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3:46 수정 : 2014.01.07 10:47

2013년 하반기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는 사상 최대인 10만여 명의 취업준비생들이 몰렸다. 대학생들은 “삼성이 신입사원을 많이 뽑아 SSAT를 보기는 하지만 SSAT에 목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사진은 상반기 시험장 모습.한겨레 류우종
“혹시 삼성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지금 수업 중이라….”

<나·들> 9월호 ‘타자화된 일베, 우리 안의 그들’을 취재하며 알게 된 학생 취재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말이 끊긴다. 감이 좋지 않다.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본 사람 중 삼성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취업준비생을 쉽게 찾을 거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한겨레21> ‘취업 OTL’을 취재하고 있던 동료 기자에게 먼저 부탁을 해봤지만 ‘삼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발목이 잡혔다.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개를 해준 것만도 고마웠다. 일단 ‘접수’하고 학생 취재원에게 문의를 한 터였다.

“있어요.”

몇 번의 문자가 전파를 탄 끝에 회신을 받았다. ‘휴~.’

4500원짜리 닭곰탕과 3천원짜리 아메리카노 커피를 대접했지만 미안하다. 학자금에 치이고 취업에 치인 이른바 ‘88만원 세대’라는 것을 아는지라 속이라도 든든하게 채워주고 싶었는데…. “대학가라서 싸죠”라는 한마디가 위안으로 다가온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바로 신경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역시 감대로 참패였다. 되레 내가 털린 기분이었다. 그에게 삼성은 갈구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삼성에 대한 부조리는 언론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지만 현실에 ‘분노’하고 있지는 않았다. “제가 딱 맞는 취재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허탈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학생도 인지가 현실을 넘지는 못했다. ‘그동안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의 의견만 경청하고 있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할 찰나에 촉수가 반응했다.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삼성의 부조리에 대해 알고 있다.”

“삼성에 입사원서를 넣었다.”

이를 조합하면 삼성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취업 빈곤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자기합리적인 행동으로 삼성에 지원했다는 것이 된다.

취업 빈곤과 거짓 믿음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태도와 행동 간에 일관되지 않거나 모순이 있을 때 일치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모르는 태도보다 이미 알고 있는 행동에 맞게 태도를 바꾸게 된다. 또한 인간관계 심리학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클 때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하나는 현실도피이고 나머지는 자기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에서 그들의 취업 행동은 자기합리화와 만난다. 그리고 거짓 믿음(부정의의 교의)1을 갖게 됐으리라. 이른바 이런 것들이었다.

“삼성은 부조리보다 한국 사회에 공헌한 것이 더 많다.”(서울 소재 대학 취업준비생 A씨)

“부정한 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서울 소재 대학 취업준비생 B씨)

“기업에서 초래되는 부작용은 나와는 상관없다.”(지방 소재 대학 취업준비생 C씨)

이는 마치 삼성이 몇 해 전 SSAT에서 문제로 출제해 구설에 올랐던 명제들과 비슷한 것들이다. 삼성은 아래 명제에 대해 ‘Yes or No’를 요구했다.

‘오너 경영의 결과가 좋다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한 사람의 오너가 경영하는 게 긍정적일 수 있다.’

‘삼성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다.’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의 말을 빌리면, 1960∼70년대 대학생들이 박정희 독재에 항거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하는 실존적 선택 앞에 고민했다면, 지금의 대학생들은 삼성에 입사 지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저항을 택했지만 지금은 순응을 택했다는 것이다. 홍세화 발행인이 <88만원 세대> 추천사에서 “20대의 ‘생각 없음’을 질타해온 나에게 세대 문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줬다”고 밝혔듯이, 대학생들이 순응을 택한 이유는 실존이기에 앞서 생존(취업)의 문제일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이 성장지상주의에 기반해 삼성의 긍정적 측면을 바라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에서 발표하는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는 10년째 삼성전자다. 그 이유들은 취업준비생들이 말하는 “혁신의 아이콘(기업이미지가 좋아서)”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초일류 기업(회사가 좋아서)” 등 얼핏 ‘찬양가’와 의미를 같이한다.

하지만 취업준비생들은 삼성이 어떻게 해서 초일류 기업이 되고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는 인식의 뒤편으로 밀어낸다. 삼성이 일본 식민지배하에 순응하며 사업을 시작했고, 미국의 원조경제하에 삼백산업(사탕수수·밀·면화)으로 기반을 닦았으며, 박정희 독재정권의 후원을 받아 발전한 이야기 말이다. 또한 지금까지 받은 세금 감면이며 하청업체와의 불공정 계약, 노조 탄압, 삼성전자 반도체 직원 백혈병 문제 등에 대해서도 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일로 치부한다. 그리고 그룹을 지배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배임과 조세포탈로 유죄를 선고받았다는 사실에도 눈감는다. 이러한 인식은 취업준비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언론들은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냈다고 발표하면 이를 앞다퉈 보도한다. 정작 삼성전자의 사상 최대 실적이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실체 없는 ‘낙수효과’만 읊어댈 뿐이다. 이명박(MB) 정부가 펼친 친재벌 정책, 즉 고환율, 법인세 감면 혜택 등으로 대기업들은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은 고용도 투자도 거의 늘리지 않고 단물만 쏙 빼먹었다. 오죽하면 MB가 “대기업은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있는데도 투자를 꺼려 서민들이 어렵다”고 쓴소리를 했을까. 삼성의 이익만큼 손해를 본 것은 다름 아닌 한국 국민일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2 삼성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진보 인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 김용철 변호사는 “진보 그룹의 저명한 인사들마저 자식은 삼성에 입사시키기를 바라는 오늘이 지속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완벽히 제거된 끔찍한 탐욕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는 삼성 앞에서 존재의 이유를 부정하는 것일까? 하지만 취업준비생들에게 실존적 질문은 한가한 사색에 불과할지 모른다.

“입사원서를 30여 개 쓰고 시험 준비하기에도 버거워요. 먹고살기 위해 알바도 뛰어야 합니다.”

삼성 부정과 이건희의 분리

경제 발전에서 거둔 결실이 대부분 소수에게 돌아가고 삼성이 모든 분야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불평등한 현실에서, 소신을 가지고 직장을 구하라고 하는 것은 취업준비생들의 처지에서 보면 사치스러운 주문이다. 학자금 대출 등 청년 부채가 9조원3에 육박해 이러저러한 빚에 허덕이는 그들은 “뽑아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당장 가야죠”라고 말한다. 퇴로가 없는 취업준비생들에겐 부의 집중뿐만 아니라 선택의 권한도 철저하게 구인 기업에 맞춰져 있는 불평등한 현실인 것이다. ‘전에 인터뷰한 학생이 30여 개 서류 전형 중 3곳에 합격했다’는 말을 전하자 “그렇게 많이요”라며 되레 놀라던 학생의 눈빛에서 부러움을 눈치챈 것처럼.

그는 “제가 원래 하고 싶은 일은 방송이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나보다 실력 있는 애들이 가겠죠”라고 경쟁사회에 순응하면서 불평등의 고착화를 은연중에 인정했다. 이러한 생각은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반대와 저항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실패에의 투항과 체념의 고통을 견디기 쉽게 해줌으로써 불평등을 감수”하게 만드는 방법이다.4 그리하여 취업준비생들은 불평등한 사회에 반대하고 저항할 동력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말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직원 백혈병이나 노조 탄압 문제 등은 나에게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비자금 문제 역시 내 돈이 들어간 것도 아니니까 피부에 와닿지 않고요.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가 부도덕한 이미지를 덮어버린 케이스죠.”(A씨)

“회사 입장에서 보면 충성도가 높은 사람을 원하는 게 당연하죠. 그렇기 때문에 ‘갑’의 결정이나 행동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거겠죠. 삼성 권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또한 삼성이 세계시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데도 이견이 없을 겁니다.”(C씨)

기업집단이 시장에서 이룩한 성공은 그들의 잘못보다 휠씬 큰 사회적 공헌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소 불공정하더라도 용인해줘야 한다는 논리5다.

좋은 삼성과 나쁜 삼성

이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확대재생산된다. 이 과정에서 삼성의 부정과 이건희 회장은 구분되고, 이건희 회장의 부정과 혁신의 이미지는 분리돼 전자들은 사라진다. 총과 칼이 아닌 돈으로 최강 권력에 오르고 ‘삼성 떡값 검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정·관계 인사들을 관리한다는 의혹을 사는 사람에게 어찌 보면 ‘자발적 복종’6에 가깝다. ‘대통령은 5년 계약직이지만 기업 총수는 종신직’인 것처럼, 프랑스의 한 기업인이 “봉건시대 주군관계”7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결과는 매해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기업인 1위, 이건희’로 나타난다.

“그렇게 욕먹고 털리면서도 버틴다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기업가로서 탁월하다는 걸 방증하는 것 아닐까요. 이만큼 삼성을 키워내는 능력과 이만큼 부조리가 많으면서도 그걸 막아내는 능력만큼은 높게 사줄 만하죠.”(A씨)

“한국에서 새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고 삼성을 성장시킨 사람으로 기억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부조리는 사람들에게 잊혀질 거고요.”(B씨)

올해 하반기 SSAT 시험에는 역대 최고인 10만여 명이 응시했다. 취업준비생들은 다른 기업보다 선발 인원이 많고, “스펙보다 SSAT가 당락을 가르고 상대적으로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며, “다른 기업의 인·적성 검사 유형이 SSAT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사람이 몰린다고 말한다. 삼성의 인기는 취업시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집안 가전의 절반은 삼성 제품이에요. 제 스마트폰도 갤럭시고요. 불매운동을 한다면 어떻게 살아요”라는 말처럼 삼성 브랜드는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박재성 연구원의 “한국에서는 재벌이 소유한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재벌이 세운 학교에 가고 (중략) 심지어 여가를 즐기거나 쇼핑하는 것도 재벌이 서비스를 공급한다”는 말처럼, 삼성이 삶의 일정 부분을 규정하고 그 그물망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다. 그래서인지 취업준비생들은 삼성을 비판하는 것엔 동의하지만 삼성이 “훅 가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분위기는 화형시켜야 한다는 분위기인데, 내가 바라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에요”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단지 ‘좋은 삼성’과 ‘나쁜 삼성’을 구분해서 판단할 뿐이다.

‘삼성은 표준’ 밑바닥서 균열

김용철 변호사는 책 <굿바이 삼성>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를 예로 들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파우스트와 같은 거래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이제까지 취업준비생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그의 말은 순진한 당부일까?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부모 세대가 갖고 있는 삼성에 맹신하는 모습은 서서히 퇴색하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에게 더 이상 ‘삼성은 표준’8이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입사원서를 제출하는 곳이며 이직을 위한 도구로 여길 뿐이다.

“요즘 취업준비생들 중에 SSAT에 목숨 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연봉도 큰 메리트가 없고요. 솔직히 삼성전자만 잘나가지 그 외 계열사는 찬밥 신세잖아요. 30여 개 입사지원서를 넣는 기업 중 하나죠. 오지선다 중 하나로 고른다면 네 번째 정도.”(A씨)

“삼성에 입사했을 때 제 아이디어가 표현될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지원하지만, 입사 뒤 그 목표 달성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퇴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성이라는 이름이나 그룹에 대한 충성도 때문에 입사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요.”(C씨)

그들은 삼성전자가 언제까지 ‘세계 1위’를 고수할 것인지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건희 회장이 2010년 언급한 ‘삼성 위기론’의 연장선상이다. 이건희 회장은 ‘경영 혁신’을 강조하면서 이를 내부 결속용이나 경제민주화·재벌개혁 바람을 저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감이 크지만 취업준비생들의 생각은 다르다. 소니의 사례에서 보듯 독점하는 기업은 언젠가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마련이라는 빤한 이론뿐만 아니라 삼성의 지배구조에서도 원인을 찾았다.

“삼성이 쉽게 망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건 총수죠. 이건희 회장 때까지는 부정에 대한 수비를 잘했지만 후계자 이재용이 잘 방어할 수 있을까요?”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1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니얼 돌링의 ‘부정의의 교리’ 개념을 예로 들어 불평등에 동의하는 기현상을 설명했다.

2 미쓰하시 다카아키 지음, 오시연 번역, <부자 삼성 가난한 한국> 중.

3 금융감독원의 ‘20~28세 청년 대출 현황’ 자료(2012년 5월)를 보면 청년들이 지고 있는 총대출금은 8조8천억원이다.

4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87쪽.

5 김상봉 등, <굿바이 삼성>, 213쪽.

6 16세기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철학자인 에티엔 드 라보에티는 1인 폭군 통치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해답을 만인의 자발적 복종에서 찾았다.

7 마르틴 뷜라르, ‘삼성 공포의 제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

8 2002년 말 이건희 회장이 삼성 사장단 회의에서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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