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3 17:40 수정 : 2013.07.05 19:17

‘대낮, 학교, 교수와 남녀 생도 37명, 소주 30병, 캔맥주 72개, 그리고 성폭행.’

지난 5월 22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는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생도의 날’을 맞아 교수와 생도들이 교정 잔디밭에 모여 앉아 술판을 벌였다. 여자 생도가 폭탄주 10여 잔을 마신 뒤 만취해 힘들어하자 남자 생도가 생도관으로 따라가 등을 두드려주다 자신의 방에서 성폭행했다는 게 사건의 뼈대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육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이다. ‘절제’와 ‘규율’, 그리고 무엇보다 ‘명예’다.

육군은 사건 뒤 이름도 거창한 합동조사단을 꾸려 감찰조사를 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생도대에 지문 인식 스크린도어를 설치한단다. 성폭력 예방 교육은 물론 이성 교제와 음주에 관한 규정을 개선한다고 밝혔다. 이성 교제와 음주는 사관학교의 오랜 규율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삼금’(三禁) 제도와 연결돼 있다. 삼금은 재학 기간에 음주, 흡연, 약혼·결혼을 금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육사는 성폭행 사건 이후 여성 생도 방에 지문 인식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는 육사가 더는 ‘명예 공동체’가 아님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서울 공릉동 육사 교정인 화랑대 정문.
술에 취한 ‘금주’ 조항… 현실과 너무 먼

내가 보관하고 있는 1994년판과 마찬가지로 2013년판 <육사 요람>은 삼금 제도의 뿌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1952년 1월 진해에서 육사가 재개교되어 11기생이 입교하면서부터 도입된 제도이다. 금주, 금연, 금혼의 금욕생활을 통하여 극기력과 자제력을 배양한다는 것이 이 제도를 도입한 취지였다.” 흥미로운 것은 삼금 가운데 금연과 금혼은 이제껏 변화가 없었지만, 유독 금주 조항은 때마다 요동쳤다는 점이다. 폭탄주와 삼금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육사 요람>을 보면, 1961년까지는 4학년 생도만 2학기부터 ‘장교의 초대하에’ 음주가 가능했다. 1962년 이 조항은 삭제됐고, 1964년부터 모든 생도는 ‘가정의 관혼상제, 직속상관으로부터 초대받았을 때, 교장 허락 시에만 술을 마실 수 있다’고 명시했다. 1968년에는 ‘직속상관이 승인하고 훈육관이 입회하는 경우’로 제한됐다. 훈육관은 생도들을 관리·통제·교육하는 장교다. 이듬해 또다시 규정이 바뀌어 ‘4학년 생도에 한해 직속상관 입회하’로 축소된다. 1974년에는 해당 단서 조항을 ‘입회’에서 ‘승인’으로 완화했다가 1979년 들어 ‘가정 내에서 어른이 권하는 경우’로 확대되고, 1982년에는 ‘생도대장(준장) 또는 교장(중장)이 허락하는 경우 소량의 음주가 가능하다’로 다시 제한 규정이 강화됐다.

이후 음주 관련 규정은 변화가 없다가 2003년 들어 2학년 이상 생도들에게 ‘부모 주관 가족행사 및 관혼상제, 장관급 장교 주관 행사, 훈육관 및 지도교사 주관 행사 시에 음주가 가능’하도록 느슨해졌다. 2005년에는 음주 허용량을 ‘생맥주 1000㏄, 소주 1홉’으로 명시하고 ‘학교 복귀 당일에는 음주할 수 없다’고 단서 조항을 늘렸다가 2009년 삭제했다. 육사 생도의 금주 조항은 뚜렷한 원칙 없이 그때그때 ‘강화-완화’를 넘나드는 식으로 운영해온 것이다. 금주 조항 자체가 술에 취한 듯 ‘갈 지(之)’ 자로 비틀댄 셈이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규정보다 더 심각한 것은 금연과 달리 금주 조항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금주 조항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 사관생도는 사전에 승인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음주할 수 없다. 1) 사관생도는 교내에서는 교육 및 훈육 목적상 필요 시 장관급 장교, 지도교수·학과장, 훈육관이 주관하는 행사에서 음주할 수 있다. 2) 2·3·4학년 생도는 교외에서 훈육관(통화 불가 시 당직사령)에게 보고 후 음주할 수 있다.”

학교 밖에서 술 마실 때도 사전에 승인받도록 돼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육사의 역대 금주 조항 가운데 가장 엄격한 시절(1994년)에 생도였던 기자의 경우에도 외출·외박·휴가 때 친구나 가족과 술을 마시면서 미리 학교에 보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보고해야 하는 규정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금주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문화 규정’이라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금주 조항에서 준수 사항 항목을 보면, 이 조항은 지켜질 수 없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나. 준수사항. 1) 음주를 할 경우, 사전에 훈육관에게 보고를 한다. 2) 음주를 한 경우에는 24시 이전에 숙소에 복귀하여, 훈육관(당직사령)에게 보고한다. 3) 음주 후 숙소 복귀 시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4) 교외에서 음주는 사복 착용 시에 가능하다.”

 

새 생도관에 미용실… 1998년 여생도 첫 선발

성폭행 사건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전역한 박남수 교장의 뒤를 이어 지난 6월 17일 취임한 고성균 교장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모두 ‘잘못된 줄 알면서도 똑같은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로 의존성에서 탈피합시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잘못된 제도와 문화 혁신을 통해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역량을 결집해 나갑시다.” 교장이 금주 규정을 어떻게 손볼지 지켜볼 일이다.

육사 생도 성폭행 사건 뒤 육군이 내놓은 개선책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게 지문 인식 스크린도어 설치안이다. 한마디로 졸속 미봉책일 뿐이다. 왜 그런가.

1994년은 지금의 생도대 건물이 완공돼 생도들이 집단 이사한 때다. 예산 375억 원을 들인 현대식 건물이었다. 내가 입학할 때까지 생도들은 1971년 12월 지은 낡은 생도관을 쓰고 있었다. 그해 4월 27일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새 생도관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서던 일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최신식 4층 건물에다 푸른 기와가 얹혀 있어 생도들이 ‘작은 청와대’라고 농담 삼아 부르기도 했다. 당시는 여자 생도를 모집하기 전이어서 생도관은 사실상 ‘금녀의 집’이었다. 그런데 4층에 이상한 곳이 있었다.

챙겨온 개인 물품을 다 부리고 난 뒤, 생도관 건물을 둘러봤다. 전체가 ㄷ자 구조인 생도관은 가운데 식당 건물(지하에는 목욕탕 등이 있었다)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건물이 늘어서고 가운데에 잔디밭이 있는 구조였다. 4층에 올라가봤더니, 음악감상실이 눈에 띄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LP판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같은 층에 미용실이 있었다는 게 그때도 참 신기했다. 동네 미용실에서나 보던 의자와 거울 등이 이미 들어서 있었다. 선배 생도에게 물었더니 “앞으로 여자 생도를 뽑는다더라. 그래서 시설을 미리 갖춰놓았대”라는 답이 돌아왔다. 좀 어리둥절했다. ‘사관학교에 여자가?’ 사관생도들이 교내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식당 영양사가 여성이었는데, 사관생도들에게 인기 최고였다.

여자 생도가 어색한 건 사관학교의 자치근무제도 때문이다. 육사는 한 학년당 평균 250명 안팎으로 모두 8개 중대로 나뉘어 편제돼 있다. 훈육관은 일종의 감독관일 뿐 기본적으로 생도관 생활은 생도들의 자율적인 통제로 이뤄진다. 군부대 체제와 다를 게 없다. 여기에 중대마다 상징을 살린 별칭이 있는데, 내가 있던 2중대는 ‘재구 2중대’였다. 1965년 베트남전 파병부대 중대장으로 복무하다 수류탄 투척 훈련 도중 부하 병사의 실수로 떨어진 수류탄에 몸을 던져 숨진 이가 강재구 대위(소령으로 추서)였다. 그가 사관생도(16기) 시절 2중대 중대장 생도던 것을 기려 재구 2중대라는 별칭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스크린도어 대책 졸속… 자치문화 허무는 일

여자 생도가 들어온다면 자치근무 편제에서 어떻게 수용될지 나로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대마다 여자 생도를 1명씩 배치하는지, 아니면 아예 여자 생도만 별도의 중대로 꾸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육군에서는 남자 생도들이 무시로 여자 생도들의 방을 드나드는 것을 막고, ‘허락’된 이들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지문 인식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겠다는 발상을 꺼내든 모양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1994년 1월 육사에 가입교해 5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그해 2월 말 입학식을 치르고 정식 육사 생도가 되었다. 이후 2중대에 배치받아 ‘고난의 1학년 생도’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흐릿해졌지만, 사관학교를 그만둔 뒤 10년 가까이 나를 괴롭힌 꿈이 있다. 특히 선배 생도가 생활관 문을 벼락같이 열고 들어오는 장면은 꿈속에서도 등골이 서늘했다. 극도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이었다. 선배 생도의 생활관 방문은 곧 지적과 벌점, 칼날 같은 교육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보통의 군부대에서 매일 저녁 벌어지는 점호 풍경이 사관학교에서는 수시로 이어졌다. “귀관, 생활관 정돈 상태가 왜 이리 엉망인가!”로 시작되는 선배 생도의 고함은 등줄기에서 저절로 땀이 흐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자 생도 방을 남자 선배 생도가 이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면? 그것은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여자 생도들을 (남자 생도에게서!)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제대로 된 자치근무제도, 곧 선배 생도들의 후배 생도 교육이 불완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배 생도들의 갑작스런 ‘출몰’은 그 자체로 후배 생도들이 언제 어디서든 정갈한 생활 태도를 유지하게 한다. 사관생도 하면 연상되는 올곧은 이미지는 이런 엄정한 일상에서 체화되는 것이다. <육사 요람>은 자치근무제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생도들은 이러한 자치 지휘근무 제도 속에서 (…) 장차 정규 장교로서의 임무 수행에 필요한 자율정신과 지휘 통솔력을 함양하게 된다.” 스크린도어를 설치해 출입을 막으면 성폭행 사건이 과연 사라질까? 해답은 따로 있다.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육사는 1995년 생도 훈육을 강화한다며 중대마다 1명씩 배치하던 소령급 훈육관 외에 대위급 훈육장교를 추가했다. 1998년엔 여자 생도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3년 5월 통합 훈육체계 발전위원회를 설치해 학년별로 ‘복종’(1학년), ‘자율’(2학년), ‘모범’(3학년), ‘지도’(4학년)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 바탕에는 명예교육의 알짬을 담은 ‘사관생도 신조’가 있다.

“하나,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둘,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셋,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엄격한 인격과 능력을 요구하는 사관학교에서 성범죄가 터졌다는 것은 결국 명예교육의 총체적 실패를 뜻한다. 명예시험이라 해서 감독관 없이 생도들이 자율적으로 시험을 치르고, 부정행위를 하면 그 즉시 퇴교 조처되며, 부정행위를 하는 생도를 목격한 또 다른 생도는 ‘양심 보고’ 제도에 근거해 스스로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명예로운 제도’를 갖춘 곳. 그곳에서 대낮에 잔디밭에서 폭탄주가 오갔고, 그 결과 참담한 범죄가 일어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부끄러운 언행을 했다고 스스로 느끼면 스스럼없이 완전군장을 꾸려 메고 생도대 광장을 돌던 선배 생도들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소위 임관을 몇 달 앞둔 4학년 생도가 교내에서 삼금 가운데 하나인 금연 규정을 어기고 담배를 피우다 적발된 일도 있었다. 그 선배는 당연히 퇴교당했다. 명예제도는 단 1㎖의 ‘누수’도 허용하지 않았다.

스크린도어를 설치해 남녀를 인위적으로 가르는 것은 그 자체로 사관학교가 더는 ‘명예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육사 또한 온갖 파렴치한과 성실한 사람들, 착한 마음과 더러운 욕망이 공존하는 길바닥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공표하는 행위다. 만약 진실로 그러하다면 삼금 제도부터 서둘러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려야 할 일이다. 삼금 제도와 스크린도어는 형용모순이다. ‘시민 학살의 원흉’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관생도들의 사열을 받게 하는 현실에서 육사의 명예교육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성폭행 사건은 생도들의 자율적 판단과 절제보다 규율에 복종하는 수동적 인간으로 훈육한 결과일 것이다. 교장 1명 바뀐다고 문제가 치유되거나 명예가 되찾아지지 않는다.

성폭행 사건 뒤 5월 31일자로 발간된 <육사 신보> 550호에는 ‘정예장교 양성 아키텍처 6대 학습 중점’이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사건 이전에 기획된 기사일 테지만, 여기엔 공교롭게도 이런 대목이 있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한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내적 양심의 자신을 의식해야 한다. 이와 같을 때 사관생도는 도덕적 진실성을 지키며 자신을 절제하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표현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명예교육의 실패를 통렬하게 반성하고 철저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육사 신보> 기사는 헛소리로 추락하고 스크린도어를 넘나들며 또다시 ‘사건’은 터질 것이다.

글 전진식 <한겨레> 사회2부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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