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1:48 수정 : 2014.02.05 13:56

김연아의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 그리고 어머니 박미희씨가 있었다. 오늘의 김연아가 있기까지는 8할 이상이 박미희씨 덕이었다. 2006년 11월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 첫 우승 뒤 인천공항에서 환영받고 있는 어머니 박미희씨와 김연아 선수.한겨레 자료
지난 1월3~5일 경기도 고양시 어울림누리 얼음마루에서 열린 ‘제68회 전국남녀 종합피겨선수권대회’는 3천여 석의 입장권이 예매 시작 15분 만에 매진됐다. 이 대회가 유료 대회로 바뀐 건 불과 1년 전이다.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제67회 대회도 애초 무료 입장이었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출전한다는 소식을 접한 팬들로 인해 유료 대회로 바뀌더니 급기야 암표까지 등장했다. 1만5400~1만9900원짜리가 5만원, 심지어 10만원 이상에 거래되기도 했다. 당시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들은 “김연아의 팬들이 많이 몰리면 안전 문제에 신경 써야 해서 유료화했는데, 그래도 그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시청률 조사업체인 TNmS에 따르면, 1월4일 방송된 KBS2 중계방송(오후 4시58분~6시10분)은 전국 기준 7.7%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 김연아 선수가 출전한 3분여 동안(쇼트프로그램은 2분50초)은 전국 기준 10.1%, 수도권 12.9%였다. 최고 1분 시청률은 김연아의 점수가 발표되는 순간으로, 전국 시청률은 무려 11.1%, 수도권에서는 14.4%까지 치솟았다.

김연아는 천부적인 자질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계 정상에 올랐다. 김연아가 캐나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 획득한 228.56점(쇼트프로그램 78.50, 프리스케이팅 150.06)은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던 엄청난 점수였다. 김연아는 은메달을 딴 라이벌 아사다 마오(205.50점)를 무려 23.06점 차로 제쳤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격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는 2010년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 10걸, 선정 ‘올해의 여자 선수’, 그리고 스포츠 아카데미도 올해 최고의 여자 선수로 김연아를 선정했다. 이후 김연아는 상업광고(CF) 등으로 매년 100억원 이상 벌어들여, 돈을 많이 버는 세계 여성 스포츠 스타 10명 안에 꼬박꼬박 들어가고, 한 번에 수억원씩 통 큰 기부도 하고 있다.

‘피겨여왕’ 김연아와 ‘여왕의 엄마’ 박미희

오늘날의 김연아가 있기까지는 8할, 아니 9할 이상이 어머니 박미희씨 덕분이었다. 박미희씨는 1996년 7월 김연아가 만 6살 때 집 근처에 문을 연 과천실내빙상장으로 김연아를 데려갔다. 결혼 전 잠깐 취미로 했던 피겨스케이팅의 기억을 되살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김연아는 과천실내빙상장에서 유종현 코치의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피겨를 배우기 시작했고, 신흥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선수생활을 시작해, 이제 올림픽 2연패를 눈앞에 둘 정도로 세계 피겨 역사의 전설적인 선수가 되려 하고 있다. 그동안 박미희씨는 마치 김연아의 그림자처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따라붙어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했다. 링크에서는 제2의 코치, 링크 밖에서는 매니저 또는 엄마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친구가 되기도 했다.

김연아는 2000년대 들어 CF계의 아이콘이었다. 항상 CF 섭외 1순위였고, 김연아를 캐스팅하려는 회사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박미희씨는 김연아가 속해 있던 IB스포츠와 계약 기간이 끝난 2010년 5월1일부터 김연아의 매니지먼트를 전담할 주식회사 올댓스포츠(ATsports)를 설립해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김연아는 주주로 참여하도록 했다.

올댓스포츠는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후배 박소연·김해진·김진서 등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그 밖에 봅슬레이연맹, ‘제2의 손연재’라 불리는 천송이, 암벽여제 김자인 등과도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어 피겨 외의 종목에도 시야를 넓혀가고 있다.

1970년대, 피겨는 아니지만 한국 스피드스케이팅계에 깜짝 스타가 나타나기는 했다. 이영하는 1976년 1월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세계주니어 스피드스케이팅대회 남자 3천m와 5천m에서 1위, 1500m에서 2위에 올라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종합 2위에 그친 선수가 4년 뒤인 1980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겨울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1천m, 1500m, 5천m 그리고 1만m 금메달을 독차지하면서 5관왕에 올라 동·하계 올림픽 사상 전무후무한 성적을 올린 미국의 에릭 헤이든 선수였다.

당시 이영하 선수의 기록을 보고 북한 선수 8명이 대회 출전을 포기한 채 되돌아갔고, 중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미국 선수들도 이영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영하는 성인대회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금방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이영하는 에릭 헤이든이 5종목을 모두 석권한 레이크플래시드 겨울올림픽에 출전해 500m 19위, 1500m는 22위라는 참담한 성적에 머무르고 말았다.

한국의 겨울 스포츠는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겨울올림픽에서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이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면서 세계 수준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은 400m를 도는 스피드스케이팅에 비해 111.12m라는 좁은 링크를 도는 경기이기 때문에 다리가 길지 않은 아시아권 선수들에게 유리한데다, 당시 편해강 등 걸출한 지도자들이 있어서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들의 짬짜미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은 알베르빌 겨울올림픽에서 김기훈 선수가 남자 1천m와 5천m 단체전에서 2관왕을 차지하면서 한국에 겨울올림픽 첫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이후 전이경, 안현수, 진선유, 채지훈 그리고 심석희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상권 선수를 끊임없이 배출해오고 있다. 또한 한국이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까지 획득한 45개 메달 가운데 39개, 금메달 23개 가운데 20개가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그러나 올해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여자 쇼트트랙과 달리 남자 쇼트트랙은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다. 내분이 문제다. 한국체육대학과 비한국체육대학의 파벌 싸움 때문에 쇼트트랙 사상 최고의 기량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안현수 선수가 러시아로 귀화해서 러시아 대표로 출전한다. 안현수 선수의 아버기 안기원씨는 쇼트트랙을 하는 안현수 선수의 막내동생마저 외국으로 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쇼트트랙은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에 나가기 위한 국내 선발전이 열릴 때마다 ‘짬짜미 파문’이 일어난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남자 1500m 등 2관왕 이정수와 남자 5천m 계주 은메달리스트 곽윤기 선수가 서로 짜고 경기를 치른 이른바 짬짜미로 자격정지를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정수·곽윤기 선수의 짬짜미 파문은 그동안 쇼트트랙계의 부조리가 모두 압축돼 있는 완결판이었다.

쇼트트랙에서 국가대표가 되면 겨울아시안게임이나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이나 메달을 따서 남자의 경우 병역 면제 혜택과 평생연금이 보장되고, 여자 선수도 수많은 포상금과 함께 평생연금이 보장됐다. 그래서 국가대표 자리를 놓고 갖가지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툭하면 불거져나온 감독들의 선수 폭행도 이미 오래된 관행처럼 이어졌다. 지도자들이 손바닥과 주먹뿐 아니라 심지어 스케이트날 집, 하키 스틱 등 빙상장에 있는 모든 ‘흉기’를 동원해 10대 제자를 폭행했다. 선수와 지도자, 심지어 학부형까지 서로 패거리를 만들어 상대 패거리에게 온갖 해코지를 하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때 쇼트트랙을 학원 스포츠에서 영구 퇴출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태릉선수촌 입촌을 거부하기도 했다. 심지어 “라이벌 중국 선수들에게는 뒤져도 되지만, 상대 패거리 선수가 뒤에서 치고 나오면 같이 넘어져라”는 코치의 지시가 폭로되기도 했다.

짬짜미는 이정수 선수가 밴쿠버 겨울올림픽 직후 열린 ‘2010 세계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 발목 부상을 이유로 출전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그때 이정수는 발목을 다치지 않았고, 코치들이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사유서를 강제로 쓰게 했다고 폭로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이정수·곽윤기 두 선수와 전재목 코치를 조사한 결과, 밴쿠버 겨울올림픽 국내 선발전에서 짬짜미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정수와 곽윤기가 전재목 코치의 지시 아래 서로 밀어주기 경기를 해서 이정수가 밴쿠버 올림픽에 출전하고, 곽윤기 선수는 이어서 벌어지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한체육회·문화관광부·대한빙상경기연맹이 함께 구성한 공동조사위원회는 2010년 4월22일 해당 선수에 대한 ‘자격정지 최소 1년 이상’, 쇼트트랙 부문 최고 책임자인 유태욱 부회장을 비롯한 대한빙상경기연맹 집행부의 자진 사퇴 등을 건의했다. 그러나 대한빙상경기연맹 상벌위원회는 선수들에 대한 징계 부분을 ‘자격정지 3년’으로 상향시켰다. 소치 겨울올림픽 대표 선발전에도 나설 수 없어서 사실상 선수 생명을 끊은 것이다.

그런데 두 선수의 징계는 얼마 뒤 ‘6개월 자격정지’로 대폭 완화됐다. 그해 5월 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날아온 전자우편 한 통 때문이었다. IOC는 대한체육회에 짬짜미 내용과 밴쿠버 겨울올림픽의 연관성, 대한체육회의 입장 등을 물어왔다. 대한체육회와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발칵 뒤집혔다. 잘못하면 밴쿠버 올림픽에서 이정수·곽윤기가 올린 성적(금메달 2개, 은메달 2개)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18년 겨울올림픽 유치에도 영향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당시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하기 전이었다).

해결 방법은 이정수·곽윤기 선수가 이의신청을 하고, 두 선수의 징계를 대폭 경감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두 선수는 대한체육회에 이의신청을 냈고, 대한체육회 법제상벌위원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2010년 7월20일 두 선수의 자격정지를 3년에서 6개월로 경감했다. 상벌위는 두 선수가 짬짜미를 했지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국위 선양에 크게 기여했고, 현재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사실상 수개월 동안 선수생활을 하지 못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했다고 밝혔다.

빙상연맹의 미봉책과 성추행 파문

지난 몇 해 동안 쇼트트랙에서는 갖은 불상사가 있었지만 대한체육회와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미봉책으로 일관해왔다. 파벌 싸움과 그로 인한 폐해를 잘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방치해왔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올림픽 금메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 선수 성추행 파문은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 여름 자신이 가르치던 소속팀의 한 여제자를 성추행하려 했던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의 A코치가 지난해 4월 국가대표 코치로 선임된 사실이 최근 밝혀져 논란이 일어났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해당 코치를 태릉선수촌에서 퇴촌시키고 상벌위의 진상 조사를 거쳐 처벌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늑장 대처에 나섰다.

이에 대해 장명희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등 빙상계 원로들은 지난 1월14일 기자회견을 열어 “상벌위원회에 문제의 B교수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상벌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모두 B교수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상벌위를 백번 해봐야 소용없다. 정당하게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을 포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성토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의 고위 임원이기도 한 B교수가 김재열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이 협회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는 사이 연맹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상벌위에도 입김이 닿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B교수는 한국 쇼트트랙 초창기에 알베르빌, 릴레함메르 올림픽 같은 국제대회에서 빛나는 성적을 내는 등 빙상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도자와 선수 선발 등 갖가지 이해관계가 있을 때마다 독선적인 행동과 투명하지 못한 행정 처리 등으로 빙상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한국의 겨울 스포츠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로 정점을 찍을 것 같다. 한국은 1948년 제5회 스위스 장크트모리츠 겨울올림픽에 스피드스케이팅의 최용진 감독과 이효창·문동성·이종국 선수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으로 출전했다. 이후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사상 처음 종합 10위에 올랐다. 또한 2006년 토리노(7위), 2010년 밴쿠버(5위)에 이어 이번 소치 올림픽까지 세 대회 연속 종합 10위 이내의 성적을 노리고 있다. 홈에서 열리는 평창 올림픽에서는 금·은·동 도합 20개의 메달로 사상 최고의 성적인 종합 4위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겨울 스포츠 또 다른 권력자 김진선

한국은 2011년 7월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제123차 총회에서 겨울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당시 평창은 첫 번째 투표에서 독일 뮌헨(25표)과 프랑스 안시(7표)를 압도적으로 따돌리고 절반이 넘는 표(총 95표 중 63표)를 얻었다. 한국은 앞선 두 번의 유치전에서 1차 투표 1위를 하고도 2차 투표에서 역전패를 당했다.

평창이 3수에 성공한 요인은 그동안의 실패 사례를 철저히 분석한 덕이었다. 구체적으로는 IOC 위원들을 유형별로 나눠 접촉했다. 위원별 파일을 적게는 3장에서 많게는 10장까지 만들어 맞춤식 접촉을 시도했다. 그들의 취향과 성향 등을 분석해 구체적으로 작업했다. 현장 프레젠테이션도 김연아, 나승연, 토비 도슨 등 맞춤 연사를 배치해 IOC 위원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이후 과연 누가 올림픽 준비위원장이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평창 겨울올림픽 이후 한국 스포츠계에는 그만큼 큰 이벤트가 없기 때문에 준비위원장에 오른 인물은 향후 한국 스포츠계를 대표할 가능성이 컸다. 1순위 후보로는 정책의 연속성을 고려해 조양호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이 꼽혔다. 2순위에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초대 준비위원장이 모두 대한체육회장이었다는 이유로 박용성 당시 대한체육회장이 거론됐다. 3순위로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위원회 특임대사였던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가 올라 있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조양호 유치위원장이었다. 조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유치위원장이 조직위원장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운을 뗐다. 그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을 뿐이라며 한발 뺐지만, 민감한 시기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안이라 파장이 확산됐다. 조 위원장은 또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포츠 전문가보다는 경영 전문가가 조직위원장에 적합하다”며 “국제 감각을 지닌 기업인이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체육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임명하는 조직위원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산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정부와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인물이 선정돼야 한다”며 스킨십과 소통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과 앞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초대 조직위원장은 모두 김정길, 김운용 당시 대한체육회장이 임명됐다”며 박용성 당시 대한체육회장을 염두에 둔 발언을 했다. 또 다른 대한체육회 관계자도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IOC와 수시로 접촉해야 하는 자리다. 그런 점에서 국가올림픽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대한체육회 회장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유치위의 한 관계자는 “겨울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국가의 종합행정이다. 전반적인 국가 정책 흐름을 파악하고 수준 높은 국제 감각과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인물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기존 3명 외에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한승수 전 총리의 이름이 새로 등장했다. 한 전 총리는 강원도 출신으로 주미대사와 외교통상부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2005년에는 2014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정부 관계자들도 잇따라 한 전 총리에 무게를 두는 발언을 했다.

조직위원장 인선과 관련한 주무부처는 문화체육관광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통령실과 긴밀히 의논하면서 제2차관 산하 체육국을 중심으로 올림픽조직위원회(OOC) 구성을 위한 실무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조직위원장 자리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최종 낙점했다. 김진선씨였다.

김진선씨는 이후 박근혜 대통령 취임 준비위원장을 지내고 평창 겨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연임하면서 김연아와 함께 겨울 스포츠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 조직위원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스포츠계도 최고권력자에 의해 위원장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이다. 승승장구하는 김진선씨를 보면 박근혜 정권이 이명박 정권의 ‘6년차 정권’이 아니냐는 말이 실감난다.

글 기영노 모든 스포츠를 좋아하다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평론가가 되었고, 아마 평생의 직업이 될 것 같다. 많은 방송에서 전파로 날아간 내 목소리가 너무 허무해 글(책)을 쓰기 시작해서 <재미있는 스포츠 이야기>(가나), <올림픽의 어제와 오늘>(주니어 김영사) 등 25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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