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3 15:58 수정 : 2013.07.04 14:26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원전 건설 반대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생태도시 전문가 위르겐 하르트비히.
“나이(NAI)!”

1975년 독일 남서부 끝자락에 자리 잡은 프라이부르크시에서는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1968년부터 활성화된 학생운동 세력이 시위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위대 대부분은 포도를 재배하는 농민이었다. 독일어로 나인(Nein)은 ‘노’(No)라는 뜻이다. 나이(NAI)는 ‘나인’을 뜻하는 지역 사투리다. 농민들은 “나이”를 외치며 절규했다.

이 지역은 원래 풍부한 일조량에 힘입어 와인과 목재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당시 독일 정부는 프라이부르크 근교의 마을 빌(Wyhl)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으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농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원전의 위험성을 인식해서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원전 건설이 인근 지역 주민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포도 재배를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저지’에 나섰다.

결국 계획은 백지화됐다. 프라이부르크의 원전 건설 반대운동은 점차 친환경도시를 건설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농민들이 ‘나이’를 외치던 때로부터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프라이부르크는 세계의 ‘환경수도’로 불리고 있다. 포도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을 주던 ‘풍부한 일조량’은 태양에너지를 만드는 데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시에는 410km에 이르는 자전거 도로가 깔려 있고, 주택가에서는 자동차의 주행 속도를 시속 30km로 제한했다. 프라이부르크 도심에서 약 4km 떨어진 보방 생태마을 인근의 헬리오트롭(Heliotrop·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건물이 회전하는 주택)은 도시의 명물이 됐다.

이 도시의 변신은 어떤 경로로 가능했던 걸까. <나·들>은 지난 6월 13일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온 위르겐 하르트비히(56·푸투어 공동대표)를 만났다. 하르트비히 대표는 시민의 환경 교육과 프라이부르크를 찾는 탐방객의 그린 투어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전날 서울시청에서 열린 ‘2013 한·독 도시교류 포럼’(희망제작소·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 등 공동 주최)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밀양 송전탑을 두고 지역 주민과 정부가 갈등을 겪고 있다. 하르트비히 대표는 인터뷰 내내 밀양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가 <나·들> 기자와 함께 밀양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 인터뷰에는 함께 포럼에 참석한 마티아스 코숄(59) 콧부스공대 교수(브란덴부르크)도 배석했다.

나·들 1970년대 원전 건설 반대운동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하르트비히 2만7천 명의 농민이 모였습니다. 경찰이 600명 출동했고요. (현재 프라이부르크 인구는 21만6천 명이며, 이 가운데 당시 2만9천 명이 학생이다. 따라서 당시 2만7천 명은 꽤 큰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시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시위가 벌어진) 광장을 내려다보며,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상부에 보고했다고 합니다. 시위 규모가 무척 컸음을 알 수 있죠. 시위 참가자들은 그 어떤 폭력도 없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원전 건설에 반대했습니다.

나·들 농민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르트비히 분노가 촉발된 데는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포도를 재배할 때 알맞은 온도와 습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인근에 원전이 건설되면 이런 자연 조건이 훼손돼 포도 재배가 어려워집니다. 별도로 습도 조절 등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농민들의 우려가 깊어진 겁니다.

하르트비히 대표는 “당시 정치인들의 ‘협박’에 가까운 발언이 지금까지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스 필빙어 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는 “원전을 이곳에 짓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불빛이 없어질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바덴뷔르템베르크는 프라이부르크가 속한 주다. 농민들의 원전 건설 반대 움직임이 가장 거세게 일어났을 무렵이다.

하르트비히 대표는 가끔 슈투트가르트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필빙어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당시 발언을 떠올린다고 했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거든요.(웃음)”

이 대목에서 <나·들> 기자는 전력 수급 대란을 막으려면 밀양 송전탑으로 신고리 원전 3호기의 전력을 송전해야 한다는 한전의 주장이 떠올랐다.

프라이부르크 농민들의 시위는 그럼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휴대전화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 그들은 교회 종을 치면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면 종을 쳐서 알려 특정 장소로 모이게 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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