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06 14:52 수정 : 2013.06.23 12:06

지난 5월 23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다. 사망한 지 최소 3일이 지난 시신이었다. 가난한 장애인 김아무개씨였다. 홀로 외로이 살다가 아무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고독사’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독사에 대한 통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보건복지부의 무연고 사망자 통계를 보면, 무연고 사망자는 2009년 587명, 2010년 636명, 2011년 727명 등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고독사로 유명을 달리한 이들은 많은 경우 무연고 사망자 범주에 포함되기에 이 통계를 바탕으로 고독사 역시 증가일로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철저히 고독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고독사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은 살아 있을 때에도 고독한 이들이다. 이들의 죽음이 누구의 애도도 없는 고립 속에서 이루어진 만큼 그들의 삶 역시 타인과의 유의미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 사이에 존재했지만, 사람 사이에 의미를 가진 자로 존재하지 못했다. 살아서 타인에게 의미가 되지 못한 이는 죽음 역시 타인에게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호모사케르는 모든 정치구조의 은밀한 토대다. 주권은 이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면서도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내포함으로써 행사된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이런 의미화되지 않는 삶이 귀결되는 극단적 방식이 자살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다. 10대, 20대, 30대에서는 사망 원인의 1위이고, 40~50대 경우 2위다. 자살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예외적인 사망 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망 방식이다.

죽음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아픔과 울분을 호소하는 소통의 한 방식이던 과거의 자살과 달리 최근의 자살은 많은 경우 침묵과 고독 속에 이루어진다. 유서도 없이 ‘조용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조건 속에서 외롭고 쓸쓸히 살던 이들은 아무 말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한다. 그들의 가난하고 고단하며 고립된 삶이 그렇듯, 그들의 쓸쓸하고 고독한 자살도 우리 사회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죽음은 자살률이라는 국가 통계지표에 숫자로 기록될 뿐이다.

몇 해 전부터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이른바 ‘투명인간’이라는 말이 감지하는 바 역시 의미화되지 않는 삶의 모습일 것이다. 학교나 회사처럼 비익명적 집단 내부에 포함되어 있지만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특별히 의식되지 않거나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이들, 즉 이른바 ‘존재감’이 없는 이들을 일컫던 이 말은 서서히 사회적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투명인간은 한국 사회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다시 말해 투명인간은 의미화되지 않는 삶을 뜻하는 또 다른 기호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미화되지 않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삶에서 ‘의미’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삶의 유형과 삶의 의미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향락적 삶(Bios Apolaustikos), 정치적 삶(Bios Politikos), 그리고 관조적 삶(Bios Theoretikos)이 그것이다. 향락적 삶이란 육체적 쾌락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삶이다. 정치적 삶은 명예를 추구하는 삶이다. 즉,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말한다. 관조적 삶이란 지성이라는 인간 최고의 덕목을 추구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사는 것’과 ‘잘 행위하는 것’으로서 행복한 삶의 최고 유형은 바로 관조적 삶이라고 말한다. 그는 관조적 삶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삶의 유형이고, 이때 우리의 삶은 ‘행복한 삶’이 된다.

반면 삶의 유형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분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작업을 시도한 20세기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최선의 삶의 유형을 정치적 삶이라고 파악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생존의 필연적 요구를 해결하는 ‘노동’, 인간 활동이 이루어지는 인공적-객관적 토대를 구축해내는 ‘작업’, 그리고 사물과 물질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으로써 ‘행위’라는 세 가지 조건 아래서 영위된다. 이 가운데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행위이며, 행위는 근본적으로 정치의 차원에 속한다. 아렌트는 인간이란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개성에 바탕해 타인과 교통할 수 있는 관계를 창출할 때 가장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고, 그런 관계를 창출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 행위란, 무엇보다 타인과 공존하는 세계 안에서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독특성을 말로써 타인에게 증명하는 정치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같은 정치적 활동의 공간이 바로 고대인들이 ‘폴리스’(Polis)라고 부르던 영역이며, 아렌트가 강조하는 공론 영역이다. 공론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그리하여 타인과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실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공론 영역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을 보고, 우리가 듣는 것을 듣는 타인의 현존으로 인해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의 실재성을 확인한다.”(<인간의 조건>) 그리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본질적 가치인 자유가 수립될 수 있다.

삶의 유형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렌트의 논의를 배경 삼아 앞에서 제기한 ‘삶의 의미’라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의미 있는 삶이란 결국 이 세계의 영원한 원리와 불멸의 진리를 사유하는 관조적 삶이거나 타자와의 교통 속에서 각자의 독특성과 자유를 함께 구축해가는 정치적 삶을 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삶의 최고 의미는 사유에 있으며, 아렌트에게 그것은 자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삶의 유형 간의 우열이 아니다. 삶에서 관조적 차원이나 행위의 차원이 삭제된 채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삶만으로는 행복하거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화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생각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오로지 육체적 욕구만 추구할 때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육체적 쾌락과 필요의 만족만 추구하는 인간은 더 이상 짐승과 구별되지 않는다. 짐승의 삶과 구별할 수 없는 육체적 쾌락으로 환원된 인간의 삶은 행복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삶이다. 아렌트에게 인간으로서 삶이 상실되는 것은 서양의 고대인들이 폴리스라고 부르던 정치의 차원이 박탈될 때이다. 폴리스란 물리적 공간이기 이전에 타인 앞에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서 내가 나타나며 내 말이 그 타인들에게 가치 있는 말로 들리는 공간, 즉 정치의 공간을 뜻한다. 이같은 폴리스 속에서의 삶만이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두 번의 세계대전 과정에서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주는 폴리스를 상실한 사람들이 대거 출현하는 상황을 목도한다. 바로 자신의 국가에서 추방당한, 난민이 급증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일차적으로 시민권을 상실한 난민이란 정치적 존재로서 자신의 지위를 상실한 자들이며 종국적으로는 행위의 조건, 즉 폴리스를 상실한 자들이다. 이때 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인권도 상실한 자들이다. 그들이 처한 상태는 “무엇보다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는 견해로, 행위를 효과적 행위로 만드는 장소의 박탈로 표현되고 있다 (…) 그들은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행위의 권리를 박탈당했고, 좋아하는 것을 생각할 권리가 아니라 의사를 밝힐 권리를 빼앗겼다.”(<전체주의의 기원>) 그런 상태는 결국 “인류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동일”(같은 책, 533쪽)한 것이다.

이런 아렌트의 견해를 통해 앞서 말한 ‘의미화되지 않는 삶’이 뜻하는 바가 더욱 명백해진다. 그 삶은 타인에 의해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삶이다. 폴리스에서 축출된 자들, 그리하여 정치적 존재로서 권리를 상실한 자들의 말은 더 이상 귀담아 들어야 할 가치를 가진 자의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는 응답하지 않아도 무방한, 효력 없는 행위가 된다. 아렌트에게 난민이란 바로 정치적 삶, 즉 정치적으로 인정되는 권리주체로서의 삶을 상실한 존재들이며, 이들의 삶이 정치 공동체 내에서 의미화되지 않는 삶이다.

 

호모사케르의 의미화되지 않는 삶

정치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이 정치의 근본적 토대를 이루는 형상으로 제시하는 ‘호모사케르’(Homo Sacare)는 아렌트가 말하는 난민을 닮아 있다. 아감벤의 대표 저작인 <호모사케르>에 제시된 대로 호모사케르란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호모사케르>)을 의미한다. 원래 ‘성스러운 인간’이란 뜻의 호모사케르는 고대 로마에서 특정한 죄를 범한 자가 처하게 되는 상태를 표시하는 이름이다. 호모사케르로 지정된 자는 법적 수순을 밟아 국가기구에 의해 처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 의해 임의적으로 살해될 수 있게 된다. 즉, 국가는 그를 죽이지 않지만 시민 중 누가 그를 살해하더라도 국가는 그를 살인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호모사케르로 지정된 자의 생명은 죽여도 되는 생명, 살해해도 무방한 생명인 것이다. 동시에 그의 생명은 어떤 희생 제의의 제물로도 바쳐질 수 없다. 즉, 그는 어떠한 종교적 차원의 성역에도 진입할 수 없다. 그래서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의 형상에서 이중적 배제를 읽어낸다. 그는 인간의 법(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되지 않는다)과 신의 법(어떠한 희생 제물로도 그를 바칠 수 없다)에서 동시에 배제된 것이다.

고대 국가 체제를 구성하는 두 축인 정치와 종교로부터 동시에 배제된 존재가 바로 호모사케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호모사케르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의 본질은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고 말한다.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을 통해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단지 살아서 숨 쉬는 최소의 자연적 생명현상과 동일화해버린 상태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 가령 동물과 구별해주는 모든 특성을 상실한 존재가 바로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호모사케르다. 아렌트의 논의를 염두에 둔다면 폴리스라는 인간의 조건을 상실한 자, 그래서 ‘단지 인간’이기만한 자가 호모사케르와 유사한 상황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렌트의 난민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배제와 포함, 예외와 정상의 차이이기도 하다. 아렌트가 보기에 난민은 현대에 들어서 급증하고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정치구조에서는 예외적 혹은 비정상적 현상이다. 또한 난민화는 정확히 정치 공동체로부터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호모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의 창출은 결코 정상적 정치구조에 나타난 예외적 현상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주권에 의해 질서가 구축되는 모든 정치구조의 은밀한 토대이다. 그뿐만 아니라 호모사케르는 단지 배제된 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감벤에 따르면, 호모사케르의 형상이 보여주는 것은 정치 공동체로부터의 배제를 통해 그 안에 다른 형태로 포함돼버리는 어떤 역설, 즉 ‘포함적 배제’라는 역설이다. 호모사케르는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생명이 배제되는 방식을 통해 정치 공동체에 포함되는 서구적 주권구조의 근본적 차원을 보여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호모사케르에 대한 아감벤의 복잡한 논의를 여기서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의미화되지 않는 삶으로서 투명인간의 함의를 풀어가는 작업에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투명인간을 곧바로 호모사케르로 등치해버리는 손쉬운 유비관계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는 단순히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을 호명하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명인간과 호모사케르

아감벤에게 호모사케르란 ‘항상-이미’ 주권의 고유한 상관자이다. 즉, 주권의 비밀은 호모사케르란 형상의 의미를 포착할 때만 풀릴 수 있다. 아감벤은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정치신학>)라는 독일의 정치학자·공법학자 카를 슈미트의 정식을 따라서 주권을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권력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예외 상태란 무엇보다 정상적인 법질서가 법에 의해 중지되는 사태이다. 주권자에 의해 예외 상태가 선포되면 법이 보장하던 모든 시민의 기본 권리들이 유보되고 중지된다. 법에 의한 법적 권리의 중지라는 역설적 상태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 순간 정치적 공동체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한 생명체로서의 삶이 드러난다. 그것은 단지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명, 즉 벌거벗은 생명이다.

결국 아감벤에게 주권이란 바로 시민적 존재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주권은 예외 상태의 선포를 통해 시민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그에게 단지 생명체로서의 존재만을 남겨둔다. 주권이 예외 상태를 선포하는 권력이라는 말은 곧 주권이 시민의 삶을 아무런 권리도 보유하지 못한 그저 생물학적으로 생존하기만 하는 삶, 즉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권이란 근본적으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무화할 수 있는 힘, 시민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 수 있는 힘에 기반하고 있는 권력의 형태다. 그리고 주권의 이런 성격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차원이다.

호모사케르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 맥락에서 보면, 투명인간을 곧바로 호모사케르와 동일시하는 건 무리다. 투명인간은 일반적으로 배제된 자들이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감벤이 호모사케르의 형상을 통해 부각하려는 바는 배제되거나 소외된 자들의 특수성과 비참함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오늘날 국가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속해 있는 주권적 통치의 근본 구조이다. 주권적 통치의 구조는 벌거벗은 생명에 토대한다는 사실, 즉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호모사케르들”(<호모사케르>)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명인간이 호모사케르다’는 식으로 오늘날 호모사케르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그의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생명체로 환원된 인간 존재가 주권적 통치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모사케르의 형상은 투명인간의 형상과 정확하게 겹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모사케르가 공동체 안에 존재하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그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호모사케르의 어떤 차원은 우리가 주목하는 오늘날의 투명인간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호모사케르는 종교적 차원이나 정치적 권리 체계 차원 모두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점에서 의미화되지 않는 삶의 존재다.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이도 없으며, 그의 행동에 응답하는 이도 공동체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더 이상 의미를 담은 말, 즉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동물의 울음소리와 구별할 수 없는 소리(Phone)에 불과하다. 그가 공동체 시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그의 모든 존재가 그저 살아 있기만 한 단순한 생명체로 환원돼버린 순간, 그는 자신의 모든 사회적 의미를 상실한 삶이 돼버린다.

벌거벗은 생명, 호모사케르의 삶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화되지 않는 삶이며 그러는 한 그는 오늘날의 투명인간을 닮아 있다. 투명인간이란 그의 존재가 다른 이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타인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고, 존중과 배려의 상대가 되지 못한 존재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들이다.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청소노동자, 동일한 노동을 하지만 정규직과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바로 그런 투명인간이다. 또한 그와 같은 차별과 권리박탈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더라도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투명인간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사회적 삶의 의미를 점점 상실해가는 투명인간이 여기저기에 있다.

그런 투명인간에게 호모사케르의 형상이 일정하게 포개지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그저 생존이라는 사실,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도록 강제됨으로써 사실상 사회적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유의미한 존재로 인정되지 못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자 동료로 의미화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투명인간과 호모사케르의 상동성이 있는 것이다.

정정훈
정정훈 수유너머N 연구원.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을 공저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