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4:18 수정 : 2013.09.03 14:18

보수와 진보 모두 박정희-박근혜 두 부녀 대통령을 ‘한몸’이라고 여기지만, 두 사람은 출발부터 달랐다. 현실 정치인으로서 박정희의 성공은 우연인 반면 박근혜의 성공은 필연이었다.한겨레 자료
사람들은 그에게 모든 공로를 떠밀거나 책임을 떠넘긴다. 사실 한국인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매직 키워드’다. 찬양자들은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먹고산다고 말하고, 그가 물려준 폐해는 후임자들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비판자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문제를 그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의 성취는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를 둘러싼 시민들의 정치 평론은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 구전 설화의 대립이다. 심지어 연구자들조차 두 설화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박정희=박근혜 vs 박근혜=박정희

지금 우리는 ‘파더콤’(아버지 콤플렉스)을 떨치지 못한 듯한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맞이했다. 대선 과정에서 그녀는 경제민주화나 복지정책 같은 영역은 야권의 구호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거나 흡수하면서도, 유달리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그녀의 무엇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차라리 ‘귀태’(鬼胎)와 같이 그 아버지를 비판하는 말이다.

한편, 그녀보다 그녀의 아버지에 더 민감한 건 그녀의 정치적 적대자들도 마찬가지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던 진보주의자들은 두 사람이 사실상 ‘한몸’임을 밝히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와 박근혜의 차이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 이런 역설을 통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진보주의자는 ‘박근혜=박정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보수주의자는 그녀를 전적으로 신임하는 것 역시 그 등식 때문이라는 역설 말이다.

따라서 박정희와 박근혜의 ‘숨은 차이’를 말하는 것은 보수주의 측면에서도 진보주의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보수주의자 시선에서는, 비록 박정희가 ‘성공한 보수주의자’라 할지라도 지금 시대에 그것을 답습하는 것이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의 전략일 수 없으며, 더군다나 박근혜는 그것을 해낼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진정으로 이 시대에 적응하고 싶다면 말이다.

진보주의자의 시선으로는, 비록 박근혜가 ‘아버지’의 정치적 자산을 승계한 정치인이기는 하나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6공화국 헌법의 틀 안에 있는 대통령이기에 그녀가 행사하는 리더십에 대한 비판은 ‘독재자’에 대한 비판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시나 진보

주의가 관습화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넘어 이 시대의 진보적 과제들을 대면하고 싶다면 말이다.

꼼꼼히 따져 생각하면 이 부녀는 출발점부터 너무 다른 사람들이다. 생물학적 출발점을 봐도, 정치적 출발점을 봐도 그렇다. 한 사람은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축복받지 못한 아들이다. 그를 지우려던 어머니는 죄책감에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던 아버지가 전쟁 이후 군에 복직하고 인생이 풀리려고 할 때쯤 축복받으면서 태어났다. 그녀가 열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나라를 뒤엎겠다는 시도를 하고 그에 성공한다.

 

지극히 다른 부녀 대통령의 출발점

그 시도는 그 아버지의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박정희는 출발점에서부터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의 삶은 끝없는 좌절과 이를 극복해내기 위한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시골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많은 ‘시골 수재’가 그렇듯 기대한 만큼 공부에 재능이 없었고, 성적은 바닥이었다. 간신히 졸업하고 교사가 된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긴 칼 차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만주 육사 2기생으로 졸업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하고 관동군 소위가 될 때까지는 인생이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는 해방되고, 그는 실업자가 돼 다시 가족들의 눈총을 샀다. 공산주의자던 형 박상희가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사망한 이후 박정희는 남로당에 들어갔다, 여수·순천 사건(1948년 10월 19일) 이후 숙군(肅軍)수사(군부 안의 좌익 색출)에서 발각되자, 동지들을 밀고하고 목숨을 건졌다. 물론 형 집행을 면제받은 것뿐만 아니라 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한 건 만주국 인맥을 넘어 그 자신의 능력이 받쳐주었을 것이다.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은 청년 박정희가 다시 군인이 되게 하는 개인적 축복이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한윤형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한겨레21> <경향신문> <한국일보>에 칼럼을 쓴다. 단독 저서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2009), <안티조선 운동사>(텍스트·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어크로스·2013), 공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웅진지식하우스·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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