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5:03 수정 : 2014.02.04 10:46

윤여준은 보수의 책사와 제갈량이라고 불렸지만, 그는 좌와 우의 공존을 먼저 생각한다. 2002년 4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오른쪽)가 최규선 자금 수수설에 반발해 농성 중인 윤여준을 찾아 격려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전두환에서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정권 교체 시기에 숨어 있는 뒷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이른바 ‘야사’에 숨어 있는 체취는 활자로 옮겨질 수 없었던 진실을 증언해주기도 한다. 그것이 기억이라는 심리적 굴절의 재구성을 거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직접 눈으로 보고 체감한 사실은 그 무게를 상실하지 않는다.

윤 전 장관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자, “그건 자칭이 아니라 타칭”이라고 밝힌다. 동네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다. 이야기하는 방식도 조곤조곤하다. 여러 사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약한 재사’라는 손쉬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보수주의가 합리적인 것인데 굳이 ‘합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이유가 있느냐고 물으니, “한국의 보수들이 합리적이지 않았잖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말하자면, 그는 보수주의자이고, 그래서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에서 보수주의는 합리적 태도를 보여주지 못해서 ‘합리적 태도’를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로서 그의 곤혹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보수주의라면 무엇인가 지킬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물론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회의할 수 있는 태도를 영국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데이비드 캐머런 같은 보수주의 정치인도 없지 않다. 지키기보다 ‘혁신’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핵심인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도 오래된 일이다.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

정확히 말해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이래로 이런 경향은 노골화됐다. 보수주의자들이 너도나도 한때 진보주의자들을 치장했던 장식을 가져다 달기 시작한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혁신이니 창조, 또는 혁명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에 올리고, ‘좌파 이론’을 경영학에 도입하는 파격이 벌어졌다. 처음부터 파괴에서 시작한 한국의 보수주의자에게 썩 어울리는 상황 변화이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힌 것’이 보수주의자의 미덕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라면 옛것을 보존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할 텐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윤여준은 보수주의적 가치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양극단을 모두 지양하고 ‘소통 가능한 합리성’에 동의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화를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인 듯했다. 지금 한국의 보수가 보수주의의 가치와 배치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윤여준은 ‘성찰 부족’을 꼽았다. 산업화의 긍정성만 강조하면서 그것이 초래한 어두운 측면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거다.

하루이틀 지적된 문제는 아니다. 보수만은 아닐 것이다. ‘성찰적 진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진보도 마찬가지로 성찰이 결여돼 있다는 인식이 있다. 결과적으로 성찰은 진보든 보수든 모두 고려해야 하는 미덕인 것이다. 그의 정체성이 무엇이든, 윤여준은 기존 보수와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모습에서 끼리끼리 담합해서 옳지 않은 것도 옳다고 우기는 이른바 ‘진영주의’의 병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연한 주관은 사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물론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판단 오류를 줄여줄 수 있다. 일찍이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인간 유형을 고슴도치와 여우에 비견해서 구분한 적이 있었다. ‘고슴도치형 인간’은 하나의 가치를 신봉하면서 그것을 밀고 나가는 뚝심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결단력이 강하다. 그러나 실패할 확률이 높고, 방향이 잘못됐을 때 되돌리기 어렵다. 이에 비해 ‘여우형 인간’은 이것저것 재는 까닭에 결단력은 떨어지지만 판단의 오류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수정하기도 쉽다.

이 기준에 맞춰보면, 윤여준은 분명 고슴도치형이라기보다 여우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확실히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재사’라는 고깔을 씌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재사라기보다 컨설턴트에 가까웠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술술 대답이 흘러나왔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지지를 선언한 까닭도 ‘리더십’에 대한 그의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리더십은 이미 다원화되고 민주화된 한국 사회를 이끌어나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강경한 보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뜩잖은 주장일 테다.

그렇다면 문재인 후보는 왜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물었다. “만나보니 피상적 이미지와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특히 문 후보가 자신을 ‘보수’라고 밝힌 것이 마음에 들었단다. 진보와 보수라는 대립 구도를 벗어나 허심탄회하게 ‘상식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문재인을 돕겠다고 나선 것만 보더라도 윤여준에게 보수의 문제는 가치에 속하는 거지 어떤 진영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보수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남이가’를 넘어서 ‘남’을 돕겠다고 나섰으니 배신자 소리를 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윤여준 당신도 충분히 이런 문제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전혀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신념 같은 걸 읽을 수 있었다. 인간 문재인에 대한 판단 기준도 확고했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인 것 같아서 지지하기로 했다는 것인데, 흥미로운 말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이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실현하는 태도에서 윤여준은 가치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념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속내였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우려도 리더십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 대표 시절 곁에서 지켜본 경험을 통해 그는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단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그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안철수의 멘토 역할을 한 것도 평소 가진 지론 때문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윤여준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5공화국부터 지금까지 이른바 권력층과 얼굴을 맞대고 지냈는데,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의 수구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산업화 세대의 이권 지키기라고 말하는 그의 입장이라면 객관적인 평가가 나올 것처럼 보였다.

“전두환, 시대 소명를 모르는 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윤여준의 판단이 그렇다는 것이고, 내 입장에서 보기에 권력층이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발언이었다. 전두환이라는 권력의 정점과 그 측근들 사이에 일정한 긴장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박정희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체한 뒤 남은 것들을 통해 가능했다. 박정희가 우리를 먹고살게 해줬다는 신화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윤여준도 이런 사실에 대해 인터뷰나 저술을 통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아직 한국에서 대통령은 ‘상감’이에요.” 그 한마디는 직관적이긴 했지만 정곡을 찌른다. 자기들을 먹고살게 해준 대통령의 혈육이 출마를 했으니 당연히 산업화 세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올인했을 거라는 말이다. 분명히 이런 말은 흥미를 자아낸다. 현실은 비극이지만, 이런 믿음의 작동 방식이 하나의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기조차 하다. 남한의 보수는 북한을 비난하지만, 자신들의 체제가 오직 혈육이라는 판단 기준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윤여준은 이같은 난센스를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 같았다.

물론 보수가 잘못해서 이런 정권이 탄생한 건 아닐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다는 이들도 대중의 열망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당의 선거 전략을 비판하는 윤여준의 모습은 분명 현실정치의 입장에서 낯선 것이다. 그는 현실정치에 무자비한 전략가라기보다 선비에 가까웠다. 선비 중에서도 실사구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집안 내력을 봐도 그렇다. 전통을 숭상하는 집안이었지만, 그의 부친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고 한다. 일꾼을 불러 일을 시킬 때면 아들도 함께 하도록 했다. 일꾼과 나란히 일을 해봐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성장 배경이 그 사람을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실마리를 얻을 수는 있다. 평등한 지위에 대한 강조는 근대적인 감수성을 어릴 적부터 그가 체득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막힘없는 그의 태도는 이런 감수성 덕분일 것이다. 개인의 탁월성을 근거로 세계의 이치를 판단한다는 점에서 윤여준은 분명 자유주의자이면서, 또한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은 감수성으로 인해 근대적인 개방성을 가질 수 있었던 모양이다. 윤여준의 지향점이 안철수라는 또 다른 상징적 개인으로 모아지던 때도 있었다.

“청춘콘서트를 갔는데 열기가 대단해서 놀랐어요.” 참석한 젊은 학생들을 붙들고 물어봤단다. 왜 안철수에 열광하는지. 본인들도 잘 모르더라는 전언. 사실 알 수 없다는 게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윤여준의 입장에서 그 열광은 “실체보다 더 큰 반응”이었다. 속되게 말해서 거품이 좀 끼어 있었다는 뜻.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열광의 속내가 아닐까. 그 열광을 만들어내는 내적 논리는 분명히 있다. 윤여준이 찾아낸 이유는 “공적 헌신성의 부재”였다. 공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이들이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이렇게 말할 때 보면 그는 분명 보수이다. 그에게 보수라는 의미는 ‘헌신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책임감과 도덕성인 것이다. 책임감과 도덕성을 갖춘 보수가 없다는 것이 이를테면 그의 개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안철수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광을 “사인이 공적 헌신성을 보인 사례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했다. 안철수가 최고경영자(CEO)였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환호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안철수가 그 반응에 충분하지 못한 대상이더라도, 공적 헌신성에 대한 요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안철수 현상은 계속되지 않을까. 윤여준의 진단을 보더라도 그럴 것 같다. 사인이 공적 헌신성을 보일 때 대중은 열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앞으로 안철수처럼 열광을 불러일으킬 ‘인물’이 또 있을지다. 안철수의 측근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윤여준은 남들 생각처럼 안철수에게 밀착돼 있었던 게 아니라고 말한다. 헤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청춘콘서트 때문에 만났는데,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달라지니 만나지 않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안철수에 정치 하지 마라고 제안”

윤여준이 안철수에게 바랐던 것은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게 아니라, 양당 구도로 고착된 정치 현실을 타개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뜻대로 되기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이후 어떤 경로로 안철수 현상이 진행됐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하튼, 안철수 현상은 신당 창당이라는 수순을 밟고 있다. 언론 상황이 만들어낸 사실관계와 다른 것이 많이 나왔다. 주관적 진술일 수도 있겠지만, 안철수 의원과 정치적 결별 같은 걸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여타 보수와 다르게 윤여준은 양당 구도에 근거한 의회정치 이외에 다른 정치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의회정치를 보완하는 또는 개혁할 수 있는 외부의 정치를 그는 ‘시민정치’라고 간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성을 갖춘 소통 가능한 시민의 존재 여부였다. 정치라는 건 이런 사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척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을 가진 것 같았다. 당연히 입장이 이러니 태도도 일반적인 보수의 것과 달랐다. 그의 태도는 종종 ‘처세술’로 호사가의 입을 오르내린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딱히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의회정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명운을 ‘선거’에 걸고 있는 이들이 볼 때 어딘가 우유부단하거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보통 이런 식이면 입장이 모호하다는 소리를 듣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 모호한 입장이라는 게 사실은 전체적인 지형도를 그려내고, 단기 처방이 아닌 장기 처방을 내리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이같은 거시적 시각에서 본다면, 특정한 사안에 대한 평가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이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추이를 논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여준이라는 인물 됨됨이는 사물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염두에 둬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파격적인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 문제에서도 제도적 제재를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할 때, 그를 다시 보게 된다. 결혼을 금지하는 것 자체가 제도적 제재라는 것이다. 거침없었다. 본인과 맞지 않는 것이라도 개인이 하겠다는 한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그의 달변은 그치지 않았다. 손아람이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별명이 ‘보수의 제갈량’인데,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짜 제갈량의 운명처럼 비운의 패배만을 했던 것이 아닌지 물었다. 껄끄러운 질문일 텐데 선선히 인정했다. “보통은 ‘불운의 참모’라고 한다”고 정정까지 해준다. 윤여준의 위력이 발휘된 것은 2002년 총선 때 한나라당이 단행했던 개혁공천인 것 같다. 이 때문에 그는 사방에 적을 만들어놓은 셈이었다. “사실상 내가 한 것은 브리핑”이라는 말로 자신의 역할을 줄여서 이야기했지만, 가히 ‘이회창의 입’이라고 할 만했다. 총재 정무특보로 있으면서 그는 한나라당의 주요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그날 있을 모든 스케줄에서 발언을 체크하고 중요한 사안을 브리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 ‘윤여준만 만나면 된다’는 말이 돌았다고.

다른 것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소년 같았다. 자주색 터틀넥 스웨터에 갈색 재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책사’나 ‘참모’라는 이름보다 학자의 풍모에 더 가까웠다. 영락없는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게 전달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저기 걸쳐놓은 것이 많아서 하는 일 없이 바쁘다”는 너스레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그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요즘, 2012년에 그가 내린 여러 진단들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일찌감치 ‘불통 정권’을 예견했다. 2012년 10월17일 열린 한 북콘서트에서 윤여준은 당시 박근혜 후보의 소통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박근혜 후보가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을 때, 한 최고위원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는 “당 운영과 관련해서 박 대표에게 의견을 물어보려 해도 통화도 어렵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정당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소통이 되지 않으니, “박 대표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당 안에 10명이 넘는데, 그 10명이 제각각 다른 소리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진짜 박근혜 대표의 의사를 대변하는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이런 진단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래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서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윤여준의 선견지명은 맞아떨어진 것이다. 아마 항상 소통을 중심에 두는 ‘합리적 보수주의자’ 또는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를 지향하기 때문에 내부의 문제를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근혜 리더십, 민주 사회 이끌기 부족”

윤여준의 발언에서 흥미로운 것은, 인간적인 면모와 권력을 운영하는 방식을 적절하게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 방식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 정치의 속내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테다. 그의 ‘인물 비평’은 여러 가지로 관심을 끌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증언도 촌철살인이었다. “북방 정책이 무척 잘된 것이지만, 지금 누가 기억해주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해놔야 후대가 기억한다”는 것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론이었단다. 윤여준은 이런 생각을 말리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소비자’를 위한 협동조합을 구상한 것일까. 처음 이 명칭을 들었을 때는 의아했는데, 설명은 간단했다. 정치에 시장 개념을 도입하자는 취지였다. 소비자가 상품을 평가하듯이, 정치인을 판단하자는 것. 국민은 주권자이지만 피지배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평소 소비자에 더 가깝게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념이 아닌 이익의 문제로 정치를 바라보자는 뜻처럼 들리기도 했다. 선거가 끝나도 변한 게 없다면 허무주의만 낳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항상 그랬다. 선거 때는 주권자인 것처럼 호명되지만 끝나면 그냥 피지배자로 남는다. 윤여준은 이 상태, 일상에서 무기력한 존재인 소비자를 호출해서 협동조합을 만들고자 했다.

“심판을 제대로 하면 개선될 것”이라는 낙관이 여기에 드리워져 있었다. 나름대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운동인 것이다. 정치에 대한 입장 정리도 남달랐지만, 좌파에 대한 관점도 예사롭지 않았다. ‘좌파는 나쁘다’는 편견부터 갖지 말 것을 그는 주문했다. 좌파와 우파는 서로 공존 관계이지, 한쪽을 없애버릴 수 없다는 거였다. 다소 구태의연하지만, 여하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좌파와 우파 중 누가 더 나쁜지 이야기하지 말고, 둘이 어떻게 공존할지 그것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게 윤여준의 당부였다.

그에게 좌와 우의 문제는 가치 차원에서 제기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니까 권력다툼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좀더 수정할 필요가 있다. 권력다툼이긴 하지만, 사실은 이해관계를 전제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의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의미이다. 가치는 이해관계 앞에서 무너진다. 이해관계 자체가 모든 가치를 규정해버린다.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로 포장돼 있지만, 사실은 이해관계라는 유물론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여하튼, 윤여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게 가치의 문제는 합리성과 도덕성에 제약을 받는 것이었다. 소급해서 생각하면, 좌와 우가 가치의 문제로 전환되지 못하는 까닭은 당사자들에게 합리성과 도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 내 생각은 다르지만,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사안이다. 윤여준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해달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서 합리성을 옹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도덕성은 이런 합리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게 만드는 미덕이다. 미덕은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소비자들 협동조합으로 모여라

이런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가서 그가 주창한 정치소비자가 있다. 정치소비자가 제대로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소양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 이 생각에 다다르면, 그가 왜 팟캐스트를 하는지 알 수 있다. ‘젊은 논객’으로 불리는 한윤형과 그는 부지런히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 “나꼼수를 보수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한테 그 사람들 데려다가 표창해줘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는 윤여준. 나꼼수야말로 사회의 분노를 해소해주는 좋은 배수구였다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분노가 어디로 갔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정치적 분노를 문화적으로 해소해주는 나꼼수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는 ‘역설의 논리’였다. 그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팟캐스트를 하는지 이런 진술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팟캐스트는 사회를 보전하기 위한 그 나름의 실천이었다. 시종일관 소탈한 모습이지만, 그의 생각은 진지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균형과 조화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는 지금도 노심초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 부친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영혼을 가졌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는단다. “오래 살고 좋죠, 뭐.” 그에게 삶은 무엇일까. 그런 식으로 자신에 대해 매도하는 발언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법도 할 것이다. “개의치 않아요. 내가 파렴치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보수주의자다웠다. 보수주의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자기 내면의 진실일 테니 말이다.

글 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문화학 박사.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다양한 문화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코드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저서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