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1:29 수정 : 2014.01.07 10:47

함께 춤추던 부잣집 밉상 친구가 아마추어 작곡가한테서 구입한 노래들을 자작곡이라고 ‘구라’쳐서 가수가 되는 것을 보고 ‘저거 반칙이잖아!’ 하며 홧김에 덤벼든 게 내 음악 생활의 시작이었다. 18살 때였고, 독학이었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파고든 건 스무 살 때 서울로 와서부터다. 자취를 하며 음악 작업에만 몰두했다.

음악 생활 16년. 내가 음악산업에서 프로듀서 겸 싱어송라이터로 어느 정도 자리잡게 된 것은 2008년에 발표한 2집 음반과 2009년 2.5집의 성과 덕분이다. 힙합음악으로 입문해서 ‘UMC’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등 당시 최고의 힙합 뮤지션들을 프로듀싱해왔고, 2002년 발표한 1집에서 역시 힙합스러운 리듬앤드블루스(R&B)와 솔(Soul)을 추구했다. 그러나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만 약간 어필했을 뿐 다수의 대중은 내 발라드 감성을 좋아했다. 2집 음반에서 가장 발라드에 가까운 곡들(<엄마> )이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라디’(Ra.D)라는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몇 달 전 라디오 방송국에서 만난 가수 성시경씨는 “발라드는 거친 장르예요”라고 말했다. 여지껏 내 삶을 돌이켜보건대 그 말은 맞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찾아온 사춘기가 무려 고등학교 2학년까지 지속됐던 나는 어릴 적부터 굉장히 당돌한 편이었다.

네 가족이 반지하 단칸방에 살 만큼 가난했던 중2 시절 국제펜팔을 하다가 상대 여학생 부모님께 초대받아 혼자 러시아에 몇 달간 다녀온 일도 있고, 사춘기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등장하는 ‘엄석대’라고 불릴 정도로 독재자 악동 반장 짓을 했으며, 고등학생 폭력배들의 조직 가입 권유가 두려워 멀리 떨어진 학교로 전학한 중3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춤추는 것을 좋아해 각종 댄스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도 했다. 그러다 고2 때 교무실에서 가위로 내 머리카락을 자르려던 선생님을 향해 인권이 어쩌고 하며 반항하다 강제 전학을 가게 되는 것까지가 내 학창 시절의 전부다. 대학을 잠깐 다니긴 했지만 재미없어서 한 학기도 못 채우고 그만뒀다. 하여간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후 음악을 시작하며 힙합계에서 한때 ‘괴물 프로듀서’라고 불리며 비트메이킹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적도 있고, 어떤 기획사에 들어갔는데 1집(2002년)을 내고 얼마 안 있어 회사 사장이 잠적하는 바람에 공중부양하며 방황했던 때도 있고, 26살 즈음 느지막이 입대해 전차병으로 복무하면서 병장이 다 되도록 후임이 없어 이른바 ‘꼬인 군번’으로 군생활을 했고, 제대해서도 자리를 잡지 못해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보곤 했다.

스티비 원더처럼 선천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뮤지션들에 비하면 소소하고 여유로운 삶일지 모르나, 나름 많은 경험과 방황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재능 있다는 소리를 어려서부터 꽤 들어왔고, 그것이 자기암시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워낙 당돌한 성격이어서인지 내가 실패할 거라고 비관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그때그때 흥미 있는 것들에 좀더 많이 집중했다.

재능이라…. 얼마 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승철씨는 ‘노래는 타고나는 것’이라며 노력 위에 재능이 있음을 강조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돼’라는 말인데, 노력형 인간들에게는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다. 재능으로 모든 게 한 방에 해결될까? 이승철씨 같은 톱가수들은 재능 있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할까? 혹시 재능 없음을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국제가수 싸이는 ‘가수’이지만 노래나 랩이 필살기는 아니다. 춤도 외모도 ‘평범’하다. 20대 초반 잠시 어울려다니며 옆에서 본 바로 엄청난 부유층 집안의 해외파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른바 ‘노는’ 부류였다. 대마초에 병역 문제에 갖은 악재가 있었지만 결국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국내 최고의 트러블메이커가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된 것이다. 나도 놀랐지만 싸이 자신도 깜짝 놀랐을 터이다. 이게 뭔가. 튀어나온 못이 정을 맞는다고 했는데, 제대로 튀어나온 못이자 도무지 겸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싸이가? 험난한 환경을 딛고 일어나 악착같이 노력해서 겨우겨우 일궈내는 것이 성공의 공식이 아니란 말인가? 어떤 다른 공식 같은 게 있는 것인가?

왼쪽부터 중학교 때 국제펜팔을 하던 상대 여학생 부모의 초대로 혼자 러시아에 몇 달간 다녀왔다. 고등학생 때는 춤에 빠져 살았다. 2002년 어느 기획사에서 1집 음반을 냈으나 회사 사장이 잠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26살에 입대해 전차부대에서 복무했다. 내 음악은 군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싸이는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로 빌보드 차트 2위까지 했지만 그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것은 유튜브(미국의 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숙성된 그의 내공이 결실을 맺은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유튜브라는 채널을 통해 어필했다. 한마디로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이자, 유튜브의 시대다. 춤도 노래도 우리나라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와 비교해서 그다지 나을 바 없는 국외의 어떤 어린 가수도 유튜브를 통해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유튜브 만능주의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능이 누구보다 특출하지 않아도 재능을 넘어서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것을 의외라고 받아들이는 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재능은 선천적일지 몰라도, 자신만의 개성은 스스로 개발할 수 있다고 본다. 습관처럼 괴짜의 삶을 사는 것, 어떻게든 제대로 튀어보려 애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세계인과 공유하는 것, 못으로 태어났다면 튀어나와 망치의 세례를 받아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2013년형 성공 공식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싸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할 수는 없겠지만 기왕 태어난 것, 목표를 설정하려면 동네나 어떤 지역이 아닌 반드시 세계 무대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내가 이룬 것들에 전혀 만족하지 않고 있다. 독자 여러분 중에 아직 원하는 만큼 삶을 이뤄보지 못한 분들과의 공감대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우리 앞에는 ‘더 넓은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다.

요즘 나는 영상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 2011년 아들 범진이의 첫돌 동영상을 만들고 아내에게서 칭찬을 받은 뒤 자신감이 붙어 늘 하고 싶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곧 발매될 내 싱글 음반의 뮤직비디오 연출과 편집을 직접 하게 되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출발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작품을 만들 생각에 신이 나서 호흡이 점점 가빠진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과 아버지로부터, 20대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현재는 음악에만 몰두하라며 만류하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늘 견제받아왔다. 어느 때나 똑같이 긴장감이 있고, 분노와 두근거림이 동시에 있고, 여전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 있고, 방황이 있다. 10대에 춤췄을 때처럼, 20대에 음악을 하고 뜨겁게 연애할 때처럼, 지금 하고 있는 영상 공부처럼, 여지껏 해온 대로 내 역량의 100% 근처에서 조금 더 머물며 한계치를 끌어올리는 것에 집중할 거다. 일단 그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 내가 디자인한 삶을 그저 살아낼 뿐이다. 당연히 그 뒤에는 승부를 걸어야지. 세상과 만나야 하니까.

라디(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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