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6:12 수정 : 2013.09.03 14:27

1.

아래 인용문은 어떤 사람이 쓴 글인지 자유롭게 상상 해보라. 직업을 상상해도 좋고, 정치적 입장을 생각해도 좋 고, 심리적 성향을 떠올려도 무방하다.

 

“여성은 원래 운명적으로 남성의 동반자이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은 일에서나 생활에서나 동료인 것이다. 수세 기 동안의 경제적 발전이 남성의 노동 영역을 변화시켰듯 이, 논리적으로 여성의 영역 역시 변화시켰다. 함께 일할 의 무뿐만 아니라, 인간을 보존하는 것도 남녀의 의무이다. 이 가장 고귀한 임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영원한 지혜 로 남녀에게 주신 특별한 개인적 재능의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생활의 동반자이자 일의 동료가 될 수 있도록 가족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장 숭고한 과업이다. 가 족의 최종적 파괴는 모든 숭고한 인간성의 종말을 의미한 다. 여성의 활동 영역이 멀리까지 뻗어나간다 하더라도 진 실로 유기적이고 논리적인 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항상 가 족의 창조여야 한다. 가족은 국가의 전체 구조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가치 있는 단위이다. 일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명예롭게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성을 고귀하게 만든다.”

 

이 글이 현재 한국 신문에 실렸다고 가정하면, 남녀를 화해시켜 가정을 지키게 하려고 애쓰는 가정법원의 보수적인 판사 정도가 필자로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이 글은 히틀러가 쓴 책 <나의 투쟁>에서 발췌한 것이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그의 행동만큼 그의 생각이 낯설어 보이는가? 생각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고향과 가정과 국가를 강조하는 것이 어떻게 유대인 학살이라는 만행과 연결됐는지 이해가 되는가?

우리는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나치가 투표로 집권해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다는 사실도 종종 잊는다. 그 대중이 평범한 독일 시민이었다는 점도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다. 나치는 그저 하켄크로이츠(卍) 문양을 새긴 제복 속의 악마 정도로 기억된다. 아마 유대인 학살 하나만으로 더 이상의 판단을 중지하고 윤리적 분노로 생각을 대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은 일회성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대중사회의 정치적 현상이다. 파시즘의 정서는 어느 사회나 억압된 채 잠복해 있어 언제든 정치적 사건으로 폭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파시즘을 바라보는 태도가 윤리적 분노에 그치면 곤란하지 않을까? 윤리적 분노는 ‘선한 우리’와 ‘나쁜 그들’을 나누고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 안의 파시즘을 외면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대한 평가는 가능해도 예방은 어렵다. 파시즘은 대중의 일상 속에 깊이 스며 있는 비합리적 사고 습관과 정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시즘을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사회 전체의 정치적 건강성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 안의 무엇이 파시즘을 낳는 토양이 되는지 성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지금 한국 사회에 나타난 극우적 성향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응도 이런 성찰적 태도가 필요하다. 일베를 ‘극우’, ‘네오 나치’ 등으로 명명하고, 정치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자멸할 만큼 충분히 외설적인 언행에 정색하고 대응하는 것은 오히려 애초에 없던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 시점에서 일베는 우려할 만한 극우 정치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현재의 정치 체제가 껴안지 못하는 대중의 응축된 불만의 징후일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일베에 해야 할 것은 정치적 논박이 아니라 질문이다. 일베는 대중 속에 광범위하게 극우적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징후로 볼 수 있는가? 일베를 탄생시킨 사회적 조건 혹은 정치 제재의 공백은 무엇인가? 일베라는 증상에 대해 시민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민사회의 정치적 건강성을 성찰하는 방법이며, 극우적 정서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이기도 하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극우의 원조인 파시즘의 심리상태와 정치적 행동 패턴부터 살펴보자.

 

2.

파시즘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통찰을 보인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다. 1933년 나치 정권 아래 출간된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파시스트와 사회주의자 양쪽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나치는 파시즘에 대한 탈(脫)신비화가 위험해, 사회주의자들은 ‘계급’보다 ‘성격’을 정치적 주체의 본질로 보는 시각이 반혁명적이어서 배척했다. 라이히 는 파시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설명의 한계를 프로이트를 끌어와 넘어서고자 했다. 파시즘에 노동자들이 적극 동조한 이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은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의 분열’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불리한 파시스트를 지지하는 것은 속아서이고, 정치적으로 각성하면 여기서 벗어날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한 라이히의 견해는 노동자들이 속아서가 아니라, 억압적 사회구조에서 형성된 권위주의적 ‘성격구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갖고 있는 대중에게 ‘당신들은 정치적으로 속고 있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는 ‘성격구조’를 계급의식보다 정치적 행동의 더 근원적인 동인으로 봤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성격구조는 어떻게 형성되고, 파시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대학 갈 때까지 학교 공부보다는 잡지 읽기에 더 열심이었다. <중앙일보> 기자로 한 10년쯤 일했는데, 대부분을 문화부에서 보냈다. 인터뷰집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 칼럼집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역서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무한 미디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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