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5:32 수정 : 2013.07.05 11:45

김말해 할머니는 스물셋에 남편을 여의고, 두 아들을 홀로 키웠다. 얼마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 내외 얘기를 하다 목이 멘 할머니가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다.
지난 5월 20일 새벽 3시, 그녀가 눈을 떴다. 흰 안개와 검은 어둠이 뒤섞인 시간, 여명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어제 밭에서 무리한 탓인지 온몸이 뻐근하다. 그렇다고 지체할 수는 없다. 쌀독에서 쌀을 퍼서 밥을 안친 다음, 혼례를 앞 둔 새색시처럼 몸단장을 했다. ‘씽씽’ 밥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밥이 다 되었다는 알림이다. 물에 된장만 풀어 끓 인 된장국에 밥을 말아 간단히 허기를 채운다. 남은 밥으로 주먹밥 2개를 만들어 허리춤에 단단히 맨다. 대문을 나서기 전 재차 집안 구석구석을 살핀다. ‘내 기필코 막고 오겠습니더.’ 마치 종교지도자가 예배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다. 지팡이를 쥔 그녀가 대문을 나섰다. 109번 송전탑 부지까지는 얼마를 가야 할까. 어둠 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그녀 이름은 김말해. 세는 나이로 올해 여든여섯. 밀양시 상동면 도곡마을에 산다. 키 150cm에 몸무게는 40kg이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의 그녀는 이날 해가 온전히 떴을 때쯤인 새벽 6시가 넘어서야 송전탑 부지에 도착할 수 있었 다. 혼자서 몸조차 가누기 힘든 그녀는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3시간 가까이 굽은 산길을 돌고돌아 산 정상 문턱에 닿았다. “젊을 땐 산을 제법 탔다. 안 그랬으면 못 올랐을 기 다.” 해맑게 웃는다.

김말해 할머니의 저력(?)은 산꼭대기 송전탑 부지 앞에서 빛을 발했다. 평소 곧게 서지도 못한 그녀가 꼿꼿이 서서 송전탑 공사를 재개하기 위해 몰려든 수십 명의 작업 인부들을 훈계했다. 지팡이를 땅바닥에 탁탁 내려쳤다. “이 놈들, 네놈들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나는 여기 죽으러 왔다. 너 죽고 나 죽자”며 굵고 억센 남성들의 팔을 무장해제 시켰다. 온몸을 포클레인에 밀착한 채 쇠사슬로 묶고 뙤약볕 아래에서 한나절을 버텼다. 이 이야기는 밀양에서 화제로 떠올랐다. ‘90살 할머니가 산에 올라 송전탑 공사를 막았다’고 온 동네 소문이 났다(마을 사람은 말해 할머니의 나이를 애초 90살로 알고 있었다).


온몸 쇠사슬 묶고 ‘투쟁 전설’

밀양에는 말해 할머니처럼 70~80대 어르신들이 송전탑 부지에서 벌인 투쟁이 전설처럼 떠다닌다. 그러나 전설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다. 유서를 써놓고 산에 오르는 건 일반화된 이야기다. 젊은 사람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산길을 노구를 이끌고 오르내린 분들이 적잖다. 부북면 평밭마을 127번 송전탑 농성장의 할매들은 수치심을 감수하고 옷을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한전 인부와 경찰에 맞섰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송전탑은 안 된다!”면서.

지난 5월, 밀양은 요란했다. 송전탑 때문이다. 벌써 8년째 밀양 주민은 울산시 울주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와 경남 창녕군 북경남 변전소를 잇는 765kV 송전선로의 송 전탑 건설을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정치권도, 정부도, 심지어 언론조차도…. 그나마 그들의 싸움을 언급한다면서 ‘님비’(NIMBY·지역이기주의) 혹은 보상금을 더 타내기 위한 꼼수로 매도했다.

그런데 밀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송전탑 공사를 막는 밀양 어르신들의 절규가 눈물겹다 못해 처절하다. 이들은 “보상은 필요없다”며 “백지화만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한다. 1년여 만에 송전탑 공사가 재개된 5월 20일 이후 신문과 방송에선 연일 밀양 소식을 전했다.

이때 <나·들>은 한창 6월호 마감에 쫓기고 있었다. 그 즈음 안영춘 편집장이 기자들에게 제안했다.

“다음번 ‘나들의 초상’에 밀양을 등장시키는 건 어떨까? 8년째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하는 게 대단하잖아. 그것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유서를 써놓고 한다잖아. 그 보수적인 동네 밀양에서 말이야. 밑바닥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지네.”

밀양을 향한 진지한 성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사 재개 9일만인 5월 29일, 공사가 40일간 중단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행인가 불행인가? 적어도 7월 8일 까지 마을 주민과 한전과 경찰 사이의 극한 대립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주목한 건 사람이었다. 밀양에서 송전탑이 아닌 사람을 보려고 했다. 밀양 사람들의 삶, 농촌 마을의 평범한 농부의 아낙, 할매가 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찾아보기로 했다. 또한 오랜 기간 송전탑 투쟁을 이어오게 한 저력은 무엇일까. 우리가 알지 못한 또 다른 이유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리 시끄러운데… 송전탑은 오죽하겠노?”

6월 13일 오후 도착한 상동면 도곡마을은 10여 가구가 산등성이에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있고, 여수동 마을에서 20분 남짓 더 들어간 골짜기에 있었다. 전형적인 분지형 구조여서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절로 났다. 녹음이 우거진 산을 따라 조그마한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한적했다.

‘김말해 할머니를 어디서 찾는담?’

신상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름 석 자뿐. 말해 할머니를 찾으려면 마을 주민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집마다 들러 인기척을 확인했으나,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공사 중단을 맞아 농번기 밀린 농사 일을 하러 나간 거라고 짐작하지만, 난감했다. 한동안 막막하게 서 있는데 도로 건너편 밭에서 김을 매는 할머니 한 분이 보인다. 사진기자 선배가 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이리 오라고 내게 손짓했다. ‘아, 저분이구나!’ 순간적으로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말해 할머니를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 혹은 운명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아니, 나를 왜 찾노? 이 늙은이 찾을 일이 뭐가 있다고.”

“송전탑 아시죠? 할머니가 송전탑 공사할 때 온몸으로 인부들을 막았다고 들었어요. 지팡이 내려치면서.”

“아, 그거? 송전탑에서 죽으려고 했어. 그래서 올라갔다. 나 좀 죽여줘, 나 좀 죽여줘.”

“에이, 그런 말 마세요. 송전탑 반대는 왜 하시는 거예요?”

“이 소리 들리나? 윙~위~잉, 위~이~잉. 함 들어보소. 저 전봇대에 걸린 휴대전화 중계기에서 나는 소리야. 이것두 이리 소리가 큰데, 어찌 반대를 안 하겠누.”

소음이 상당했다. 매미 혹은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흡사했다. 잠시도 끊이지 않고 울어댔다. 전선도 요란하게 흔들렸다. 할매와 마을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이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보이소. 내가 살 수 있겠나? 밤에는 더 한다. 밤중에 깨면 잠을 더 못 잔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저렇게 큰데, 765kV 송전탑 소리는 얼마나 더 크겠노? 저건 한 줄이지만, 그건 전깃줄이 최소 수십 가닥이라카데.”

“내가 송전탑에 올랐을 때 죽지 못해 이꼴로 이러구 있다. 서울 갈 거제? 갈 때 나 좀 아무데다 버리고 가소. 내 인생은 와 이리 박복하노. 죽을 때까지 복도 없고,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

말해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죽음’ 앞에서는 노구도 어쩔 수 없는 건가.

“혼자 사세요?”

“응. 둘째 아들이 3년 전, 둘째 며느리가 지난 3월 갑자기 죽었어. 나 혼자야. 아들 내외가 참 잘했는데.”

아들 얘기가 나오자 감정이 격해진 듯 ‘꺼억꺼억’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일단 댁으로 모시고 가서 인터뷰를 이어가기로 했다. 흙을 털고 일어나는 할머니의 앙상한 뼈마디와 구부러진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산꼭대기를 오르기에는 벅차 보였다.

“지금까지 송전탑에 얼마나 올라가셨습니까?”

“네댓 번 갔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목숨인데 뭐. 기왕 죽을 거 송전탑 막다가 죽을 기라.”


“밀양 명물, 상동 반시도 없어질 끼다”

상동면 여수동 마을에 사는 57살의 농부 아낙 김영자씨의 평생 관심사는 땅과 마을, 가족뿐이었다. 고향인 상동면 고정마을에서 여수동 마을로 온 건 24살 때인 1980년이었다. 민주화 바람이 불었고, 광주라는 도시에서 폭동이 났다는 뉴스가 전해질 무렵이다. 가난한 집안 10남매의 8형제 중 다섯째 며느리로 시집와서, 30념 넘게 이 마을에서 살았다. 동네 사람들의 대소사를 챙기고, 마을 입구에 위치한 그녀의 농막에서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게 된 건 그녀가 이미 이 마을 터줏대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6월 12일, 이날도 농막엔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하우스 고추를 따야 하는 그녀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일하는 중간중간 대화가 이어졌다. 땅을 일군 이야기, 땅을 뺏으려 하는 한전, 송전탑의 부당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오갔다.

“가난한 남편 따라 왜 왔는지 아나? 다들 가난했고, 우리 부부가 열심히 일하고 살믄 되지 않겠나 싶었지. 남편이 참 착했다.” 영자씨 말에 옆에 있던 다른 아낙이 응수했다. “부지런히 일해서 땅뙈기 늘려가며 사는 게 우리 농부의 인생 아니겄나.”

영자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결혼 1년 만에 결혼반지와 예물을 팔았다. 현금 130만 원을 받아 시댁 빚을 갚아줬다. 하나도 속상하지 않았다. 30년쯤 뒤 번듯한 내 땅 가지면 되지, 그렇게 위안 삼았다.

30년 전에 비하면 영자씨네는 제법 살림이 폈다. 하우스 넉 동을 비롯해 벼농사, 감농사 등을 짓는다. 남매는 그녀의 기대만큼 잘 자라주었다. 더는 바랄 게 없다, 이만하면 성공한 것이라고 몇 년 전까지 생각했다. 아들을 장가 보내놓고 소일거리하듯 쉬엄쉬엄 농사지으며 남편과 오붓하게 여생을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8년 전부터 영자씨의 꿈이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밀양에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오는데, 하필 그녀 땅과 선산 주변을 지나간다. 그뿐인가. 상동역, 상동초등학교를 비롯해 상동 시내와 마을 중심에도 송전탑이 서고, 그 위로 송전선로가 지나간다. 마을 미관보다 더 걱정되는 건 전자파다. 당장 감농사를 망치게 될지 모른다. 마을 어른들이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자씨가 사는 마을은 ‘상동 반시’가 특산물이다. 자칫 특산물의 생산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 영자씨는 우리 일행에게도 상동 반시 자랑을 늘어놓았다.

“상동 반시 들어봤제? 이 동네가 산지로 유명하다. 우리 어릴 땐 동네에 감나무가 거의 없었어. 마을에 3~4그루 정도? 그런데 점점 감나무 심는 집이 늘었지. 지금은 감나무가 무지 많아.”

“아, 네. 상동 반시 정말 맛나죠. 질이 부드럽고, 당도가 아주 높잖아요. 생산지가 이곳이군요.”

동행한 사진기자가 적잖이 놀란 눈치로 화답했다.

감은 비교적 품을 덜 들이고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작물 가운데 하나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1년 수확으로 어르신들의 1년 생계를 소박하게나마 가능하게 하는 효자 작물이다. 나이 들어 논밭 농사가 버거운 어르신들이 대거 감농사로 갈아탔다.

“앞으로 상동 반시 못 먹을지도 모린다. 송전탑 때문이다. 저기 보이는 산 중턱에 나무들 보이제? 저게 다 감나무들이라. 주변에 송전탑이 서고 그 주위로 송전선로가 지나간다. 생각해보소. 전자파 주변에서 생산된 감을 누가 사고 누가 물라 하겠노?”

“모르면 사먹을 수도 있겠죠. 송전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생산됐거나.”

“에잇, 모르는 소리 마소. 감 열매가 안 열린다카네.

송전탑 주변에서는 전자파 때문에 벌과 나비 같은 곤충이 살 수 없습니더.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옮겨주는 벌이 사라지면, 감꽃도 피지 않고 감 열매도 맺지 않아예. 1년에 한 번 쳐야 하는 약은 또 어떻습니껴? 항공방제를 할 수 없습니더.”

영자씨 표정에 상동 반시의 생산 기반이 흔들릴까 염려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감농사로 근근이 노후생활하면서 지내던 마을 노인들이 불안해하는 건 이 때문임더. 자식한테 손 안 벌리고 밥 해먹고, 아플 때 병원 가고 약 지어 먹으려 한 건데 그게 사라지니까. 대출받으러 갔더니 재산 가치가 ‘0’이라고 하는데 억장이 안 무너지겠는교? 어른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도 이 때문이라예.”

 

“처음엔 몰른기라 송전탑이, 765kV가 뭔지”

“처음엔 몰랐지. 송전탑이 뭔지. 765kV가 뭔지. 내사 마, 여기서 농사지으며 그렇게 살아온 사람입니더. 송전탑이고 뭐고 암껏도 몰랐다 안 카나. 내가 뒤늦게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능교, 호호.”

손을 가리고 웃는 영자씨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다. 처음엔 송전탑이 집앞에 늘어서 있는 전봇대쯤으로 생각했다. 전자파의 위해성도 전혀 몰랐다.

“처음엔 왜 반대하나 했지. 나라에서 우리 잘 살게 해주려고 한다는데 말이야. 근데 알고 보니까 억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영자씨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송전탑 반대 관련 주민 설명회와 집회에 참석하면서 하나둘씩 중요한(?) 정보들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직선으로 가야 할 송전탑이 밀양 구간에서만 곡선으로 변경된다는 사실, 밀양을 지나는 고압 송전탑을 굳이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전자파가 마을에 엄청난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자씨는 그렇게 시골 아낙에서 투사가 되어갔다.

“무식한 게 용감한 기제. 나 믿는 건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다우. 얼마 전까지 내 몸이 미제인 줄 알았다우. 허리, 위장 모두 쌩쌩했어. 왜 옛날엔 미제가 가장 좋았잖아. 그다음이 일제. 하루 종일 손으로 모를 심어도 허리 한번 아프지 않았어. 남이 먹다 남은 것 아무거나 먹어도 속 뒤집어진 적 없고.”

“지금은 어떠세요?”

“완전 중국산 짝퉁이야. 온몸이 고장 났어. 얼마 전에 무릎을 다쳤는데, 바늘판 연골이 터졌다고 해서 수술했지.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 이제 좀 뒤뚱뒤뚱 걸을 수 있게 된 거제. 지금도 걸음걸이가 어색하긴 하제? 2003년 태풍 ‘매미’ 왔을 때 하우스 망가졌거든. 철근 나르며 다시 지으면서 허리는 고장 났고.”

“그런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송전탑 막겠다고 124번 철탑 부지인 산에 오르신 거예요?”

“분하고 억울하니까. 한동네에 사는 이승희 선생님(상동초) 같은 분이 송전탑 세우면 안 된다 하셨어예. 설명 들으니 진짜 안 되겠데요. 처음엔 동네 사람들 서명 좀 받고, 집회할 때 머릿수 채워주는 정도였지. 여자들이 어데 함부로 나서면 쓰나?”

“하하하. 암, 그럼요. 그런데 지금 감투도 맡고 계시잖아요? 상동면대책위 총무.”

“아, 그거. 그렇게 됐어예. 작년 이치우 어르신 돌아가시고 좀 시끄러웠거든. 한전은 몇몇 사람과 마을 대표들을 상대로 회유에 나섰고. 계모임할 정도로 친하던, (당시) 마을 대표들이 한전에 회유돼 그쪽으로 붙었어예. 내가 그거 따지러 다니고 대표 자리 내놓게 하고…. 생각해보소. 어케 가만있나? 그리고 이렇게 되었네예. 머, 내사 마 어릴 때부터 의리와 의협심이 남달랐어예.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어서 그렇지예, 호호. 부모님이 고등학교만 보내줬어도 내가 이러고 안 살 거인데. 아마 여군이 되지 않았을까. 하기사 내꼴을 보니 여군이 아닌데도 나라를 위해 고생하고 있기는 하네. 하하.”

영자씨의 주황색 티셔츠에 새겨진 ‘765kV OUT’ 문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영자씨는 올해 농사도 사실상 포기했다가 공사가 중단되면서 힘닿는 대로 지어볼 요량이라고 했다. 이날(12일)도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고추 따는 일에 여념이 없을 터였다.

“인터뷰 길게 해야 하나? 오늘 고추 꼭 따야 하는데…. 안 그러면 이것마저 다 망치는데.”

“보상금 많이 주면 송전탑 반대 안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에이, 아니라카이. 마, 돈도 뭐고 다 필요 없다 안 카나. 하늘땅만큼 돈을 가져다 줘도 소용 없대이. 보상금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카이. 그냥 이대로 살게 해달라는 거야. 백지화 말이야. 보상받을 거였으면 벌써 합의해줬지.”

“밀양을 거쳐 가는 송전탑이 장기적으로 전력 수급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그게 아니라니까. 송전탑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고. 전기가 수도권으로 갈 것도 아닌데 굳이 765kV가 필요 없지. 송전탑이 꼭 필요하면 지중화하라는 거지. 환경이랑 주민 재산 파괴하지 말고 말이야. 내사 마 양심 때문에 더 싸우는 거 아니가.”

“송전탑을 아예 세우지 말라는 뜻이죠?”

“그람. 나한텐 땅이 생명이고 전부라우. 땅 없으면 못 살제. 어떻게 일군 건데. 지난 30년 동안 죽도 아까워서 안 먹으며 산 세월이야. 주변에 있는 다른 어르신들도 다 마찬가지라구. 안 입고 안 먹고 악착같이 긁어모아서 일군 땅이라고. 다들 농사가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도시 사람들이 직장 잃으면 어떻겄수? 마찬가지요. 농부가 땅을 잃으면 어떨까 생각해보이소. 어르신들 실망감이 말을 못할 정도지.”

영자씨 이마가 잔뜩 일그러졌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했다. 영자씨가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하는 근원에는 ‘땅’이 있었다. 삶의 터전인 땅,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땅을 바라보는 마음이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같은 것 아닐까. 영자씨의 얼굴과 손을 차근차근 살폈다. 쓱쓱 손으로 빗어 넘긴 짧은 파마머리,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과 팔, 두툼하게 굳은살이 밴 손가락과 손바닥, 굵게 변한 손가락 마디…. 그렇게 영자씨는 30년 넘게 몸뚱이 하나에 의지해, 빈털터리에서 지금의 논과 밭을 일궜으리라. 그에게서 땅을 뺏는다는 건? 도시 직장인들이 당장 밥벌이를 빼앗기거나 집에서 쫓겨났을 때의 심정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예. 억만금을 갖다줘보이소. 꿈쩍도 안 할 낍니다. 마을 전체를 그대로 톡 떼어서 옮겨준다커먼 모릴까.”


“조상님 묘소 옆에…죽어서 어케 보노”

영자씨가 원하는 건 지금의 삶이 파괴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님비’라고 치부하기엔 복잡 다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송전탑 주변엔 필연적으로 전자파라는 부산물이 남는다. 마을에서 동물과 식물, 사람들을 쫓아낼 것이다. 결국 마을은 황폐화되고, 여수동이라는 마을이 흔적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영자씨는 그 최악의 상황을 염려하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힘없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늙어서 송전탑을 세우려 카는 거 아니겠능교? 재벌들, 도시의 잘사는 사람들한테 값싸게 전기 혜택 줄라꼬 우리 재산 뺏는 거 아이가. 혜택받는 사람 따로 있는 거 아이가. 송전탑, 택도 없는 소리 마소.”

말해 할머니는 17살인 1944년, 윗도곡마을에서 이곳 아랫도곡마을로 시집왔다. ‘괜찮은 사람 있다’는 친척 어르신의 말씀에, 남편 얼굴 한번 못 보고 혼인식을 치렀다. 남편은 살갑고 다정했으며, 성실했다. 무엇보다 말해 할머니를 극진히 대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6년 만인 23살에 홀로 되어 두 아들을 힘겹게 키웠다. 세 살 위 남편은, 그러니까 26살 때인 1950년 한국전쟁 직전 보도연맹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남편의 유해라도 찾았으면 좀 좋아.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와 잡혀갔는지도 몰라.”

말해 할머니는 매년 음력 6월 20일 남편의 제사를 지낸다. 지금도 그렇지만, 홀로된 여성의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더구나 남편이 그에게 남긴 재산은 논 두 마지기뿐. 그녀는 멋진 자개장롱을 갖고 싶었다. 농사 일 중간에 짬을 내어 삼베를 짰다. 목돈 모아 장롱을 사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그런데 6년 만에 장롱이 아닌 땅을 600평이나 샀다. 50년 봄의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남편은 그 땅에서 농사 한 번 제대로 못 짓고 세상을 떴다.

“내가 그 땅뙈기 안 팔아물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말로 다 못한다. 남편이 그리 허망하게 갈 줄 몰랐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남편이 보도연맹에 끌려갈 무렵 큰아들은 5살, 작은아들은 채 돌이 지나지 않았다.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시어머니도 남편이 행방불명된 뒤 석 달 만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녀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는 버거웠다. 땅을 팔아먹지 않고, 두 아이들을 키우는 것.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몸이 부서져라 일만 했다. “내가 그래서 이렇게 키가 쬐만한 기라.”

농번기에는 밤낮으로 농사 일에 매진했다. 짬이 나면 수십 리 품팔이를 다녔다. 농사보다 품팔이가 주업이 될 정도였다. 봄과 여름엔 산에 올라 쑥·냉이·고사리·씀바귀·민들레 같은 나물을 캤다. 할머니는 산 타는 데 귀신이었다. 맨발로 날렵하게 다녔다. 한번 나물을 캐면 한 태기(심마니들의 은어로, 산삼을 넣는 망태기)를 가득 채웠다. 겨울에는 땔감용 나무를 했다. 이때도 그녀의 등에는 둘째 아들이 업혀 있었다.

“장날 때마다 30리 넘는 산길을 걸어 나물을 팔았제. 산길 무서븐 줄도 몰랐어. 신발 살 돈이 아까봐서 맨발로 다다. 오죽하면 굳은살이 하도 배겨 밤송이에 찔리도 끄떡없을 정도였지. 이불도 없이 살았어. 겨울에는 60kg까지 나무를 머리에 지고 시장에 내다 팔았지. 이웃 마을인 고답까지 나무 나르는 일도 숱하게 했지. 태기에 나무 150근씩 들어가는데, 당시엔 그 정도 이는 건 암것도 아니었어.”

“그 뒤로 호강할 일만 남았겠네요.”

“그럴 줄 알았지. 근데 이게 뭐꼬. 남편, 아들 먼저 보내고. 이제는 집과 산 주변에 송전탑이 들어온다카네. 어떻게 지킨 집과 땅인데. 국가가 우리 같은 국민을 위해 있다고? 에이, 그런 새빨간 거짓말하지 마. 남편 죽이고 이제는 땅까지 뺏을라카네. 그나저나 죽을 날 얼마 안 남았는데, 조상들 어케 보노.”

설계대로라면 송전탑은 말해 할머니의 선산과 밭을 지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마침 감나무에 약을 치러 할머니댁에 온 대구 사는 큰아들 전희도(68)씨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우리 어머니만큼 고생한 사람은 없을 깁니다. 남한테 해 한번 끼친 적 없고, 부지런히 살아오신 분인데…. 아이고 불쌍해서 어쩝니까. 저 몸으로 송전탑에 굳이 올라가십니다. 말려도 소용없어요.”

“송전탑 세우는 인근에 조상 묘지가 있나요? 그래서 어머님이 더 반대하는 것 같아요.”

“네, 맞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벌초하러 가보니 조상 무덤 인근에 철탑이 들어선다고 이장하라는 말뚝이 있더라구요. 어머니께서는 그 얘기를 듣고 식사도 못하셨어요. 이거 막지 못하고 죽어 조상 낯을 어떻게 보느냐고 한탄하셨어요.”

말해 할머니는 15년 전 번듯한 일층 슬레이트 집을 지어놓고도, 대문 옆 2평 남짓 남루한 사랑방에서 쓸쓸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사랑방에 놓인 살림이라곤 오래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서랍장이 전부였다.

“혼자 사는데 뭐. 이것도 감지덕지지. 그동안 내가 살아온 거에 비하믄 말이야.”

한 달 전기요금으로 얼마를 내는지 여쭤봤더니 “모른다”고 했다. 이렇다 할 가전제품도 없는 2평 방 안에서 쓰는 전기가 얼마나 될까 싶었다. 말해 할머니는 765kV 송전탑을 이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마당 한쪽에 고사리가 말라가고 있었다. 최근에 뜯은 듯했다.

“지금도 산에서 나물 캐서 내다 파세요?”

“하모, 장날 버스 타고 나가 팔지. 집에서 가만있으면 뭐하노. 그런 돈으로 빚 갚은 거지. 요샌 담뱃값하지.”

말해 할머니는 송전탑 공사가 없는 날엔 주로 밭에서 일한다. 김을 매고 또 매서 할머니 밭은 관리가 가장 잘된 밭으로 꼽힌다고 했다. 말해 할머니에게 땅은 남편 같고, 자식 같은 것이었다.

 

“이분들은 그냥 이대로 살고 싶은 겁니다”

밀양은 보수적인 동네다. 이곳에 오기 전, 밀양 송전탑 전문가협의체 일로 서울에 온 이계삼 밀양송전탑대책위 사무국장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밀양 사람들이 원하는 건 ‘지금 이대로 살고 싶다’입니다. 전통과 가부장을 중시하는 이들은 선산의 훼손과 파괴를 조상에게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여깁니다. ‘돌아가서 뵐 면목 없다’고 탄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격렬하게 싸우는 마을일수록 외부와 교류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그만큼 마을 공동체가 끈끈합니다. 그래서 똘똘 뭉쳐 송전탑 반대에 나설 수 있는 겁니다. 밀양은 특히 마을과 이웃, 땅과 선산, 조상을 위하는 소명의식이 강합니다.”

송전탑이 들어서는 부지는 밀양 어르신들에게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산인 경우가 다수다. 영자씨나 말해 할머니, 70~80살이 훌쩍 넘은 어르신들이 유서까지 써가며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조상의 터전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이 크다. 이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 2~3시간 걸어 산에 오르고, 뙤약볕 아래서 온몸을 쇠사슬로 감은 채 포클레인 앞에서 공사를 막는다.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자존심인 알몸을 드러내기도 했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조상 뵐 때 죄송하지 않으려고 더 열심인 거죠?”

“글타, 철탑 못 막으면 철탑 안고 죽을 끼다. 그리고 어른들께 무릎 꿇고 사죄해야지. 산을 전부 톡 떼어서 다른 지역에 옮겨주지 않는 한 이 마을에 송전탑이 들어서지 못하게 할 끼다. 차라리 철탑 밑에 들어가 죽을 끼다. 못 배웠지만 사람의 도리가 뭔지 내도 다 안다.”

지금은 송전탑 건설을 막고 있지만, 말해 할머니는 시골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호롱불을 너무 힘들게 썼거든. 기름을 구하기도 벅차서 켜지 않은 날도 많았고.”

기름병이 없어 호롱불을 들고 시장에 기름을 받으러 다니는 날이 허다했다. 그나마 기름을 채워넣을 수 있는 날은 다행이었다. 그날은 아들이 중요한 숙제나 시험공부할 때였다. 평소에는 기름 살 돈이 없어서 경상도에서 집안 대소사 음식으로 즐겨 먹는 돔베기(상어 고기)의 간을 얻어다 기름을 짜서 불을 붙이거나, 간솔(소나무 진액이 나온 가지)을 불쏘시개로 써서 방 안을 밝혔다.

“전기 없을 때는 어둑해지면 그냥 자는 거였지.”

“전기가 들어와서 어땠어요?”

“아들들이 가장 좋아했지. 내사 뭐….”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을 때는 마냥 좋으셨죠?”

“그랬제. 이만큼 좋은 세상도 다 있다 깜짝 놀랬데이.”

영자씨 마을에선 전기 들어오는 날 마을 잔치를 거하게 했다.

“전기 들어와서 좋았던 거, 그거 말도 못하제. 그게 초등학교 4학년 때던가(정확한 시기는 기억하지 못했다). 호롱불에 앞머리 태워먹고, 코밑 새까매지고 해서 내가 호롱불을 을매나 싫어했는데. 처음엔 마을 어른들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뭐, 전기 들어오는데 피해 보는 사람 있을 줄 상상이나 했나. 천지가 개벽한 줄 알았지. 가장 좋았던 건 잠자리에 들 때 안 무서웠던 거. 요강에 쉬하러 갈 때 편리한 거지. 텔레비전 있는 집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서 드라마 <여로> 본 기억도 생생하네.”


“이젠 내가 빨갱이네… 송전탑 밑에서 죽을 기다”

전기가 몇십 년 만에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쳐들어왔다. 그리고 나이 들어 영자씨의 일상과 사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바꿔놓았다.

영자씨는 방송이라면 , 신문은 <조선일보> 밖에 모르고 평생을 살아왔다. 오랜 기간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국가 주도의 개발정책을 신봉한 그녀가 이런 신념을 과감하게 버렸다. 정부와 여당이 약자 편에 결코 서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아버렸다.

“전에는 정부 정책 반대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인 줄 알았제. 나라가 한다는데 왜 막나 했지. 근데 내가 지금 그러고 있는 꼴이네. 웃기지? 남편이 민정당 시절 동 책임자를 10년 이상 했어. 몇 년 전까지 난 민주당 사람들도 빨갱이인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내가 무슨 일을 했는 줄 아나? 민주당 후보 선거운동을 했어. ‘밥 처먹고 할 일 참 없다’ 혀를 찼는데, 내가 그 일을 한 기라. 여자가 설치고 나서면 안 된다 는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잖아. 악법 고쳐보겠다고 말이야, 아휴.”

영자씨는 밀양을 찾아오는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본다. 이제 사회적 약자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쌍용자동차 해고자, 한진중공업 노조원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분개한다. 지금은 이들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올해 초에는 두 번이나 직접 현대자동차와 쌍용자동차 고공농성 현장, 한진중공업과 유성기업에 찾아가 투쟁하는 이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영자씨는 송전탑을 볼 때마다 죽음을 각오한다. 그의 농막 한쪽엔 시너를 나눠 담은 500㎖ 생수병 2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내사 마, 송전탑 공사하믄 그 밑에서 죽을 기라예. 이제 뭐, 죽어도 여한이 없꼬.”

그는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산에 오를 때면 이 생수병들을 허리에 감는다. 송전탑을 막고야 말겠다는 영자씨는 “송전탑 오를 때면 항상 이 기름병 두 통을 허리에 묶는다 아잉교. 이제 죽어도 여한 없어예.”

“설마 죽음도 각오했다, 그런 건 아니시죠? 아직 젊으시고, 아들 장가도 보내셔야죠.”

“그것보다 중요한 기 자식들한테 부끄럽고 비겁한 엄마로 남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껴? 엄마가 양심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 그것만 알아주면 족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고, 마을과 땅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아이들도 알고 있어예. 내 자식들이면서 나라의 자식 아닝교…. 나 없어도 이 나라가 잘 돌봐주겠제.”

말해 할머니는 요즘 담배를 달고 산다. 하루 두 갑, 건장한 체력의 남성도 버거운 양이다. 연신 줄담배다. 그것도 어디서 구했는지 지금은 시중에서 구하기조차 힘든 그 독한 ‘솔’ 담배를 목구멍 깊숙이 빨아들인다.

“내가 복이 없고, 팔자가 더러워서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어.”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담뱃불을 끄기가 무섭게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내가 속이 타서 그래. 송전탑만 생각하몬.”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셨어요?”

“27살 때부터. 심한 배탈(?)을 앓았는데, 회충 때문이었어. 배가 점점 불러오대. 그 시절엔 회충약이 없었지. 담배를 피우거나 휘발유 기름을 마셔서 죽였지. 나두 그랬어. 죽는다 했는데, 살았어. 사실 그때 죽어야 했어….”

“송전탑 반대하러 산에 얼마나 올라가셨어요?”

“아니, 왜요?”

“내 인생이 참 기구하고 박복해서. 남편 먼저 보내고, 그 뒤 아들 며느리 보내고. 이제는 조상 무덤 앞에 송전탑까지 세우게 되었네. 내가 죽으면 해결될랑가….”

“언제가 가장 행복하세요?”

“손주 생각하고, 땅 밟고 있을 때가 그렇지. 당연한 거 아니가. 내 전부인디.”

“전부요? 목숨을 걸 정도로 말인가요?”

“아까도 말했잖소. 거기서 죽을 기라고. 땅을 잃으면 나도 없는 기라. 내가 남편도, 자식도 못 지켰다 안 카나. 땅은 지키고 말기다. 지금껏 생고생 하면서 안 팔아먹고 지킨 땅이라구.”

“밀양 어르신들이 송전탑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있을까요?”

“나랑 마찬가지겄제. 처음엔 나처럼 나랏님이 하는 일인데 막으면 되겠냐 했지. 지지난해던가, 농사 지으려고 큰아들이 대출받으러 갔어. 거절당했지. 송전탑 예정지여서 담보 물건이 안 된다고 했어. 재산 가치도 없다는 뜻이겄제. 다른 사람들도 사정이 비슷혀. 그래서 더욱 송전탑을 막겠다고 하는 거제. 자식에게 손 안 벌리고 살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 휴짓조각이 됐는데 가만있을 수 있겄어? 땅은, 재산은 자식들한테 물려주고 말고 할 게 아니여. 조상에게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니께 고스란히 지키다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 거지.”

“조상 볼 면목이 없으신 거군요.”

“철탑 못 막으면 철탑 안고 죽을 거야. 돈을 하늘 땅만큼 줘도 안 된다. 조상이 누워 쉬고 계신 곳을 어찌 떠나노. 내는 학교도 안 다녔고, 글도 모른다. 그래도 예와 도리는 안다. 조상의 묘를 지키고, 조상의 뜻을 섬기는 게 인간의 도리라는 거 말여.”

말해 할머니의 입에서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3년 전쯤 직접 지었다는 ‘한탄가’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노래 지은 시기가 밀양에서 송전탑 투쟁이 본격적으로 일던 시기와 맞물린다. 오죽하면, 오죽하면 그랬을까.

말해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덕석구비 밟았는가/ 굽이굽이 속 다 썩고

말고기를 먹었는가/ 말마디마다 속 다 썩고

닭고기를 먹었는가/ 달달이도 속 다 썩고

물고기를 먹었는가/ 물무리도 속 다 썩고

죽순나무 먹었는가/ 마디마디 속 다 썩고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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