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5:06 수정 : 2013.11.11 14:16

197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부가 가치세’(부가세) 도입을 공식 발표했다. 부가세는 모든 재화 와 서비스의 판매에 붙는 세금이다. 영업세와 물품세 등 종 전에 시행되던 8개 간접세1 가 모두 부가세로 흡수됐다. 논 란 끝에 10%의 단일세율로 197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당시 부가세는 낯선 세목이었다. 정부 안팎에서 숱한 ‘연기론’과 ‘반대론’이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증세에 따른 조 세 저항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증세는 국민 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불신의 대상이었다.

명칭에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이름이 너무 길어 국민에 게 비칠 인상이 안 좋을 것이라며 ‘거래세’로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검토 끝에 북한이 서울 점령 시 통칭 ‘거래세’라는 세금을 부과한 적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현재 이름으로 정했다.

그럼에도 부가세를 도입하게 된 배경에는 세수 증대를 위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난제가 깔려 있었다. 1970년대 정부는 소득공제 규모를 크게 늘려왔다. 사회보장 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소득세로 세수 확보와 소득 보장 의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려 한 결과였다.2 부가세는 종전 영업세 등의 간접세와 달리 탈세가 어렵다는 이점이 있었다. 정부는 낙후된 세제를 선진화하는 동시에 세수 늘릴 기회로 삼으려 한 것이다. 재무부에서 부가세 도입 업무를 담당한 이는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강 전 장관은 직접세과 영업세 담당 사무관 시절부터 부가세 제도 설계에 참여했고, 과장 승진 이후에도 제도 시행 및 안착 과정의 실무를 주도했다. 그는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부가세가 시 행되자 전국에서 문의가 빗발쳤다. 어떤 날은 질의가 100건 이 넘었다. 국장실에 서류는 쌓이고 결재는 늦어져 아우성 이었다”고 회고했다. 납세자들의 궁금증은 ‘과세와 면세 대 상이 어떻게 나뉘는지’였다. 예컨대 무를 말리고 가루를 내 어 고추냉이를 만드는 것이 ‘단순 가공’인지 따위다. 단순 가 공은 미가공으로 간주해 면세 대상이었다.

예상대로 부가세에 대한 민심은 흉흉했다. 1978년 12 월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과반수 의석을 얻었지만 득표 율에서는 야당보다 1.1% 뒤지는 성적표를 받았다. 이때부터 도마에 오른 부가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 해와 유신 체제 붕괴, 부마 민주항쟁 등의 원인으로 지목받 기에 이른다. 학계에서는 1970년대 후반 부가세 도입이 심각 한 정치·사회적 저항을 초래해 정치권에서 증세를 금기시하 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평가한다.3 증세와 조세저항을 둘러 싼 논쟁의 역사가 사실상 이 무렵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부가세는 1981년까지 줄기차게 ‘폐지론’에 시달려야 했 다. 부가세 도입 사례는 역대 정부에서 조세가 얼마나 중요 한 정책 수단으로 동원돼왔는지 다각도로 보여준다. 지난 8 월 8일 정부 세법 개정안 발표 이후 불거진 세금 논쟁도 마찬 가지 맥락이다.

음식점에 외상 깔린 ‘춥고 배고픈’ 조직

역대 정부에서 조세 역할이 강조될수록 해당 업무를 하는 세제실의 위상도 높아졌다. 일부에선 세제 쪽 경제 관 료들을 ‘세피아’(세제+마피아)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 세제 업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곳은 기획재정부 세제실이다. 세제실은 4개국(조세정책·재산소비세정책·조세기획·관세 정책), 14개과, 3개팀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재무부 시절만 해도 세제실 규모는 크지 않았다. 1966년 3월 국세청이 외청으로 독립해 나가기 전에는 ‘사세 국’에서 세제 정책과 국세 행정을 모두 담당했다. 일개 과 단 위에서 세제 업무를 맡던 시절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사세국이란 명칭은 국세청 독립과 함께 비로소 세 제국으로 바뀐다. 3개과에 직원수는 30명 남짓이었다.

재무부 직원들은 세제국을 사람의 ‘골격’에, 금융정책 을 관장하는 이재국을 ‘혈관’에 비유했다. 김대중 정부 때 세 제실장을 지낸 이용섭 의원(민주당)은 “사람은 골격에 문제 가 있다고 해서 바로 어떻게 되지 않지만, 혈관이 터지면 바 로 죽을 수도 있지 않느냐”며 “ 전자는 주로 장기적인 한방 적 처방이 필요한 반면에, 후자는 단기적이고 양약적 처방 이 필요할 때가 많다”고 말한다. 경제 여건에 따라 상시적으 로 정책을 구사해야 하는 금융과 달리 세제는 한번 바꿀 때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빈번하게 손을 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세제 업무를 하는 관료들은 “답답하다”, “유연 하지 못하고 보수적이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1 8개 간접세 세목은 영업세, 물품세, 직물류세, 석유류세, 전기가스세, 통행세, 입장세, 유흥음식세 등이었다.

2 김도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은 계간지 <사회와 역사> 2013년 여름호에 낸 ‘한국 의 재분배 정치의 역사적 기원’ 논문에서 “1970년대 근로소득세 면세점의 대폭적인 인상 이후 조세정치는 대부분이 소득공제 규모의 인상, 즉 감세 프레임의 틀에 갇히게 된다”고 설명한다.

3 김도균,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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