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06 15:03 수정 : 2013.06.14 11:06

모든 가난이 시가 되지는 않지만 시는 어김없이 가난을 노래한다. 백석의 가난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을 내리게 하는 따사로운 가난이라면, 기형도의 가난은 문풍지를 더듬는 바람의 집에 갇힌 어둡고 쓸쓸한 가난이고, 김수영의 가난은 설움과 비애가 선을 긋는 형형한 가난이다. 2000년대 ‘미래파’ 담론을 일으킨 평론가이자 시인인 권혁웅은 ‘마징가Z’와 ‘투명인간’이 출몰하는 찡하고도 재기 발랄한 가난을 그렸다. 이런 시가 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 시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중에서

권혁웅 시인, 평론가. 한양여대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소문들‘, 평론집 ‘미래파‘, 신화연구서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등을 펴냈다. 현대시학작품상(2010), 미당문학상(2012) 등을 수상했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권혁웅이 살던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산 302번지 풍경이다. 술 취한 아버지는 툭하면 집주인과 다투었다. 결국 전세 계약 기간을 못 채우고 쫓겨나야 했다. 동물의 내장 같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두루 거쳐 갔다. 생후 7개월에 꽃씨처럼 날아와 사춘기를 통과하는 동안 도합 아홉 번 주소지를 옮겼다. 주인집과 이웃 집을 중심으로 인맥이 늘었다. 한 교회를 오래 다녀 마당발이었다. 명민하고 의뭉스러운 사내아이는 동네 사람들의 면면과 형편을 손금 보듯 뀄다.

그리고, 머리 위로 접시가 날아다닐 때마다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상상 속으로 달아나던 사내아이는 시인이 되었다. 권혁웅은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평이, 이듬해 <문예중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살던 산동네는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 시편들로 복원되었다. 삼선동을 떠난 지 15년 만이다.

“어느 날 마을이 재개발에 들어갔더라고요. 벽에는 스프레이로 엑스(X) 자가 돼 있고 지붕부터 헐리는 집들을 보았죠. 아, 저기는 용구네인데, 저기는 인자가 살던 곳인데….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 어디서 무얼 하며 살까. 집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지만 나에게는 거기가 한 세상이었으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는 다시 삼선동을 찾았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 끝을 타고 기억이 몰려왔다. 신산했던 유년이, 복닥거리던 삶이, 삐뚤빼뚤한 사람들이 통째로 떠올랐다.

“우리 집보다 해발 30m 더 높은 곳에 살던 정복이.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지만 진로를 더 많이 모은 기운 센 천하장사 옆집 아저씨. 팔뚝만 한 고추를 빙빙 돌리며 담벼락에 오줌을 누곤 하던 바보. 한밤중에 변소 가서 구멍에 빠졌는데 똥독을 이겨낸 주인집 막내. 면도칼을 씹어대던 주인집 작은누나. 문틀에 끼어 왼손이 너덜너덜해진 버스 차장 막내 미정이….” (이 인물들은 여러 편의 시에서 따왔다.)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로 와서 ‘드래곤’, ‘요괴인간’, ‘독수리 오형제’가 되었다. 이들 만화영화 주인공은 그로 하여금 “한 세상 견디고 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것들”이다. 시인들은 대개 자기가 마음 붙일 데를 찾는다고 했다. 예전 시인들은 꽃이나 새, 나무 같은 자연물에 감정을 이입했지만, 그가 어려서부터 본 것이라고는 축대나 계단 같은 시멘트뿐이었다. 오래 눈길 주고 열광했던 마징가Z와 슈퍼맨이 자연스레 서정적 대상이 되었고, 마을에서 겪던 이야기와 합체해 시가 된 것이다.

주인집 작은형은 스물일곱에 죽었다

스물일곱 해를 골방에서 살았다

볕을 쬐면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형이 몸을 흔들면 머리카락과 피부딱지가

우수수, 쏟아지곤 했다

형은 언제나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다녔다

형은 자기가 지나친 자리를

천천히 감추는 그림자였다

황사가 곱게 내려앉은 어느 봄날,

형은 지상에서 제 몸을 거둬갔다

오후 두시에서 여섯시까지

옷을 걸기 위해 박아넣은 대못 아래서

형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집안에 내려앉은 먼지는 대개

사람의 죽은 피부조각이다

형은 드디어 대낮에도

안방과 건넌방과 마당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시 ‘투명인간1’

그가 열두 살 즈음 때 살던 주인집의 작은형 이야기다. 백색증에 걸린 형은 그 집 북향의 가장 어두운 방에서 지냈다. 거기에 들어가면 파우더 냄새가 심하게 났다. 형이 서양 체스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형이 안 보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에게 형은 분가루 냄새와 체스, 희고 가늘고 긴 손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방 안에 쌓인 먼지가 살비듬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형이 떠올랐다. 형이 살아 있으면 햇빛 아래서도 환하게 다닐 수 있겠다고 상상했다.

그가 목도한 ‘투명인간2’는 할머니다. 할머니는 천식이 심했다. 할머니와 방을 같이 썼는데 그날도 할머니의 기침은 계속됐다. “담배 좀 고만 피지, 왜 매일 기침하면서 담배를 피우나” 하고 보니 할머니 장례를 치른 지 한참 지난 거다. 직접 겪은 일이다. 이때부터 할머니의 기침을 연상시키는 온갖 소리들, 수도꼭지에서 쇳물을 쿨럭이는 소리 속에서 그는 할머니를 보았다.

권혁웅의 세 번째 시집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는 상상동물 이야기를 엮었다. 중국 고대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관흉국(貫匈國)인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가마에 태울 때는 장대로 가슴을 꿴다. 관흉국인에게서 상처로 인해 가슴에 구멍 난 존재를 떠올린 그는, 어떤 신화적 캐릭터의 근본적인 특성이 한 사람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백색증에 걸린 그 형은 대낮에 다닐 수 없으니까 스스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었죠. 어두운 데서만 움직인다는 점에서 가시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같은 시집에 실린 시 ‘세상의 끝’에 나오는 동도극장의 ‘목 없는 미녀’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 투명인간과 비슷한 족속이죠. 그들의 존재의 방식, 슬픔의 방식, 가난의 방식을 투명인간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권혁웅 시인에게 투명인간은 ‘소문자 역사’를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상징한다. 시인의 고향은 서울 성북구 삼선동 달동네다. 그는 재개발이 시작된 이곳을 다시 찾아가 살뜰한 민중사를 복원했다. 2010년, 재개발이 늦어지고 있는 삼선동 장수마을 풍경. 한겨레 자료
좌익과 우익을 아수라 백작에게 배웠다

권혁웅은 1967년생이다. 중학생이 되던 해 5·18 광주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중1 때부터 고3까지 사춘기를 겪었다. 광주에서 비롯된 대문자 역사의 암흑기를 비켜갔다. “큰 역사는 모르지만 집안의 폭력의 역사, 가난의 역사를 알고, 교회에서 죄의식의 역사를 배웠다.” 늘 마음속이 괴로웠고, 여러 차원의 지옥을 겪었다. 거길 겨우 벗어나 대학에 갔더니 그때부터 전두환과 싸워야 했다. 매일 수업을 거부하고 돌을 던졌다. 대학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대문자 역사와 소문자 역사가 겹쳐서 폭력성에 대한 공포와 적의가 심해졌다.

당시 그가 다니던 대학에는 문학 서클이 두 부류였다. ‘시를 쓴다’와 ‘문학으로 변혁에 복무한다’는 슬로건을 각각 내세웠다. 100명 중 90명이 후자에 속했고, 전자는 5명뿐이었다. 어느 날 ‘시를 쓴다’ 편의 선배가 다가왔다. 소수파 진영에 몸담고 꾸준히 시를 썼다. ‘세상이 좋아지면 시를 안 써도 된다’는 다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문학은 어쨌든 글을 잘 써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선배들에게서 ‘예쁜 부르주아 문학 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훗날 국문학과 동기 110명 중 유일한 등단 시인이 되었다.

권혁웅의 시는 ‘참여’와 ‘순수’라는 대립의 바깥에 있다. 그는 1980년대라는 역사적 시간보다 삼선동 산동네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이념적 잣대보다 신화적 형식으로 세상을 감각한다. 이를 테면 시인 박노해가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참혹한 노동 현실에 대해 ‘손 무덤’을 썼다면, 권혁웅은 “프레쓰기가 손가락 둘을 먹어버린” 돼지엄마네 작은형을 ‘요괴인간’으로 호명한다. 1987년 서울을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라며 딴청 피우듯이 언급한다. 그가 좌익과 우익을 배운 것은 TV 만화 <마징가Z>이다.

나는 아수라 백작의 팬이었다 (…) 양성구유인 그는 두 명의 성우를 데리고 다녔고 왼쪽에서 등장할 때와 오른쪽에서 등장할 때 다른 목소리를 냈다 좌익과 우익을 그에게서 배웠다 - 시 ‘모순’ 중에서

대문자 역사와 소문자 역사는 엉뚱하게 마주쳐 웃음을 자아낸다. 그의 시는 슬픔과 유머가 같이 간다. 힘든 이야기를 힘들다고 쓰면 그건 너무 징징대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은 아버지의 주사와 원죄의식에 갇힌 암흑기이기도 하지만 첫사랑과 성에 눈 뜬 아름다운 날들이기도 하다. 신파극은 쓰지 말자 다짐했고, 사유와 표현은 분리되지 않았다. 치욕과 환희가 교차하던 유년, 그 세속의 자리는 시인의 정교한 세공술로 웃프게(웃기고도 슬프게) 그려졌고 살뜰한 민중사가 되었다. “순결한 글쓰기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긍지”(황현산)를 미학적·정치적 실천으로 수호한 것이다.

“소문자 역사라는 게 사실은 보편사예요. 다른 동네로 이사한 친구들 집에 가보아도 마을버스 정류장은 비슷하더라고요. 슈퍼 앞, 약국 앞…. 내 시를 본 어떤 여학생이 눈물이 나서 끝까지 못 읽고 말았다며, ‘이건 우리 아빠 얘기’라고 하더군요. 어릴 때 매일 맞고 자랐고, 문창과에 시 쓰겠다고 온 거죠. 나랑 똑같아요. 체험의 공통성이 있는 거죠.” 

가난의 계보학, 해석의 유희

시집 제목이 <마징가 계보학>이다. 계보학은 니체의 학문적 방법론이다. 니체는 선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았다. 누가 선악을 말하는가, 선악의 가치판단이 삶의 상승에 기여하는가 하락을 조장하는가, 가치의 가치를 물었다. 도덕이 역사적·민족적·문화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달라지고,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탐구해 <도덕의 계보학>을 썼다. 그 책에서 니체는 말한다. “고통도 해석이다.” 우리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는 얘기다.

<마징가 계보학>은 해석술의 시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불우한 과거의 은폐나 미화가 아닌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용기, 대중문화와 신화를 적절히 인용한 지적인 명철함, 남루한 일상 풍경에서도 삶의 세목들의 소소한 차이를 읽는 섬세함이 돋보였다. 그가 펼친 자유로운 해석의 유희는 가난이라는 말에 웃음과 숨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은 문학을 통한 고통의 치유가 아니다. ‘문학이 꼭 치유를 해야 하는가’라고 물음을 던진 그는 ‘아프니까 청춘이야’, ‘다 괜찮아’ 식의 봉합에 회의적이라고 했다.

“그 시절이 힘들고 어려워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고 결심했지 극복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았어요.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벌려놓을 필요가 있어요. 상처는 틈이에요. 상처의 벌어짐, 그 결핍을 언어로 채우는 것이 시이지요. 시인에게 아픔은 부정적인 게 아니고 남들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근거예요.”

고통의 자산화. 이는 과거에 상처와 아픔이 있었다는 단순한 전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억이란 과거와 현재가 만나 일으키는 화학작용이고, 그 기억의 조각들은 친화적으로 소통관계를 형성한다. “기억이란 인간의 두 번째 생이다.”(김경주 ‘비정성시’ 중에서) 권혁웅은 <마징가 계보학>의 에필로그 격인 ‘시인의 말’에서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는 사람들 (…) 겹으로 된 삶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고 썼다. 이렇게 기억-작업은 시-쓰기가 되고 시 쓰기는 도래하는 역사가 된다.

그렇다면, 투명인간으로 존재했던 주인집 형을 기억하는 것은 그의 시 작업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얼마 전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 이야기를 꺼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거나, 5·18을 북한이 개입한 폭도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그 사람이 전두환도 아닐진대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기록이 가진 무서움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 정보나 질서를 왜곡해서 자기들의 존재 근거를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시들은 작은 역사고 광주항쟁은 큰 역사죠. 전두환의 역사도 기록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인집 형의 사라짐을 기록할 필요도 있는 거죠. 산동네의 삶이 나의 근본이고 고향이죠. 거기서 성장했기 때문에 내가 문학을 한다거나 삶에서 가치를 찾는다면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끊임없이 거기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 이런 시를 써서 내가 아직도 거기에 산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은 자신의 근본을 기억하는 자이다. 그러나 근본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본을 사는 것. 그는 요즘도 투명인간을 본다. 예전에는 “어슴푸레 서 있긴 한데 도무지 얼굴은 보이지 않는 이들”이었다면 지금은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이다.

도봉 근린공원, 투명인간 되다

우선, 가까이 있는 문예창작과 학생들. 애초에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상처가 있다. 베인 자리가 있다. 지독한 가난, 우울증 등 사연도 많다. 또 회사에서 구조조정당하고도 가족에게 야근한다고 거짓말하면서 밤새 술 마시는 이들, 근린공원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등의 장삼이사들이다.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시 ‘도봉 근린공원’ 중에서

근린공원에 오는 사람들을 꼼꼼하게 묘사한 시다. 서울시 도봉구뿐 아니라 근린공원은 어디나 비슷하다. 서로는 서로를 모르지만 삶이 닮았다.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식들 좋은 대학 가야 할 텐데 염려하는 평범한 엄마들의 모습을 그는 보았다. 현대인의 밋밋한 삶을 풍자와 조롱하는 것이라고 일부 사람들은 이해하지만 아니란다. 그도 요즘은 술살이 불어 공원에 나간다고 귀띔한다.

“20년 넘어 정치적 상황이 돌아왔죠. 다 끝난 줄 알던, 거대한 복고적인 힘이에요. 예전처럼 싸우는 건 힘들어서 못할 거 같아요. 거대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고 미소한 존재들, 가슴에 구멍 난 사람들. 이들이 얼마나 절실하고 소중한지 시로 남기고 싶어요. 나도 투명한 시선을 같이 가져서 그런 삶 속에서 살아진 데도 좋아요.”

권혁웅은 천변 벤치에 누워 자는 만취한 샐러리맨을 보고 쓴 시 ‘봄밤’으로 2012년 미당문학상을 받았다. “취객을 통해 매일매일 죽는 현대인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수상 후 인터뷰에서 “시는 세속의 자식이다. 그래서 지지고 볶고 사는 매일매일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일찍이 그는 그랬다. 하도 지지고 볶다가 존재가 닳아서 희미해져버린 사람들, 세상 끝으로 튕겨져나간 사람들을 놓치지 않았다. 존재감 없는 그들은 그를 만나 신화 형식의 옷을 입고 삶의 총체적 표현을 얻었다.

그도 변하고 시대도 달라졌다. 산동네에 거주하던 투명인간들은 근린공원으로 분포가 넓어졌다. 시인은 여전히 그들을 지극함으로 바라보고 환대한다. 나아가 그들의 삶 안에서 같이 투명해지려 한다. 자신의 평론집에서 말한 대로 “사연을 개괄하는 게 아니라 그 사연의 일부가 되”어 좋은 시의 주체로 조각나려는 것이다. 투명한 존재끼리 공통 감각을 형성하고 ‘내통’할 때 어떤 언어의 상찬이 차려질까. 가을이면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 나온다.

인터뷰·글 은유 글 쓰는 사람(Homo Writers). 여기저기서 글쓰기 강좌와 시 세미나를 진행한다. 일상의 경험과 느낌을 자신이 사랑하는 시에 녹여 쓴 에세이 <올드걸의 시집>과 MBC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 사진 에세이집 <황제펭귄과 함께한 300일>(공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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