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7:40 수정 : 2014.02.04 10:49

소셜 맥거핀이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 문제라 하더라도 경험적 검증을 통해 해소되는 경우도 있다. 권력자의 음모와 조작에 의해 소셜 맥거핀이 유포됐을 때, 적대의 내러티브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 자체를 누가 고의로 유포했는지 폭로함으로써 소셜 맥거핀을 무력화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담론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음모와 조작인지,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생적인지를 구별해낼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때 필요한 것은 하나의 기준점이다. 어느 쪽이 북쪽인지 알면 동쪽, 서쪽, 남쪽은 자연스레 밝혀지기 마련이다. 이런 측면 때문에 ‘일베가 아닌’ 넷우익 담론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담론인가라는 질문이 적실해진다. ‘기층’ 담론, 아직 권력화하지 못한 넷우익 담론이 어떤 것인지를 들여다본다면, 일베에서 유통되는 넷우익 담론이 어떤 방향으로 지나치게 구부러져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도 우리는 하나의 참고 사례를 이미 갖고 있다.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 담론 분석이 그것이다.

한·일의 ‘자생적’ 넷우익

2012년 출간된 <우파의 불만>에 실린 글 ‘뉴라이트에서 네오라이트로? 한국의 반이주노동 담론 분석’에서 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반감을 노골적으로 토로하는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 담론을 살펴보았다. 정부의 ‘다문화’ 정책과 홍보가 상당 기간 지속되면서 국민들 사이에 이런 기조에 대한 불만이 차츰 쌓여왔고,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제법 굵직한 커뮤니티들이 생겨났다. 내가 분석한 ‘다문화 반대카페’는 당시 가장 큰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애국시민’이라 불렀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콘텐츠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유형을 분류해보면 중심 담론으로 경제, 민족, 치안 담론을 꼽을 수 있었다. 주변 담론은 종교, 반자본주의, 반엘리트주의, 보건 담론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제 담론은 ‘외국인 노동자로 인해 국내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임금 상승이 억제’되는 등 지속적으로 경제적 고통을 겪는다는 식이고, 치안 담론은 외국인 노동자가 ‘틈만 나면 한국 여자들을 강간’하고 ‘사회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숫자의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식이다.

이들의 담론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강화하고 확대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인종주의적이라는 면에서 일베와 유사하다. 하지만 일베가 이른바 ‘민주화세력’만을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 반이주노동 담론은 민주화세력뿐 아니라 새누리당 등 ‘산업화세력’도 ‘모두 한통속’이라고 강하게 비난한다. 진보, 보수 또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다문화 정책으로 내국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국가의 미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반이주노동 담론은 전통적인, 그리고 기득권을 여전히 쥐고 있는 한국 우파들의 사고방식과 상당히 이질적이다. 이들은 일베와 달리 ‘종북몰이’ 같은 냉전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반면 경제적 이해관계에는 매우 민감한 모습을 보인다.

자생적 넷우익의 또 하나 참고 사례로 일본의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이 있다.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본명 다카다 마코토)는 원래 ‘2ch’라는 일본 최대 인터넷 게시판에서 활동해온 유명 논객이었다. 그는 역사 교과서에 적힌 종군위안부의 비참한 처지가 모두 엉터리이고,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이 허구라고 주장하며 극우 성향 네티즌의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재일코리안(한국계와 총련계를 통칭)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면서 “반도로 돌아가라”라고 윽박지른다. 또 오늘날 일본 청년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국가가 저소득층에게 제대로 지원금을 주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재일코리안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복지에 무임승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그의 선동이 인터넷과 극우 성향 케이블방송 <채널사쿠라>를 통해 알려지자 지지자들이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재특회는 단지 인터넷에 글을 쓰는 활동에 만족하지 않았다. 머리띠를 두르고 확성기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바퀴벌레 조선인, 반도로 돌아가라!” “짱개들을 도쿄만에 처넣어라!” “극좌세력을 바다에 빠뜨려라!” “한국인이 보이면 돌을 던져라!” 험악한 말투와 적나라한 욕설을 사용하는 이들은 자신의 주장에 반박하는 시민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물리적인 위협을 가한다. 활동가 조직을 탄탄히 갖춘, 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신우익 집단의 등장에 일본 사회는 경악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걸까. 재특회를 추적한 르포르타주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재특회란 무엇인가?’라고 내게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의 이웃들입니다.” 사람 좋은 아저씨나 착해 보이는 아줌마, 예의 바른 젊은이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작은 증오가 재특회를 만들고 키운다. 거리에서 소리치는 녀석들은 그 위에 고인 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저변에는 복잡하게 뒤엉킨 증오의 지하수맥이 펼쳐져 있다.

-야스다 고이치, <거리로 나온 넷우익>, 후마니타스, 365쪽

넷우익이라는 ‘보편 증상’

타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감을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편견과 혐오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혐오를 그저 간직하고만 있지 않으며 종종 말이나 몸짓, 눈짓으로 표현한다. 그 순간 혐오의 표현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해석되며 심할 경우 윤리적 비난을 받거나 극단적인 경우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문명사회에서 타자 혐오의 감수성은 그렇게 법·제도·교육·문화 등 사회적 압력에 의해 순치되고 억눌러진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조건들과 만날 경우 이 감수성이 대중 차원에서 ‘활성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타자 혐오 경향이 사회적 압력을 밀어낼 정도로 강해지거나, 사회적 압력이 타자 혐오 경향을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거나, 혹은 둘 다인 경우다. 그 사회적 조건, 그리고 이런 심리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사회적 조건부터 살펴보자. 먼저 ‘하강기 또는 불황기 자본주의’라는 환경을 꼽을 수 있다. 일본의 사회학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세 나라 청년세대의 적대의식을 분석하는 책에서 일본 청년세대의 ‘원한 감정’이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자신이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점차 커지는 이러한 원한의 감정은 인터넷 등을 통해 분출되고 있다. 이들의 불만이 ‘나도 정사원이 되게 해달라’는 방향으로밖에 향하지 않는다는 점- 예를 들면 이들은 창업이나 프리랜서 같은 전문직을 단순한 사회적 하강 이동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이 오히려 마음의 폐쇄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회사 조직에 소속되지 않는 대안적인 삶의 가능성이라는 ‘자유’의 여지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그냥 잘라 내버려진다는 식의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 다카하라 모토아키,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삼인, 27쪽

다카하라의 책은 2006년 집필됐다(한국에서는 2007년 출간). 그가 묘사하는 일본은 놀랍도록 한국과 유사하다. 양국은 전쟁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 중간계급의 유례없는 팽창, 거품 붕괴(또는 외환위기)와 급속한 신자유주의화라는 비슷한 여정을 겪었다. 다카하라는 이런 사회의 구조적 변화 이후의 내셔널리즘을 ‘개별불안형 내셔널리즘’이라 명명한다.

한·중·일 세 나라가 각각 상이한 국내 사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오늘날 사회유동화라는 불가피한 세계적 조류는 세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각국의 내셔널리즘이,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적 통일감을 양성하기 위해 요청되는 내셔널리즘(이른바 ‘고도성장형’ 내셔널리즘)과, 사회유동화 속에 내던져진 계층의 내셔널리즘(이른바 ‘개별불안형’ 내셔널리즘)으로 점차 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략) 서구의 내셔널리즘에서 이민노동자 및 고용 관련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개인화 이후의 내셔널리즘’ 때문이다. 견고한 조직이나 안정성으로부터 내몰려 ‘불안’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그 불안의 중대한 요인인 이민자들, 즉 밖에서부터 자신들의 일자리를 잠식해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반발감을 높여왔던 것이다.

-위의 책 61~62쪽

물론 같은 ‘하강기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평등 지향적 사회라서 상대적 박탈감을 최대한 완화시킬 수 있다면, 청년세대의 원한 감정이라든지 개별불안형 내셔널리즘 등이 극단적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과 일본은 개인의 강렬한 성취동기를 바탕으로 고도성장을 해온 국가이고, 복지 체계도 기업복지 중심인 사회라 서구에 비해 훨씬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편이었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와 중산층 해체를 겪었기에 다카하라가 말한 ‘사회유동화’ 속도도 더 빨랐다. 그 결과 불황에 진입하는 시기에 차이가 있었음에도 양국 청년세대의 모습은 동시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해졌다.

상상된 착취, 억압된 적대

정당정치와 분배구조가 현실의 모순을 반영하지 못할수록, 정치는 사회·경제적 불만을 생산력과 제도로 해결하기보다 어떻게 대중에게 즉각적인 쾌락을 주느냐로 경쟁하는 게임이 되기 쉽다. 모두에게 ‘빵’을 주진 못하지만 ‘2등 국민’을 차별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행위를 방치함으로써 불만을 위무하는 일종의 극장형 사회가 되는 것이다.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 재특회, 일베의 타자 혐오는 각기 다른 내용물을 품고 있지만 그 심리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특징적인 심리 상태를 ‘상상된 착취’(Imagined Exploitation)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이들은 공히 자신을 부당한 착취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받을 몫을 내부의 타자에게 빼앗겼다는 박탈감은 쉽게 증오로 전환된다. 그래서 나보다 ‘자격’(Membership)과 ‘능력’(Merit)이 없는데 몫을 더 받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찾아내고 공격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상상된’ 착취인 이유는 뭘까. 실제 그들을 착취하고 배제하는 주체는 내부의 타자들, 이를테면 이주노동자나 여성들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격적인 피해자들’은 자본과 국가에 저항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격 있음/없음’과 ‘유능/무능’을 인준해주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자본과 국가이므로.

일베가 독특한 이유는, 그들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상상된 착취일 뿐 아니라 적대를 묘사하는 언어조차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냉전주의적인 기성세대로부터 빌려와야 한다는 점이다(‘종북’ ‘빨갱이’). 이것은 말하자면 ‘억압된 적대’고 ‘이중의 소외’다. 반이주노동 커뮤니티 담론은 ‘민주화’ 대 ‘산업화’라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허구적 적대를 내파하면서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적대가 얼마나 외설적인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반면 일베는 현실권력의 전위를 자임하면서, 담론의 생산지가 되기보다 우파의 이념적 공백과 좌파의 무기력을 표상하는 황량한 ‘뉴타운’으로 남았다. 일베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한국에서 열린 출간기념 대담에서 “한국의 일베도 재특회처럼 거리로 나올 것이라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바 있다.

“한국 사회의 대응에 달려 있다. 재특회가 처음 나왔을 때 일본의 매체와 지식인들은 마치 그들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주변화시키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틀렸다. 그들은 더욱 날뛰었다. 정면에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형사처벌은 권력을 호출해야 한다는 점에서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결국 시민의 힘으로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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