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4:41 수정 : 2013.09.03 15:37

목수정. 그의 이름이 있는 곳에 논란이 있었다. 처음 <레디앙>에 칼럼을 연재할 때, 그의 솔직한 태도는 다양한 반응을 낳았다. 민주노동당 문화담당 정책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그가 보인 행보는 공감과 반감을 동시에 유발했다. 논란의 절정이 정명훈씨 사건이었을 것이다. 당시 국립오페라합창단 해고에 항의하기 위한 지지 서명을 정명훈씨에게 부탁한 목수정은 그의 태도에 부당함을 느끼고 그 사실을 공개하기 위한 장문의 글을 썼다.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글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거침없던 목수정의 행보에 적잖은 변화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아름답고 온화한 자유의 풍경은 목수정의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불안과 두려움이기도 하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약할 수밖에 없는 막막함…,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선동가도, ‘재미있는’ 언니도 아닌

야생마를 기대했는데 다소곳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날씨는 무더웠고, 인터뷰하는 장소는 다소 소란스러운 음악으로 채워졌다. 이런 조건에 까탈을 부리는 성미는 아니었지만, 뭔가 기대와 다르게 인터뷰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었다. 목수정도 말을 아끼는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질문이 시원찮았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동안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선동가’ 목수정의 모습은 없었다. ‘재미있는’ 언니의 모습도 없었다. 손아람만 있었다면 모를까, 나에게 목수정은 언니 노릇 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목수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는 이미 그의 글이나 다른 인터뷰를 통해 충분히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정보를 캐내는 방식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인터뷰하러 왔느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을 테다. 무슨 타블로이드 언론처럼, 독자의 궁금증이라는 핑계로 선정적인 질문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한다고 거부할 목수정도 아니지만, 오히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학 시절에는 데모하는 것보다 연애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요즘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386 운동권’ 언니 출신은 아니었다. 물론 시위에 가담해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그 ‘삶의 체험’이 그에게 썩 좋은 기억을 남긴 것 같지 않았다. 특히 꼰대스러운 운동권에 질색인 경험담이 더 많았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그의 선택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처음부터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인 그가 문화정책 전문가이고 싶어 했다는 것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오늘날 목수정을 있게 만든, 파리와 서울 사이를 오가는 작가라는 정체성도 문화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행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것도 그가 파리에서 전공한 학문 덕분이었다. 시종일관 그를 지배하는 것은 문화정책 전문가라는 지향이었다. 파리지앵으로서 그를 소비하는 분위기와 이런 그의 지향은 사뭇 달랐다. 목수정에게 유명세를 부여하는 것은 프랑스인 남자를 만나 아이 낳고 살아가는 한국인 여성으로서 한국 사회에 대한 솔직한 충고를 할 수 있는 위치이지만, 그 자신은 문화정책에 대해 입안하고 관철시키는 전문가 역할에서 존재 의의를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파리로 가기 전 문화정책에 대한 헌법소원을 하려고 장문의 청원서를 써놓은 것을 귀국해서 발견하고 놀랐어요.” 자신도 몰랐던 과거에 대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털어놓는 목수정. 말하자면, 그의 고민은 파리 가기 전부터 내재해 있었다는 뜻인데, 민주노동당에 문화담당 정책연구원으로 지원한 까닭도 평소 구상해온 문화정책을 깨알같이 공약으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니, 이처럼 그에게 문화정책이란 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실제로 그가 처음 출간한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에서도 그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해 문화정책 부재인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크게 바뀐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왜 그렇게 문화정책에 관심을 갖는가? “그런 부당함을 보면 참을 수 없어요.” 대학졸업 후 그의 직업이 문화기획 관련 일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느낀 부당함과 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하게 목수정이 문화정책에 불만이 있어서라고 보기 어렵다. 문화정책이 문제라기보다, 부당함을 보고 참지 못하는 그의 기질에 있었다.

‘기질’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목수정이라는 개인을 구성하는 어떤 욕망의 구조일 테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무엇이 그를 문화정책의 부당함을 개선하는 길로 나서게 했고, 급기야 파리로 날아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재불작가를 만들어낸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한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도 할아버지의 내력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3·1운동에 참여해 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그의 할아버지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전공학적으로 ‘혈통’을 이야기한다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특별히 지사적 혈통이 따로 있을 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

 

홍세화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는 멈출 수 없는 물 같은 존재였다. 한때 유행한 ‘유목민’의 모습을 그의 행적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항상 ‘결단’을 요구하는데,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해낸다는 자부심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물었다. “저도 실패를 많이 했어요. 성공만 한 건 아니죠.” 엷은 웃음을 묻힌 겸손한 대답이었다. 이곳저곳에 지원해 숱하게 떨어져봤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런 실패만으로 그의 오늘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결핍이 있었을 것이다. 정의감은 합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감정에 더 끌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말하는 ‘결단’이라는 것도 합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지기보다 그냥 감정에 몸을 맡기는 쪽에 가까웠다. 사랑에 대한 그의 주장을 듣고 있으면 더욱 그랬다. ‘야성의 사랑’이라니. 야성과 사랑은 사실 적대적이다. 사랑은 공감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이 사랑에 야성이라는 공감 불가능한 절대적 차원을 덧붙여놓는다. “예쁜 사랑 하세요”라는 말이 만연한 사회에서 야성의 사랑을 호소하는 그의 처지가 기꺼이 환영받기는 어려워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짝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그는 열심히 그와 자신의 짝을 제도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시민연대계약’에 대해 설명했다. 한참 설명을 듣던 손아람은 “그게 결혼제도와 다른 점이 뭐죠?”라고 물었다. 결혼을 관장하는 국가기관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특별한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사실상 계약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결혼일 수밖에 없었다. 목수정은 동성 간 결혼같은 기존 결혼제도에서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시민연대계약이 만들어진 것이라고했다. 말하자면 기존 결혼제도가 제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시민연대계약은 필요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결혼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다양한 대책은 결과적으로 결혼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완벽한 결혼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결혼과 사랑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더 문제일 것 같다. 목수정의 문제의식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처음 만났을 때 새벽 1시까지 수다를 떨었죠. 처음에는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지금 짝과 시민연대계약을 맺게 되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다소 평범했다. 이야기가 잘 통했고, 지적인 면에서 의지할 수 있었단다. 그래서 잘못되었는가? 목수정의 장점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데 있기보다, 그 올바름의 근거를 드러내는 데 있다. 이런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시민연대계약을 맺은 것은 영주권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도 빠짐없이 이야기해줬다. 딸을 출산하면 임산부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프랑스 제도 덕분이었다. 목수정의 올바름은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 가로놓인 다름에 근거했다. 프랑스의 좋은 점을 한국 사회에 접목시키려는 발상이 그의 비판의식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가 없는 게 아니다. 이른바 ‘프랑스파’ 지식인과 목수정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홍세화 같은 경우 유럽적 근대성을 표준으로 삼아 한국을 거기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실천적 기획이라고 본다. 목수정 역시 여기에서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그렇진 않아요. 저는 프랑스에 대한 비판도 엄청 해요. 요즘은 희완이 나서서 그만 좀 하라고 말할 지경이죠”. 희완은 그와 시민연대계약을 맺은 짝의 이름이다. 일방적으로 프랑스를 표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목수정은 프랑스에서 여성 외국인이라는 주변적 지위를 갖는다. 소수 중에서도 소수에 속하는 존재인 셈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근대성이 그대로 보일 리 없다.

그가 말하는 자유로움이라는 것은 이런 주변적 소수성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자유로움이 가끔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주변적 소수의 자리에서 주어지는 자유로움은 자유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 이들에게 목수정의 자유로움은 철없는 소리처럼 들리거나 아니면 호사취미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비난이 없지 않았고, 목수정 자신도 상처를 적잖게 받았을 것이다.

조심스런 그의 태도는 이런 추측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자유로움은 종종 운 좋은 결과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오해 없는 논란도 없고, 논란 없는 이해도 없는 것이다. 목수정의 자유로움은 한국 사회에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하나의 위안을 주는 사례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양대 진영 논리로 해소할 수 없는 지점을 그의 주장이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운명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평등한데 특정인에게 행운이 몰리는 데 억울함을 느끼는 것이다. 목수정도 이런 억울함을 느끼게 만드는 존재이다.

 

진보 내걸었지만 자유주의적 특성

한국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목수정 처럼 ‘과감하게’ 결단하고 자신을 내던진다는 것이 호사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런 태도는 확실히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목수정이 성공한 사람인가 질문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성공한 것이라면 ‘경계인’으로 자신을 위치시킨 결단 덕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결단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결단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수정은 여기에 대한 섬세한 고찰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주장이 좀더 힘을 얻으려면, ‘세계적인 인물’로 성공하라는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벗어나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야말로 목수정을 파리로 이끈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무엇 때문에 글을 쓰게 되었고, 민주노동당에 왜 들어갔는지 계속 질문했다. “정당의 문화정책을 쭉 훑어봤어요. 그런데 민주노동당정책이 평소 제가 고민한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민주노동당에 연락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곧 공채가 있을 예정이니 지원해보라’고 했다. 그는 당당히 공채로 합격해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망이었다. 정책은 그럴듯했는데, 정작 민주노동당 내 문화를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정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목수정은 진을 빼야했다. 눈에 선한 광경이다.

대체로 논리는 이렇다. 거악과 싸우기 바쁜데 무슨 문화인가? 또한 문화주의는 자유주의의 일종이기도 했다. 문화개조론은 일본 강점기에 친일 지식인들을 추동해간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진보 내에서 출현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문화학에 영감을 받은 <문화과학>이나 문화연대의 활동이 주목받았다. 목수정도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문화정책이 좋아서 입당했는데, 정작 입당해서 정책연구원으로 일해 보니, 자신이 좋게 생각한 공약을 만든 이들이 문화연대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의외로 민주노동당 내부는 문화에 높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섭섭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궁금한 것은, ‘왜 그렇게 문화에 중요성을 부여하는가’였다. 문화를 통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문화가 그의 전문 영역이라서 그런 것인지 여러 가지로 궁금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문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알겠다. 그렇다면 직접 예술이나 구체적인 창작행위를 해볼 생각은 없는가? “당

연히 있죠. 다만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어요.” 어떤 좌절이 있었던 것이다. 의문이 좀 풀렸다. 그의 책을 채우고 있는 범상하지 않은 문장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의 문장은 시적인 감흥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출판시장은 그를 ‘감성좌파’라고 포장하는 것일까? 여하튼 마케팅의 일환이든 뭐든, 그를 일컬어 감성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사정이 이렇다면, 분명 우리에게 알려진 목수정과 다른 목수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목수정이 궁금했다. 남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목수정이 아닌 다른 목수정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직 친화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손아람이 ‘자유주의’라고 명명한 어떤 측면이 목수정에게 있었다. 진보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자유주의적인특성을 그는 가감 없이 드러냈다. 모두가 꿈꾸는 자유의 가치를 그의 삶은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짐을 싸서 파리로 떠나면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그의 전매특허였다. 다소 과장은 있을지언정 잘못된 말은 아니다. 다른 삶을 살려면 장소를 옮겨야 한다. 이것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가장 작지만 확실한 실천이다. 그 뒤에 삶은 알아서 굴러간다. 목수정이 하는 이야기는 이런 단순한 진실이다. 그런데 이 단순하지만 과감한 말이 반감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사회성이라는 적응력을 가장 크게 치는 이들에게 목수정의 발언은 무책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기본적으로 목수정은 사회성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것 같다. 그에게 삶은 절대다수가 동의하는 사회적 가치와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쉽게 삶의 터전을 옮기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모두에게 쉬운 일이라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쉽지 않은 일을 쉽게 말하는 것은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수정은 그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남들이 보기에 자신의 성공사례를 중심에 놓고 ‘내가 해봤는데 되더라’는 훈계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목수정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이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운위되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자유롭게 산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아름답고 온화한 자유의 풍경은 목수정의 것이 아니다. 목수정에게 자유는 불안과 두려움이기도 하다.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그가 강조한 것이 평탄하지 않은 자신의 과거였다. 자신만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약할 수밖에 없는 막막함이 진술에서 묻어났다.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야성’?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그의 자유는 파리와 서울을 오가는 유유자적한 삶을 위한 조건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곳도 저곳도 속할 수 없는 처지를 자각하는 과정이 자유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대책 없는 삶을 살아가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톡 까놓고 말하면 그의 삶도 대책 없었던 것 아닌가? 세간의 시선은 그를 프랑스인과 사는 재불작가이자, 동시에 8살 난 아이의 엄마로 자리매김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계속 궁금했고, 인터뷰를 정리하는 지금도 궁금하다. 특정 정당 소속 정책연구원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작가로 거듭난 그의 이력은 지난 몇 권의 책을 통해 성공적인 궤도로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그가 키워나갈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출간한 <월경독서>는 단순한 독서 편력을 다루었다기보다 오늘날 목수정을 있게 한 책을 다시 읽으면서 거기에 대한 감상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것이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목수정은 이제 하나의 롤 모델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의 삶과 주장은 독자적인 존재감을 확보해가고 있는 셈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의 정의감인 것 같다. 그가 그냥 감성을 토로하는 작가라면 이런 역할이 주어질 리 없을 것이다.

인터뷰 도중 탈옥수 신창원 이야기가 나왔다. “신창원 을 보면서 이상하게 눈물이 났어요. 월사금을 못 내서 맞은 사연을 듣는데 화가 나면서 슬프더라고요.” 문화정책과 사회개혁에 대한 목수정의 정의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알수있는 대목이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한다고 학생을 때리는 국가를 바꿨더라면, 신창원이라는 범죄자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목수정의 발언은 민주주의 원리이기도 하다. 국가에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이다.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을 바라는 집안에 둘째 딸로 태어난 서러움이 그를 남아선호에 대한 반대자로 만들었다. 아들을 낳으려는 엄마의 손에 끌려 머리까지 짧게 깎이고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에게 깊이 박혀 있었다.

목수정을 구성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에서 그는 평소 한국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고 믿는 주변 소수에게 지지를 받는 것이다. 단순한 롤모델의 차원을 넘어선 그만의 진실이 여기에 숨어 있었다. 얌전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무엇이었다. 이것을 ‘야성’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목수정에게 기대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를 이루고 있는 것 중 일부분에 불과했다. 진짜 목수정은 그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특이성의 존재는 그 특이성의 의미를 모를 수 있다. 마치 해방된 주체가 그 해방감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아마 그 특이성의 의미를 되새겨본 기회가 정명훈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태도와 생각, 그리고 살아온 삶에 극단적 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말하진 않았지만,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보전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온 그에게 그 존재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비난은 고통스럽지 않았겠는가? 그의 처지에서 본다면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삶의 형식 ‘경계인’, 썩 괜찮은 선택

목수정 의견에 대한 반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도 이 문제를 회피하면서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의 반대자도 있다는 것, 그 반대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그의 자유로움을 지지한다. 삶의 형식으로 경계인은 썩 괜찮은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불안하고 두렵고 피곤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비난을 들을 수 있다. 정당한 비판과 비난을 구분해 전자만 취할 수 있다면 그는 일신우일신할 것이다.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의 문장은 에세이로 머물기에 자의식이 상당히 강하다. 물론 소설이 자의식의 장르는 아니지만, 허구형식을 빌릴 수 있다면, 그의 세계는 더 넓고 풍부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바람대로 소설가 목수정을 이른 시일안에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 내내 그는 늦여름의 녹음이 짙푸른 창가를 배경으로 앉아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와 그 배경은 잘 어울리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과거처럼 그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하지 않았다. 여행의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일까? 무심하게 변한 그의 표정처럼 그에게 다른 지혜의 창이 열리기 기대해본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랬듯이, 그 창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상을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이택광 교수
글 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문화학 박사.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다양한 문화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코드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지은 책으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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