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1:54 수정 : 2013.08.07 22:20

김무성·김재원 의원은 새누리당 안에서 친박근혜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통한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친박’을 했다. 김무성 의원이 1951년생, 김재원 의원이 1964년생이니 나이는 13년 차가 난다. 이들은 이른바 ‘형님 문자 사건’의 주인공이다. 지난 6월 27일 오전 9시 35분, 김재원 의원이 김무성 의원에게 문자메시지를 한 건 보냈다. 전문이 길지 않으니 그대로 소개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6월 27일 국회 본회의 도중에 자신의 전날 최고중진회의 발언 유출과 관련한 문자메시지를 읽고 있다. 사진 아래는 발언 유출자로 지목된 김재원 의원이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이다.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굴종적인 문자

“형님 김재원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먼저 문자메시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최고중진회의에서 형님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발설자로 제가 의심받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맹세코 저는 아닙니다. 저는 그저께 밤 30년 단짝친구가 사망하여 수원 화장장 장례식에서 밤새 있다가 회의에 들어갔던 터라 비몽사몽간이어서 형님 말씀에 대한 기억도 없었습니다. 오후에 김동현 기자 전화가 찍혀 있어서 전화한 적은 있지만 ‘회의 중 깜빡 졸아서 아무 기억이 없다’고 말해준 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요즘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이었는데 이런 소문을 들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형님께서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이오니 혹시 오해가 있으시면 꼭 풀어주시고 저를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중에 시간을 주시면 찾아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등의 표현이 무척 굴종적이다. 문자메시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본회의장에서 김무성 의원이 휴대전화를 꺼내서 읽는 바람에 세상에 공개됐다. 본회의장 기자석에서 사진기자들이 망원렌즈로 휴대전화 화면을 포착한 것이다.

김재원 의원은 문자메시지에서 예고한 대로 이날 오후 본회의장의 김무성 의원 자리를 찾아갔다. 김재원 의원은 90도로 머리를 숙여 김무성 의원에게 절을 했다. 김무성 의원은 자리에 앉은 채 손으로 김재원 의원의 등을 토닥였다. 역시 사진기자들에게 포착된 이 장면은 ‘형님’ 문자메시지와 함께 완벽한 조폭영화 한 편을 구성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무성 의원은 전날인 6월 26일 아침 당사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 참석해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남경필 의원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국익에 부합했는지에 대해선 심각한 의문을 갖고 있다. 앞으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를 한 게 발단이었다. 평소 개혁 성향인 남경필 의원이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황우여 대표가 남경필 의원의 발언을 제지하려는데 김무성 의원이 버럭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우리를 뒤집어엎으려는 세력들이 우리랑 한판 벌이는데, 이번에 확실히 이겨서 싹 없애버려야지, 우리 편 안에서 절차 문제 제기가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그런 얘기 절대로 하지 말라.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다 입수해서 읽어봤다. 그 원문을 보고 우리 내부에서도 회의를 해봤지만, 우리가 먼저 까면 모양새도 안 좋고 해서 원세훈(당시 국정원장)에게 대화록을 공개하라고 했는데 원세훈이 협조를 안 해줘 가지고 결국 공개를 못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대선 당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3시쯤 부산 유세에서 그 대화록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부짖듯 쭈욱 읽었다.”

김무성 의원의 놀라운 고백은 몇 시간 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공개됐다. 김재원 의원이 보낸 문자메시지에 등장하는 김동현 기자가 바로 <프레시안> 기자다. 언론 보도에 당황한 김무성 의원은 “대선 당시 정문헌 의원이 제기한 대화록 내용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7년 11월 1일) 민주평통 행사 발언 내용을 종합해서 만든 문건을 연설에 활용한 것”이라고 해명을 내놓았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2012년 12월 14일 부산 서면 유세장에서 김무성 의원이 한 발언을 기자들이 찾아서 확인해보니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천권 쥐락펴락… 파리 목숨 C 의원들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불길이 박근혜 선거캠프의 정상회담 대화록 불법 입수 및 활용 사건으로 번지는 순간이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당황했다. 하지만 여권 내부의 관심은 발언 자체보다 김무성 의원이 비공개 회의에서 한 발언을 누가 <프레시안> 기자에게 알렸느냐로 쏠렸다. 범죄행위가 발각되면 밀고자를 찾으려는 것은 범죄집단의 공통적인 생리다.

김재원 의원이 김무성 의원에게 문자를 보내기 2시간 전인 6월 27일 아침 7시 26분 새누리당 원내대표실 당직자 문아무개씨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김무성 의원의 휴대전화에 도착했다.

“어제 대표님 발언을 유출한 사람은 김재원, 확인해준 사람은 서병수·이혜훈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김무성 의원의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 발언을 외부로 유출한 ‘범인’으로 지목된 김재원 의원이 김무성 의원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본회의장 의석까지 찾아가 머리를 숙인 것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김재원 의원의 행동은 좀 지나친 구석이 있다. 같은 국회의원인데 그렇게까지 굴욕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과의 거리는 김재원 의원이 김무성 의원보다 더 가깝다. 집권 여당 안에서 권력은 대통령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크다. 그런데도 김재원 의원은 비굴할 정도로 머리를 숙였다. 왜 그랬을까?

김재원 의원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과거 사건을 한 가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안강민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공천심사위원회(이하 공심위)를 꾸렸다. 공심위 인사들은 대부분 친이명박 성향이었다. 2007년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뒤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공천심사에서 박근혜 쪽 인사들을 챙겨줄 수 있는 인물은 전직 의원인 강창희 현 국회의장뿐이었다. 친박근혜 세력 처지에서는 답답한 일이었다. 더구나 강창희 공심위원은 너무 오랫동안 현역 의원 생활을 하지 않아서 공천을 신청한 친박 인사들을 거의 알지 못했다.

다급해진 친박 세력은 공천을 신청한 친박 인사들을 A, B, C 세 그룹으로 분류하는 문서를 만들어 강창희 공심위원에게 넘겨주었다. A는 반드시 공천받을 수 있도록 챙겨야 하는 인물, B는 노력하되 안 되면 할 수 없는 인물, C는 친박이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인물들이었다.

이 문서 작성을 총괄한 사람이 바로 2007년 경선 캠프에서 좌장을 맡은 김무성 의원이었다. 그런데 김재원 의원은 이 문서에서 C로 분류가 되었다고 한다. 이유가 뭐였을까? 친박 캠프 안에서는 그동안 내부 정보가 자꾸 언론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가자 누설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평소 기자들과 가까운 김재원 의원이 지목됐다. 그가 실제로 누설자였다는 증거는 없었다. 어쨌든 김재원 의원은 하위 등급으로 분류됐고, 실제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해 18대 국회에 출마하지 못했다.

정치인에게 낙선이나 공천 탈락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충격이다. 김재원 의원에게 ‘김무성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김무성 의원은 앞으로 새누리당의 대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황우여 대표의 임기는 내년 5월까지다. 김무성 의원이 2016년 4월 총선에서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김재원 의원으로서는 끔찍한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

하지만 김재원 의원의 설명은 좀 다르다. 김재원 의원은 나중에 기자들이 김무성 의원에게 왜 그렇게 굽신거렸느냐고 묻자, “영남에서 지역구 의원 하다 보면 다 그렇게 된다. 내가 원래 그렇게 숙여서 인사하는 습관이 있다. 그날 김무성 의원이 뭐라고 하니까 더 숙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발설자도 내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김무성 의원이 다른 누구를 지목했고, 근거도 얘기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공천 탈락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본래 영남 지역구 의원들끼리는 인사를 깍듯이 하는데 유출 혐의 때문에 조금 더 숙여서 인사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유별난 영남 의원들의 갑을 문화

진짜로 왜 그랬는지는 김재원 의원의 머릿속에 들어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영남에서 지역구 의원 하다 보면 다 그렇게 된다”는 김재원 의원의 말은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영남 출신 국회의원들은 다른 지역 출신에 비해 위계질서가 강하다. 권력 크기와 나이 차이에 따라 머리 숙이는 각도가 비례한다. 경상도 출신 정치인들끼리 충돌해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새누리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후신이다. 민자당은 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대구·경북의 민정당과 부산·경남의 통일민주당, 충청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친 정당이다. 이 가운데 민정당은 군사 문화가 지배하던 정당이다. 군 출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상명하복의 질서가 강했다. 통일민주당은 어땠을까? 통일민주당은 김영삼 총재 중심의 상도동계가 주축이었다. 김무성 의원이 상도동계였다. 상도동계는 의리를 무척 중시하던 정치세력이다.

상도동계의 의리 문화에는 내력이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뿌리는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다. 민주당에는 구파와 신파가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구파 소속이었다. 구파는 해방 이후 지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민당에서 민국당을 거쳐 민주당으로 이어온 세력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민주당 구파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다. 반면 민주당 신파의 대표적인 정치인은 장면 전 국무총리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민주당 신파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세형 전 의원은 그 시절에 정치부 기자를 한 사람이다. 그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민주당 구파와 신파는 문화가 많이 달랐다. 구파는 의리를 중시했다. 보스는 후배들에게 늘 두둑한 정치자금을 챙겨 줬다. 술을 마셔도 주로 고급 요정에서 마셨다. 흥이 오르면 옷 벗고 춤추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신 배신은 용서되지 않았다. 반면 신파에는 의리보다 명분과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보다는 논쟁과 토론을 즐겼다. 조세형 전 의원은 김영삼·김대중 두 정치인이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문화를 각각 정확히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아무튼 민정당의 군사문화와 통일민주당의 의리 문화가 합쳐지면서 민자당-한나라당-새누리당 영남 정치인들의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영남 출신 정치인들이 술 마실 때 후배가 선배에게 무릎을 꿇고 술을 받는 장면은 그리 낮설지 않다.

영남 출신이 좀 유별나기는 하지만, 정치인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지배와 굴종을 내용으로 하는 갑을 관계에 예속되어 사는 것은 다른 직종과 마찬가지다. 회사원이 승진이나 인사 권한을 갖고 있는 상사에게 굴종하듯이,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에 굴종하듯이, 정치인들은 공천권이 있는 사람에게 굴종한다.

총재가 정당의 공천과 인사를 좌지우지하던 시절, 국회의원이나 국회의원 지망생들은 총재에게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세 김씨가 지역을 할거하던 상황에서 정치인에게 공천 탈락은 곧 국회의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 김씨는 또 부총재, 사무총장, 대변인 등 당직이나 야당 몫 국회 부의장 등의 자리를 미끼로 정치인을 움직였다.

‘제왕적 총재의 폐해’ 여전한 정치판

1990년대 중반, 골프를 좋아하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에게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에서 나온 신제품 드라이버(티샷을 하는 긴 채)를 선물한 일이 있다. 김종필 총재가 그 골프채로 공을 쳤는데, 첫 홀에서 오비(공이 경계선 밖으로 나가는 것)가 났다. 김종필 총재는 화를 버럭 내며 드라이버를 그 국회의원에게 돌려주었다. 꼭 그 일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국회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 시절 정치인들의 굴종은 가족까지 비굴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까지 각 정당 총재나 대표, 계파 보스 등 유력 정치인들의 집에는 아침마다 식객이 몰렸다. 서열이 낮은 정치인이나 정치 지망생의 부인들이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돕는 경우가 많았다. 김장철에 김장을 돕거나 명절 때 음식 마련을 돕는 것도 물론 정치인 부인들의 몫이었다.

1990년대 중반 호남 지역구 공천을 희망하는 전직 국회의원 부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산 집을 자주 찾아가 이희호씨에게 인사를 했다. 어느 날 이희호씨가 욕실에서 목욕하고 나오는데 그 부인이 문 앞에 타월을 받쳐들고 서 있었다. 기겁을 한 이희호씨는 그녀를 쫓아보냈다. 지나친 아부를 싫어하는 이희호씨의 성품을 잘 모른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공천을 받지 못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정당에 제왕적 총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천권은 공천심사위원회가 갖는다. 그런데 공천심사위원회는 총선 직전 정당 안팎의 역학구도에 따라 구성원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로서는 당권 잡을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 모두에게 미리 잘 보여야 하는, 매우 골치 아픈 국면을 맞고 있다. 결국 김재원 의원의 ‘형님 문자 사건’은 이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의 산물인 셈이다.

글 성한용 <한겨레>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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