김태원 선배가 저에게 한 말이 있어요. “록을 하지 마. 음악을 해.” 맞는 말이죠. 내 음악을 록으로 정의해버리면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르게 돼요. 저는 록을 장르로 생각하지 않아요. ‘스피릿’(Spirit)이죠. 스트레이트한 것,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 만약 제가 로커라면, 장르가 아니라 정신으로써 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스피릿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얼마 전 독도에서 <아리랑>을 불렀다고 들었다. 독도 공연은 록의 스피릿에 맞는 건가.

서문탁- 하하. 안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가수 김장훈씨도 독도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데, 왜 하필 독도인가. 독도가 정말 로커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서문탁- 로커이기 때문에 독도에 간 건 아니에요. 저와 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군요. 저는 음악인의 지위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싶지는 않아요. 연예인으로서 가진 권한과 영향력을 이용하는 월권인 것 같거든요. 음악인은 음악 안에서 음악으로만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국민의 일원으로서 제가 가진 정치적 견해와 음악을 분리하고 싶어요.

-하지만 민족주의의 첨예한 전장으로서 상징성을 가진 독도에서 공연하는 건 그 자체로 정치적 행동이 아닌가.

서문탁- 해석을 부여하는 것까지 내가 막을 수는 없죠. 독도가 민감한 사안이 얽힌 공간인 건 맞죠. 거기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한데… 음,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여기서부터가 바로 가수의 지위를 이용하는 정치적 발언이 될 것 같네요.

-바로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오프더레코드로 할 테니 들려달라.

서문탁- 하하, 지금 녹음기를 틀어놓고 오프더레코드라는 거예요?

-각도를 바꿔 질문한다면, 예를 들어 왜 콜트·콜텍 기타공장이 아니라 독도였나. 좀더 ‘록적인’ 공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서문탁- 바로 그거예요. 그게 록에 대한 고정관념이라는 거죠. 노동자를 위해서만 공연하는 게 록의 당위적 의무라고 말한다면, 저에게는 불편하게 들려요. 그 자체가 록에 대한 억압이 되는 거죠. 어떤 노동자들이 저를 원하고, 제가 그들을 지지하고 또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얼마든지 달려가서 공연할 거예요. 그게 독도에서 노래를 부르면 안 될 이유는 아닌 거죠.

-서문탁은 두 차례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 해외로 떠났다. 이택광 교수가 그에 대해 물었다. “왜 떠났나. 록을 회의해서는 아닌가?”

서문탁- 록을 회의해서가 아니었어요. 가수 생활을 회의했기 때문이에요. 21살 때 사회와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가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홀어머니 아래서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고, 가장 빨리 돈을 벌 방법을 찾아 가수를 선택했죠. 가수가 꿈이 아니라 수단이었던 거죠. 운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지 모르지만 데뷔를 굉장히 빨리 할 수 있었죠. 데뷔하자마자 음반이 대박 났고요. 남들보다 순탄하게 시작했죠. 그런데도 돈이 벌리지 않더라고요. 당시 계약 관행으로는 가수가 돈을 벌 수 없었어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연예인의 삶이 족쇄가 됐어요. 그걸 거부할 자아를 정립하지도 못했던 때고요.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3집 음반을 내고 계약이 끝났어요. 가수로서는 오른 몸값으로 재계약할 때 돈을 벌게 되는데, 더 이상 돈이 저에게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돈은 어머니를 위해서 벌고 싶었던 거고, 그때는 제 삶을 고민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서문탁일까, 이수진일까?” 우습지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죠. 가수가 정말 내 갈 길인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국내에 머물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갑자기 일본으로 떠났죠. 가수를 포기한다면 거기서 새 길을 찾고 싶었고, 가수를 계속한다면 거기서 세계적인 가수가 될 준비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 일본에서는 서문탁이 아닌 이수진의 삶을 살아보려고 했죠. 그래서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생활했어요. 기숙사에 거주하며 라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사람들이 자꾸 알아보니까 처음엔 정말 곤란했어요. 결국 그 경험이 오히려 ‘서문탁’이란 이름, 연예인이라는 짐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이택광 교수가 다시 물었다. “섣불리 일본으로 떠났다가 한 번 ‘망했지’ 않나. 다시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서문탁- 하하. 일본에 갈 때 경고를 많이 받았어요. 지금 한국을 떠나면 잊혀진다. 너를 기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돌아와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댄스그룹의 시대가 열려서 제가 설 무대가 없었어요. 생활이 안 될 정도였죠. 노래하는 사람에게 노래할 무대를 주지 않는다면, 살아 있지 말라는 선고나 다름없는 거예요. 매니저가 고민 끝에 극약 처방을 내렸죠. “미사리 라이브클럽으로 가자.” 그 제안을 받고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수락하면 가수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요.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죠.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면, 뭘 할지는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자. 라이브클럽으로 가면서, ‘한물간 가수의 공연은 하지 말자’고 자신과 약속했어요. 보이스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면서 한 무대 한 무대 이를 악물고 노래를 불렀죠. 그랬더니 거기서도 팬이 생기는 거예요. 돈이 모이기 시작했고요. 거기서 모은 돈으로 대출을 끼고 집을 하나 샀어요. 경제적으로 좀 안정되니까 세계적인 가수가 되겠다는 내 꿈, 내 이상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발걸음을 멈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웠어요. 어쩌면 한국에서 나를 불러주는 무대가 없을 때가 기회라는 판단을 했어요. 그래서 어렵게 장만한 집을 팔고, 그 돈으로 유학비를 마련해서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거죠. 아는 사람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인적 네트워크를 찾아 버클리 음대에 들어갔고요. 그게 <나는 가수다>의 부름을 받아 돌아오기 전까지 제 스토리예요.

-콘서트에서 “<나는 가수다>로 내 인생의 2막이 열렸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한편, 일부 중견가수들은 예술가들을 생존경쟁 구도로 몰아붙이는 <나는 가수다>의 포맷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서문탁- 그럼 예술가를 토크쇼와 예능으로 몰아넣는 문화가 더 바람직한가요?

-동의한다. 정작 중견가수들은 가수 지망생의 서바이벌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나가지 않는가.

서문탁- 제 말이 그거예요. 음악에 순위를 매길 수 없다면, 왜 프로들은 아마추어를 평가합니까? 노래 부르는 기술만으로 가수가 되는 게 아니에요. 과연 존경받는 가수들은 다 스킬이 대단할까요? 저에게 <나는 가수다>는 그냥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일 뿐이었어요. 가수들을 줄 세워 순위 매기는 포맷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투표로 줄을 세우지 않아도 다들 마음속으로는 줄을 세우지 않습니까?

-사실 서문탁의 삶에서 <나는 가수다> 출연은 ‘도전’이라 말할 거리도 못 된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아메리칸 아이돌> 오디션에도 나갔다고 들었다. 한국 최고의 가창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가수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다니, 용기야 굉장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건가.

서문탁-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버클리 음대에 출연자를 요청했는데, 교수님이 저를 추천했죠. 그 프로그램에는 28살 미만, 그리고 미국 시민권자에게만 출연 자격이 주어져요. 저야 둘 다 충족하지 못했죠. 하지만 <아메리칸 아이돌>은 음악 관계자들이 다 모여 있는 좋은 먹잇감이잖아요? 일단 두드려보기로 결심하고 찾아갔어요. 다행히 관계자들이 꼼꼼히 지원서를 읽지 않아 오디션까지는 볼 수 있었죠. 노래를 들은 심사위원들의 첫 질문이 “몇 살이냐”였어요. 나이 제한 때문에 통과시킬 순 없지만 정말 뽑고 싶다고, 음악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입바른 말일 수도 있지만 큰 힘이 됐어요.

-콘서트장에서 “보는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음악”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돌 가수가 쉽게 비난의 타깃이 되곤 하는데, 리스너의 책임이 더 크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듣는 음악’에 아무도 돈을 지불하지 않으니 눈요기를 곁들여 제공하는 가수들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은 게 아닌가.

서문탁- 누구 하나의 잘못이겠어요. 전체적인 악순환이라고 봐야죠. 가수들이 왜 음악의 본질이 아닌 ‘보여주기’에 집착할까요? 대중이 이미 단맛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죠. 이제 쌀떡을 좀 맛있게 먹어달라고 권할 수 없는 지경이 됐어요. 음악만으로 충분한 공연을 하고 싶어도 음악을 듣는 사람들부터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요.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본질이 밀려나고 있는 거죠.

-가수로서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는가.

서문탁- 가수가 스스로 어렵다고 고백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나는 인기 없는 가수다’라는 말처럼 들리니까요. 하지만 이제 상황은 인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생존의 문제가 됐어요. 돈을 들인 만큼 가수가 돈을 찍어내는 게 현실이죠. 대형 기획사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고, 그들은 기성 가수를 원하지 않죠. 그러면 노래만 불러온 가수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본질에 더 충실하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리스너들이 좋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장인의 시간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장인은, 장인의 시대가 열렸을 때가 되어서야 급하게 찍어낼 수 없기에 장인이죠.

-콘서트장에 서문탁의 팬클럽이 걸어놓은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팬 연령층 고려해서 다음 공연은 디너쇼로. 평균연령 39.5세, 우리 진지하다 -_-” 39세면 딱 평균수명의 중간값쯤 된다. 현장을 둘러본 바로는 팬 연령층이 광범한 것 같았다. 어린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서문탁- 어린아이들은 일단 연령대가 높은 팬들의 부산물일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걔들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닐지도! 어쨌든 그게 제 지향이에요.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공연,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음악,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달라도 좋은 음악이요. 록공연이라고 젊은 관객들이 뛰어노는 광경을 상상하고 오신 분들은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데뷔할 때부터 제 공연에는 60대 남자분들이 혼자 오곤 했어요. 젊은 관객들은 록음악 자체의 자극성에 끌려서 온다면, 고연령대 관객들은 제가 살아가는 방식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나이 많은 관객들이 오히려 극성맞게 잘 뛰어놀더라.

서문탁- 사실 진짜 록을 좋아하는 세대는 그분들이죠. 대중음악이 곧 록음악이던 시대를 거치셨으니까요. 그런 분들이 더 많이 왔으면 해요. 제 공연이 록 스피릿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하죠.

-이택광 교수는 서문탁의 음악에 현대적인 요소와 고전적인 요소가 잘 접목됐기 때문일 거라고 평가했다.

서문탁- 맞아요. 어떤 것도 영원히 올드하게 남을 수 없는 거죠. 요즘에는 재미동포들이 더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한국 문화의 흐름과 단절된 채로 ‘이게 한국적인 거야’라는 고정적인 상을 가지고 있다보니, 문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경험한 사람보다 더 고지식한 관점을 갖게 되는 거죠.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파격적인 음악도 한곳에 갇혀 고립되면 결국 늙어버리게 되죠. 록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흐름을 믹스매치해온 제 음악의 시도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팬 연령의 폭이 넓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참관한 오다인 인턴기자가 물었다. “이번 콘서트의 테마는 ‘가면무도회’였다. 가수 ‘서문탁’의 가면을 쓴 인간 ‘이수진’, 두 가면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는가?”

서문탁- 어릴 때는 그게 정말 힘들었어요. 외국으로 떠난 것도 ‘인간 이수진’의 삶을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고요. 이제는 이수진과 서문탁 모두 ‘나’라는 걸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어요. 어떤 가면이 진짜 나인지, 어떤 가면을 쓸 때가 더 행복한지를 결정할 필요가 없죠. 노래 부를 때는 서문탁,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이수진이어야 하거든요.

-세계적인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으니, 세 번째로 해외에 나가게 될 거라고 봐도 되는가.

서문탁- 두 번은 계획 없이 나갔고, 세 번째는 완벽하게 준비하고 나갈 생각이에요. 미국에 가보고 느낀 게 많아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안 먹히던 제 허벅지 사이즈가 거기선 통한다는 것! 한국에만 있었으면 허벅지가 안 먹혀서 가수로선 어렵다고 생각할 뻔했어요. 사실 여기가 내 허벅지랑 맞지 않는 곳일 뿐이었는데. 그런데 질문이 뭐였죠?

-콘서트에선 “비욘세 뺨 때리는 허벅지”라고 말했는데. 허벅지 이야기를 유독 많이 한다. 혹시 진지하게 허벅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건가.

서문탁- 네, 아주 진지하게 합니다. 한국 남자들이 제 몸매를 너무 힘들어하잖아요. 저도 그들에게 아픔 주기가 미안해요. 그런데 외국에 가면 남자들이 제 허벅지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거기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됐어요. 내 목소리 역시 외국에서 더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나서야죠!

세계적인 가수의 꿈. 더 나아가 세계적인 허벅지에 대한 확신.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느닷없이 라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설 무대 없는 시기를 해외 진출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 인생의 행복한 결말을 좇아 빌딩을 구입하는 가수들 틈바구니에서 집을 팔아 공부를 시작하고, 그들이 <나는 가수다>조차 점잖치 못하다고 고개를 저을 때 <아메리칸 아이돌>의 문을 서슴지 않고 두드리는 사람. 그녀는 록의 멸종보다는 록의 진화를 말하고, 록은 끝났느냐는 질문에 지금은 록의 시대가 아닐 뿐이라고 대답한다.

인터뷰 말미에 그녀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은 ‘나는 어떻게 죽게 될까’라는 질문과 같다고 했다. 그녀의 삶이 바로 ‘록’이 아닌가. 인터뷰 주제를 ‘록의 죽음’으로 선정하고 그녀를 몰아붙인 게 미안해진다. 죽음을 함부로 입에 담은 건 아무래도 록에 대한 나의 애정이 부족했던 탓이다. 돌아와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노래들을 찬찬히 들어보았다. 콘서트에서도 호응이 아주 컸고, <나는 가수다>에서는 객석을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어 화제가 됐던 <등대지기>의 노랫말이 나를 전율케 한다. 인터뷰가 부질없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2시간 동안 설전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고서, 2분 만에 노래에 설득당하다니.

모질게도 비바람이 저 바다를 덮어

산을 이룬 거센 파도 천지를 흔든다

생각하라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마음을

-<등대지기>, 서문탁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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