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1 13:51 수정 : 2013.06.12 10:47

2006년 6월 1일. 하루 전 서울에서 가져온 이삿짐을 전남 구례군 구례읍 사글셋방에 풀고 난 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집사람이 자네 하라고 택지 쪽에 텃밭을 쪼까 마련했다니, 짬나면 한번 가보소.”

지리산닷컴 K형수님이 읍내에 우리 몫의 텃밭을 마련해준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속으로 ‘오, 노!’(Oh No!)를 외쳤다. 나는 그런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도시 사람들이 시골에 오면 무슨 원죄를 갚는 일이라고 유기농, 무농약 텃밭 운동에 돌입하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귀농이나 귀촌에 1%의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단지 서울에서 구례로 이사 왔을 뿐이다. 더구나 내가 사는 곳은 읍내가 아닌가? 시각적으로 시골이 아니라고! 그러나 상황은 이미 시작되어버렸다.

‘노을 언니’ 노정애씨는 도시에서 생활할 때도 흙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다. 그녀는 농부가 자신의 근원적인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형수가 텃밭 쪼까 마련했어”, Oh No!

울며 겨자 먹기 텃밭을 시작하면서 언제 무엇을 심어야 할지, 퇴비는 언제 어느 정도 하는지 등에 관해 나는 형수에게 계속 물었다. 그러나 질문은 한계가 명확했다. 어느 날, 날 밝고 나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고추를 심고 고구마순을 옮기고 감자를 심었다. 분명히 나만 모르게 심야 회의를 해서 언제 파종할지 결정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만 빼고 어떻게 한날한시에 그렇게 한단 말인가? 그때까지 나는 시골 사람들이 일기예보에 그렇게 열심히 관심 갖는지 몰랐다. 요즘은 나도 파종기를 그럭저럭 맞추는 편이다. 여하튼, 언젠가 옥수수를 옮기고 날이 가물어서 형수에게 물었다.

“옥수수에 물을 줘야 할까요, 아니면 비 올 때까지 그냥 기다려요?”

그때 형수가 한 대답을 나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산이 삼촌, 느껴보세요.”

“예?”

“옥수수가 뭐라고 그러는지 가만히 느껴보세요.”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형수의 별명을 ‘느껴봐’로 정했다. 그래서 뭔 이야기를 할 때에는 ‘느껴봐 형수가 그러는데…’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후에 나는 계속 ‘불감증’(저활동성 성욕장애가 아니다)에 시달렸다. 읍내 인구가 1만 명 정도인데 1년이 안 돼 3만 번 정도 텃밭 관리 상태에 관한 잔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텃밭을 버리고 도망갔다. 텃밭을 일군다는 것은 ‘완전히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관중과 ‘시어머니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시골에서 텃밭은 곧 그 사람의 얼굴과 다름없다.

농사를, 작물 상태를 ‘느껴야 한다’는 다소 문학적이고 근원적인 화두를 나에게 던져준 그 형수의 이름은 노정애.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지리산 노을 언니’ 또는 줄여서 ‘노을 언니’라고 부른다. 

노을 언니와 얼굴 맞대고 산 지 만 일곱 해가 되는 2013년 4월 어느 봄날. 노을 언니를 ‘체포하러’ 카메라를 메고 해발 800m 문수골에 올랐다. 노을 언니가 산마늘잎을 수확하는 장면이 필요했다. 그러나 계곡을 눈앞에 두고 도통 산마늘밭을 찾을 길이 없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계곡 건너? 그라고… 잘 찾아보라고요? 이런 젠장….”

다시 계곡을 건너고 비탈을 헥헥. 멀리서, “여기여요~.”

뭣이여? 이게 밭이여 걍 산이여.

“조심하세요.”

“괘안아요. 제가 자빠지지는 않아요.”

“아뇨, 삼촌 말고… 순 올라오니까.”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사진 권산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해 웹디자인과 인쇄물 디자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부업으로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7년 전 전남 구례군으로 이사했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디자인 일을 한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아버지의 집> <맨땅에 펀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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