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3:40 수정 : 2013.12.03 13:44

1
계열사 70여 개, 임직원 30만여 명을 거느린 초일류 기업 삼성. 삼성은 구직자에게 최고의 직장으로 꼽힌다. 이는 지난해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의 17%를 차지할 정도의 생산력과 기업 이미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굴지의 다국적기업으로서의 경쟁력에서 나온다.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살린다’는 말은 적어도 이 사실 앞에서는 허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과 고용 창출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만큼 삼성의 위상은 한국에서 독보적이다.

하지만 이런 찬사와 달리 삼성 뒤에는 질타도 따라붙는다. 75년째 고집하는 무노조 경영 방침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일류 기업의 위상에 맞지 않게 삼성은 ‘노조 불인정’이라는 탈법적 경영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삼성의 무소불위 권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삼성 앞에선 정치권력과 언론이 무기력해진다. 오랫동안 국내에서는 삼성과 대적할 만한 이가 아무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세 남자가 있다. 이들은 삼성 무노조 경영에 반기를 들고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모두 돈·명예·권력 그 무엇 하나 가진 게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거대한 삼성을 상대로 노동운동이라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지회(삼성에버랜드) 박원우(42) 지회장과 조장희(42) 부지회장, 그리고 위영일(45)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지회장이다. 박 지회장과 조 부지회장은 2년 전인 2011년 7월 복수노조 시행에 맞춰 삼성에버랜드 직원 4명과 함께 노조를 설립해, 삼성의 73년 ‘무노조 경영’을 깬 당사자다. 위 지회장은 위장 도급 의혹을 받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들이 지난 7월 설립한 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이다.

우리는 쉽게 묻는다. 잠자코 삼성이 시키는 일만 착실히 하면 한평생 편히 먹고살 수 있었을 이들이 굳이 골리앗에 맞서 힘겹게 싸우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이들은 이 질문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위영일, “월급 100만원, 배고파 못 살겠다”

“배고파서 더는 못 살겠으니까.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을 판이니까. 배고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 슬픔과 설움을 모릅니다. 우리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들은 너무 많이 겪었어요. 가정이 파괴되고, 이혼당한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싸우지 않으면 다 죽을 판이에요. 죽더라도 한 번은 싸워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덜 억울하지요.”

위영일 지회장의 눈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난 11월15일 서울 광화문 금속노조 회의실에 마주한 이 세 사람 사이의 깊고 무거운 침묵을 가장 먼저 깬 이도 위 지회장이다. 언론에 다뤄지는 자신들의 모습에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우리가 고액 연봉자라고요? 웃기는 소리 마세요. 정작 우리는 인간 취급도 못 받는걸요. 7·8·9월 성수기 때 반짝 조금 더 번 것뿐이에요. 그것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에어컨을 수리했을 때나 가능하고, 나머지 달에는 100만원도 못 벌 때가 많아요.”

위 지회장은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 12년차다. 어릴 적부터 라디오키트 등 잡다한 물건을 고치는 걸 즐기고, 고등학교 때 밴드 멤버로 활동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던 그가 투사(?)가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와 삼성의 인연은 1992년 삼성전자서비스 부산 동래센터 협력업체인 동래프리미엄서비스에 입사하면서 시작된다. 그의 일은 컴퓨터, 냉장고, 텔레비전, 모니터 등 삼성에서 생산한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것이었다. 기대보다 훨씬 더 열악한 근무환경과 급여를 접한 뒤 1년 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2003년, 11년 만에 재입사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엇보다 제 손을 거친 가전제품이 다시 작동했을 때 느끼는 희열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다시 찾은 일을 정말 사랑했다. 일상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언젠가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요. 그 꿈을 삼성이 언젠가 꼭 실현해줄 거라고 확신했죠.”

그의 소박한 바람은 시간이 흘러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면 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대는 너무 높았다. “당연히 좋은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일한다고 여겼지, 제 열악한 근무환경과 얄팍한 월급봉투 사정을 알 리 없었죠. 그래서 술도 한 번이라도 더 사야 했고, 경조사 때도 더 두둑히 챙겨넣어야 했죠.”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앓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럴수록 통장 잔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제가 삼성이 아닌 협력업체 직원이라는 것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삼성전자 마크가 새겨진 옷을 입고, ‘삼성에서 왔습니다’ 하면서 삼성전자 제품을 고치러 다녔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삼성전자 직원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합니다. 최종범씨1가 왜 죽었는데요? 삼성전자 서비스 품질지수 12년 연속 1위,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립니다. 그런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듯, 삼성이 단물만 쏙 빼가니 억울할 수밖에요.”

그의 나이 마흔다섯, 현재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보증금 100만원짜리 월세방이 전부다. 가족도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정까지 죽어라 일했는데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울분이 행동의 파열구를 만난 건 2년 전 14~15명의 팀원을 관리하는 셀(cell)장이 된 그 앞에서 통곡하던 후배의 모습을 보고 나서다.

“급여가 적힌 종이를 들고 찾아와 ‘이래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며 울더군요. 봉투에 찍힌 급여는 150만원쯤 됐어요. 차량유지비·식대·통신비를 제외하면 집에 가져갈 수 있는 돈은 80만~90만원이 고작이죠. 네 식구가 생계를 꾸려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2이었죠.” 그가 후배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좋아질 거다, 참아보자’는 위로뿐이었다.

‘왜 우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걸까?’ 고민의 출발은 이랬다. 독학으로 노동법을 공부했다. 결론은, 있으나 마나 한 노사협의회 때문이었다. “우리의 권리를 찾고 싶었어요.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싶었고요.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그가 가장 먼저 해결하려 했던 건 최저생계비 문제였다. 회사는 고정급여 체계가 아니라 (수리) 건당 수수료 형식으로 지급되는 임금체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1
2012년 6월, 그는 투표를 거쳐 노사협 근로자위원에 선출됐다. 노사협의회부터 바꿀 요량이었다. 그는 고용노동부에 공개 질의를 했고, 이들의 급여를 최저임금법 위반으로 볼 수 있다는 회신을 받아냈다. “마지못해 회사는 올해 초부터 최소 150만원의 급여를 보장해주기로 했어요. 우리의 권리를 우리가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봤죠. 노조를 이래서 만드는구나 싶었죠.”

회사가 노사협의회에 굴복했다? 본사 삼성이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그의 회사, 동래프리미엄서비스는 지난 5월 폐업 신고를 했다. 직원들은 모두 해고됐다. 해고자들 대부분은 이후 삼성전자서비스 동래센터에 고용 승계됐다. 그러나 처우 문제를 제기했던 그를 회사는 끝내 불러주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의 권리를 요구한 건데, 잘못된 건가요? 지난해 말 이마트 불법 파견 사건을 계기로 뜻을 같이하는 다른 센터 노사협의회 위원들과 노조 결성을 위한 정보와 의견을 교류했어요. 그러다 7월4일 정식으로 노조를 출범시켰죠.”

“위 지회장님, 집에는 좀 들어가셨나요?” 1시간 남짓 지속된 침울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장난기 머금은 얼굴로 조장희 부지회장이 질문을 던진다. “지난 6월 이후 떠돌이 생활 중이고, 딱 세 번 집에 들어갔어요. 내사 마, 서울 사람 다 됐습니다. 끝말만 올리면 된다면서요? 최종범 열사 장례 문제가 빨리 해결돼야 하는데, 답보 상태입니다. 우리의 공개 사과와 보상 요구를 삼성은 묵살하고 있어요. 자기네 회사와는 상관없다는 거죠.”

위영일 지회장의 ‘장기 외박’은 노조 설립 이전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전국 서비스센터 순회 일정 탓이다. 그는 직원들을 만나 노조의 활동 내용과 필요성, 삼성의 노조 탄압, 직원들의 처우 개선과 관련한 요구 사항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조합원들은 무엇보다 수수료 형태의 급여체계 전환, 최저생계비 보장, 삼성의 직접 고용 등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삼성은 지난 10월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이 폭로한 문건 ‘2012년 S그룹 노사전략’에 나온 방식 그대로 서비스센터 노조의 목줄을 조이고 있다. 그는 “노조원이 많은 센터가 담당하던 관할 지역을 본사나 노조가 없는 다른 지역으로 넘기는 ‘지역 쪼개기’, 조합원에 대한 표적 감사 등을 통해 노조 파괴 행위를 일삼고 있다”며 “심지어 탈북 조합원에게는 ‘국정원에 신고해 북한으로 보내버린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으로 노조 탈퇴를 종용했다”고 분노했다.

노조 탄압 이야기가 나오자, 삼성지회 쪽에서도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박 지회장은 “4명의 초미니 조합으로 출범했고, 현재까지 조합원 수는 크게 변화가 없다. 서비스센터지회가 발족해 우리로서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셈”이라며 해맑게 웃었다. “그동안 소송 등으로 법원과 노동위원회에 불려다니느라 조합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어요. 올해 단협도 조합원 수에 밀려 어용노조에 뺏겼고요. 내년부터는 좀더 적극적으로 직원들에게 노조의 필요성과 에버랜드 내에서 당하는 조합원의 부당한 처우 등에 대한 홍보 활동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에버랜드에서 왜 노조를 만든 겁니까? 정규직에다 급여나 처우도 우리보다 훨씬 좋아 생존 문제도 아니었을 텐데….”(위 지회장)

“제가 퇴사 직전에 받은 급여가 얼마인 줄 아세요? 야근과 특근, 주말과 휴일 근로수당을 받고도 연봉 3천만원 수준이었어요. 우리 근무시간이 어땠는 줄 아세요? 하루 12~14시간씩 일했어요. 그래도 최고의 직장 삼성이니까 감수해야 한다고 믿으며 다들 묵묵히 일했지요. 특히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저한테는 놀이공원이 딱 맞는 직장이었고요. 하하하.”(조 부지회장)

협력업체와 본사 소속 직원이라는 이질감을 가진 이들이 ‘노조 설립’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은 순간이다. 조 부지회장은 정규직인 자신이 노조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직원들을 동반자로 여기지 않고, 관리·감시해야 할 도구로만 생각하는 문화를 바꾸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노조 설립이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게 법에도 명시된 권리 아닙니까. 꼭 필요한 일인데,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까 제가 총대를 멘 겁니다.”

나 조장희, “4명 초미니 조합, 권리 아닙니까?”

조장희 부지회장이 에버랜드에 입사한 건 군대에서 제대한 1995년이었다. 처음엔 아르바이트 차원이었지만, 경찰 시험에 낙방한 뒤 평생 직장으로 삼기로 했다. “에버랜드가 용인에서 가장 좋은 직장이니까요. 에버랜드 출입증만 달고 있으면 식당에서도, 은행에서도, 상점에서도 대우가 달랐어요. 결혼 당시 에버랜드 직원이어서 대출도 많이 받았는걸요.”

1
입사의 기쁨도 잠시, 에버랜드의 폐쇄적 분위기에 조 부지회장은 점점 지쳐갔다. 근무시간이나 인력 조정 등 노동자의 처우와 근무환경에 대한 당연한 요구를 회사는 매번 묵살했다. 그는 ‘문제 사원’으로 낙인찍혔다. 퇴사 직전까지 식음료팀, 주차팀, 청소팀 등으로 전출을 다니는 신세였다. “제가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일 뿐이죠. 교정청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약자가 당하는 고통을 모른 척하지 말자고 다짐했거든요”

조 부지회장의 생각이 노조와 노동운동으로 급격히 경도된 시기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직후다. 에버랜드는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인사팀에 불려간 동료들은 하나같이 사직서를 쓰고 돌아왔다. “왜 쓰냐, 버텨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삼성 안에는 회사의 명령에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또 나중에 사정이 좋아지면 불러줄 거라는 기대를 했던 모양이더라고요. 턱도 없는 소리죠. 아무리 회사가 어렵다고 해도 그렇게 막 해고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부터 노동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처음엔 노조 결성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위영일 지회장과 마찬가지로 그는 유명무실한 노사협의회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2년 처음으로 근로자위원에 출마했고, 2008년까지 세 번 연임했다. 동료들의 가장 큰 불만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수기 때 급격히 높아지는 노동 강도, 불합리한 전환 배치에 대한 문제제기 등 동료들의 의견이 노사협의회에 반영되도록 힘썼다. 그리고 노사협의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동료들에게 상세히 알렸다. 그의 노력과 달리 회사 쪽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진전된 답변을 내놓지 않을 때가 많았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것 같아요. 노사협의회만으로는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노조를 왜 만들었냐고요?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힘들었으니까요. 우리한테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고, 또 그것을 점점 당연시하니까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하지 않습니까?”

용기를 냈다. 2010년 1월 사내전산망에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글을 써서 올렸다. 20여 분 만에 글이 삭제됐다. 하지만 박원우 지부장, 김형태 회계감사, 백승진 사무국장이 그의 편에 함께 섰다. 이들은 1년 남짓 준비 기간을 거쳐 2011년 7월14일 삼성노동조합을 출범시켰다. 무노조 경영의 신화 삼성그룹에 노조 깃발을 꽂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회사는 그가 회사의 일부 임직원 전화번호와 구매 관련 자료 등을 유출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나 박원우, “에버랜드의 불평등 대우에 분개”

조 부지회장과 달리 조리사인 박 지회장은 현재까지 에버랜드에서 근무 중이다. 1999년 에버랜드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그는 “급여와 복리후생이 기대 이하였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며 “삼성 출입증 카드를 회사 밖에서까지 차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고, 1년 만에 심사를 거쳐 정규직 발령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입사 직후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일과 회사였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10시간 이상 묵묵히 일했다. 하지만 회사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연하게 여겼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인력 충원이라고 건의했다. 회사는 요구를 묵살했다. “노동자로서 겪는 불이익을 조장희 근로자위원에게 건의하면서 인연을 맺었지요. 회사의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노조를 결성해야 한다는 데까지 의견일치를 보고, 곧 실행에 옮긴 거죠.”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고 조합원이 된다는 건 특별한 의미다. 낮은 인사고과와 연봉 상승률은 물론이고 감시·미행·도청·왕따 심지어 해고의 불이익, 또 다른 차원의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들 셋의 대화가 3시간째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삼성의 노조 탄압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조합 결성 당시 조합원이 1600여 명에 달했는데 1300명 수준까지 떨어진 건 삼성의 노조 깨기 전략 때문이지요. 최종범 열사도 그 피해자였던 것 아닙니까. 노조원 있는 센터의 일을 노조원 없는 센터로 다 몰아주고. 그러다보니 분회장이 회사의 공작에 넘어가 센터(분회) 전체가 노조에서 탈퇴한 경우도 있어요. 생존이나 밥그릇을 갖고 협박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위 지회장)

조 부지회장의 눈가가 붉게 충혈됐다. 무슨 말 못할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는 “아내가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것만으로 힘을 내고 있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8살·5살 남매를 둔 가장인 그는 가족 생각에 목이 메어오는 모양이었다. “가장 사정이 딱합니다. 이번 겨울에 조 부지회장님은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요.” 곁에 있던 박 지회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조 부지회장은 2006년 초 에버랜드 인근에 구입한 아파트 원리금을 갚지 못해 지난 9월 경매 결정 통보를 받은 상태라고 한다. “당시 1억5천만원짜리 미분양 아파트를 7천만원 대출을 받아 샀죠. 뭐, 직장 다니면서 차근차근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노조를 만들고, 또 그것 때문에 해고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런…, 괜찮으시겠어요?” 위 지회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조 부지회장을 위로했다.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들한테 결핍의 경험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힘들긴 한데,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생존 위협에 놓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돈 욕심을 내는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든 살아지겠죠. 사실 저보다 더 걱정되는 분은 매형이에요.”

“직원들에게 매형 가게 출입도 금지해”

조 부지회장의 매형은 에버랜드 인근에 있는 대형 보쌈집 대표다. 한때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성업했지만, 그가 노조 활동을 한 뒤 매상이 줄어 현재 폐업 위기에 몰렸다. 주 이용객인 에버랜드 직원들이 발길을 뚝 끓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가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거라고 봐야죠. 심지어 에버랜드 쪽에서 100~200명 단체예약을 한 뒤 예약 시간 직전에 취소한 일도 여러 번 있었어요. 연좌제라니, 정말 치졸한 방법의 탄압이죠.”

이들에게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말은 이병철 전 회장의 유지라고 하지만, 결국엔 경영 세습을 하고, 불법 비자금을 만들고, 정부기관을 돈으로 오염시켜서 정부보다 더 힘이 센 삼성공화국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요?”(조 부지회장)

“그렇죠. 산술적으로 노조를 두게 하는 게 비용이 덜 드는데, 더 많은 돈을 들여서 노조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총수 일가의 오만 때문이겠지요. 내가 만든 삼성이라는 세계 안에서는 직원들의 생각마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 말이지요. 근데 삼성 전체를 그 사람들이 만든 겁니까?”(위 지회장)

이들은 인터뷰 내내 서로에게 확약받듯 “무슨 일이 있어도 노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유가 뭘까. 박 지회장은 “초미니 조합이어서 지금껏 우리를 실패한 삼성노조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며 “‘노조=해고’ 공식이 아니라는 롤모델을 만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노조를 포기할 수 없고, 또 그 때문에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 부지회장은 “우리 셋이 똘똘 뭉쳐 어떻게든 삼성 내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노조의 싹이 꺾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끝까지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삼성에버랜드는 최근 급식 및 식자재 부문을 ‘삼성웰스토리’로 물적 분할하고, 건물 관리 사업을 4800억원에 에스원으로 이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사업구조 개편을 발표했다. 시기적으로 삼성지회 쪽에 유리한 국면이 될 수도 있다. “에버랜드 직원들의 분위기가 어떠냐”고 박 지회장에게 물었다.

“직원들의 불안감이 높아진 상태여서 우리로서는 긍정적입니다. 우리와 대화하는 걸 꺼리던 분들이 이제는 노조와 회사에 관련돼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또 잘하라고 격려해주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힘을 내야죠.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함께 찾자고도 이야기해야겠지요. 얼마 전, 아내가 묻더군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당신이 노조 활동을 하는 게 힘들어서 이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전 그랬어요. 당신과 자식들에게 미안하지만, 이혼을 선택하겠다고. 그 마음은 노조를 준비할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어요.”

4시간 남짓의 인터뷰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위영일 지회장의 연락처를 휴대전화에 저장했다. 곧바로 카카오톡 친구 등록 메시지가 떴다. 그의 카카오톡 대화창 사진엔 기도하는 손의 모습이, 소개글엔 “불의와 싸우는 이유는, 내게 있는 정의가 승리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마치 이들 셋이 ‘삼성’과 맞짱 뜨는 이유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 지난 10월31일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 수리기사 최종범씨가 자신의 카니발 승용차에서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아내와 돌을 앞둔 딸에게 휴대전화로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2 2013년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는 154만원이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