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6 17:56 수정 : 2013.05.07 11:25

농부 윤병술. 1964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농부가 되겠다고 작정했다. 전남대 농대를 졸업했다. 1998년 11월에 구례로 귀농했다. 친환경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
농부 윤병술. 그와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1월이었다. 주변 지인을 통해 농장 로고 타이프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는데, 나는 거절했다. 일면식 없는 농부들 부탁까지 모두 들어준다면 시골 디자이너는 확실하게 과로사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지리산닷컴 컨테이너 사무실로 한 농부가 찾아왔다. 그가 윤병술이었다.
“제가 바빠서 힘들다고 말씀 전했는데….”
“바빠도 좀 해주세요.”


“병술이, 열심히 하는데 농사가 잘 안 돼요”

나만큼 말 안 듣게 생겼다. 농부 윤병술과의 만남은 그렇게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좁은 구례 바닥에서 그와 나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제법 겹쳤다. 윤병술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윤병술에 대한 뒷담화를 청했다. 공통적인 평가와 표현이 있었다.
“병술이 열심히 해요. 그런데 농사가 잘 안 돼요.”
그것은 농부 윤병술이 ‘맨땅에 펀드’의 선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강력한 조건이었다.

지난 3월 29일 금요일, 구례군 용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윤병술의 아내는 오이 끈에 빨래집게를 하나씩 매다는 중이었다. 설치미술이 따로 없었다. 개념과 필연성을 조직하는 미술작품이 아니라 ‘살아보려고 움직이다 보니’ 만들어진 풍경에 의도란 것은 없다. 아내는 남편이 자른 끈 길이를 살짝 불평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집게를 매달았을 것이다. 지루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외로웠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안다. 눈은 집게와 끈을 향하고 내게도 섭섭함을 표현한다.
“통 안 오시대요.”
“이제 자주 올 겁니다. 하하하…. 얼굴은 안 나오게 찍을게요.”
미소가 살짝 보였다. 미안했다. 하우스에는 오이꽃이 피어 있었다.


하우스 2천 평·노지 1만 평, 감당할란가?

윤병술. 1964년생이다.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농대 원예학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농부가 되리라 작정했다. 대학 졸업 후 광주원예농협에서 8년 동안 근무했다.
“농협 직원이 좋아요, 농부가 좋아요?”
“당연히 농협 직원이 좋죠.”
그의 아내 박미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1970년생이다. 섬, 진도에서 태어났다. 윤병술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다. 학교에서 엮인 것이다.
“여섯 살 차이라…. 누가 꼬셨어요?”
“제가 꼬였죠.”
윤병술이 0.1초의 인터벌도 없이 직구를 뿌렸다. 진실 여부를 떠나 ‘우리의 과거는 그러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구속이었다.
“혹시 첫사랑입니까?”
“아뇨!”(두 사람 모두 동시에 강한 부정)

두 사람은 1993년 결혼했다. 아들과 딸을 순서대로 두었고, 모두 대학생이다. 1998년 11월에 구례로 귀농했다. 하우스 시설 조건이 맞는 물건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윤병술은 처음부터 하우스 농사를 계획했다.
“하우스 농사가 전부 몇 평입니까?”
“여그 600평에다가 우에 700평… (궁시렁)… 한 2천 평 되네요.”
“주 작물이 뭡니까?”
“지금은 감자하고 오이, 부추, 양배추, 봄무….”
내 뒷조사에 따르면 농부 윤병술이 농사를 자주 말아 먹는 원인 중 ‘감당하지 못할 면적’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최근 노지 밭 1만 평 작업에 매달려 있다. 하우스 2천 평에 노지 1만 평.
“사람들이 병술씨는 감당하기 힘든 면적이 문제라고 하던데….”“그게 첨부텀 그렇게 할라고 한 게 아니고요….”

그는 이 대목에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구례군 인구가 2만7천 명인데 모임이 3만 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골에서 모임의 7할은 작목반이다. 쌀, 축산, 오이, 감자, 감, 산나물, 매실, 밀…, 생산되는 모든 작물마다 작목반이나 영농조합이 있다. 개인에 대한 농자금 지원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지원은 작목반이나 영농조합을 대상으로 한다. 모임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모임은 만들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이의 하우스를 떠안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늘어난 것이지 저도 하고 싶어 그란 거이 아니라니까요. 계속 줄여나가고 있어요.”
“그래요. 그래서 노지 1만 평을 새로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워낙 조건이 좋아가지고 할 수 없이….”
가끔 비슷한 포유류를 만난다. DNA 결함으로 ‘거절 유전자’가 없는.

윤병술의 하우스 감자를 ‘맨땅에 펀드’ 첫 배당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수확이 좀 늦다. 4월 중순이란다.
“감자 촬영 합시다.”
“…좀 꼬실렀는데…”
“왜요? 얼었어요? 하우스 온도 조절 안 했어요?”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거이죠….”
윤병술의 하우스와 연결된 친구 하우스가 있는데, 수막이 생겨서 물을 잠가야 했다. 그 하우스는 온도 조절에 실패해서 물을 공급하면 작물이 얼게 된다. 같이 얼거나 같이 잘되거나 둘 중 택일. 물론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순전히 윤병술이 만든 룰이다. 결국 같이 감자를 말아 먹는 쪽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윤병술의 감자는 온도 조절 실패가 아닌 물 공급 부족으로 ‘꼬실렀다’.
“농사는 지어보면 꼭 한 타임에 실패합니다.” 


“깜장 멀칭 하자니께…” 일 느는 수확기

지난 4월 15일 월요일, 바짝 긴장해야 하는 날이다. 다음날 펀드 첫 배당으로 세 가지 농산물을 발송할 것이다. 하루에 그 모든 작물 수확을 취재해야 하는 날이다. 일은 농부들이 하지만 나 역시 취재와 검수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감자를 수확하는 윤병술 취재가 먼저다.
“몇 시에 감자 캐요?”
“9시쯤요. 기계를 아직 못 받아서.”
용방의 윤병술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 감자 하우스 수확을 세 고랑째 하고 있었다. 경운기가 아니라 수확기라고 한다. 깊숙하게 고랑 중심을 가르면서 뒤집는 방식이다. 감자가 상하지 않게 캐는 것이 관건이다. 척 봐도 풀이 많다. 바퀴에 풀이 감기는 것은 당연하다. 비닐 멀칭(땅에 비닐을 덮는 일)을 했을 텐데 왜 이리 풀이 많은 것일까. 결국 기계는 멈추었다. 기계를 임대한 기술센터로 전화한다.
“용방에 윤병술입니다. 감자 캐는 거스기, 왜 그 옆에 있자녀, 카바에 밑에. 나사 그… 용접을 해야는데. 세 고랑째 캐는데 떨어져부네. 어째야쓰까?”
진작부터 기계보다 앞서서 풀을 뽑던 아주머니 한 분이 기계 소리가 멈춘 틈에 쏟아내신다. 분위기 험악해진다.

“풀부터 베아야제 시방 기계가 문제가 아녀. 못할 일이네 요거. 니미… 일하는 거 보면….”
“엄니 이 동네 계세요?”
“…곡성서 왔어요. 뉘셔? 병술이 친구여? 기자여…요?”
“아닙니다. 저는 거시기….”
옆에서 윤병술의 아내 박미영씨가 거든다.
“곡성 큰형님이세요. 마을에서 놉(날품)을 구할 수 없어서 아침에 곡성서 오셨어요.”
“형님? 그럼 동서?”
“네.”
잘 되었다. 일가친척이면 윤병술을 잘 알 것이다.
“엄니 병술이 흉 좀 봐주세요.”
카메라를 들이대고 질문을 하자 분위기가 급 바뀐다.
“병술이 농사 잘 짓고 그 뭐시냐… 참 착해요.”
“아니, 좀 전에 병술이한테 화나신 것 같던데요?”
“아녀! 그냥 우들은 그거이 말 섞는 것이여.”

옆 동에서 멀칭 비닐을 걷어내고 있던 윤병술의 누님께서 건너 오셨다.
누님 낫 가꼬 와서 쳐불자.
아내 그냥 손으로 언능 뽑아불죠.
동서 뽑을랑게 이것도 뭐 보통 일이 아녀.
아내 잘못하면 감자 찢겨버리까 싶응게 글죠.
누님 욱(위)에만 해! 누가 속에다 허까이. 결국은 이 짓을 하네. 깜장 멀칭 하자니께…. 우리꺼는 풀이 고랑에만 있어. 시퍼런 게 네 번을 뽑아도 이 모양이더라고.
병술이 멀칭 색이 뭔데요?
누님 하양 멀칭.
왜 흰색을 했대요?
누님 알이 잘 든다고. 하양이가 뭐 열을 보호해서 씨알 굵게 헌다 해삼서 그렇게 말려도 하더만.
윤병술이 눈은 맞추지 않고 소 닭 보는 소리를 옆에서 한다.
“실험 삼아 해봤응께. 그라고 우리는 늦게 심었슨게….”
윤병술의 아내가 마침표를 찍었다.
“이것도 감사해요.”


“내가 농약을 못 견뎌, 또 사람 먹는 거라”

윤병술은 생산 농산물의 대부분을 학교급식으로 납품한다. 학교급식으로 납품한다는 것은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소리다. 노지 1만 평도 올 연말에는 무농약 인증을 받는 것이 목표란다. 인증이란 땅을 검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잘 생긴 작물 자체가 아니라 땅이다.
“왜 친환경이나 유기농을 고집합니까?”
“내 스스로 농약을 못 견뎌요. 그라고 사람 먹는 거라.”
“공판장 나가는 것보다 학교급식으로 납품하는 게 더 나아요?”
“친환경 농산물은 공판장에 가봤자 어차피 취급도 안 합니다.”
그렇다. 그것이 현실이다. 친환경 채소는 운좋게 소비자조합 직영 매장으로 팔려나가지 않는 한 공판장에서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우리 농사가 구걸하는 농사잖아요. 공판장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버려야죠. 가격은 그 사람들 달란 대로 줘야 합니다.”
“병술 씨 말고 전체 농민을 생각하면 공판장과 직거래 말고 뭔 수가 있습니까?”
“물류를 구례에 가둬야죠. 뭐 때문에 구례 농산물이 가락시장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합니까? 지역 농산물은 지역 물류센터에 집하하고 지역 경매에서 전국으로 팔려 나가는 게 맞습니다.”

그에게 농사 계급장을 달아주기로 했다. 일병 윤병술. 윤병술 농사는 일병 농사다. 일병의 감자는 씨알 잔 것이 많다. 일병은 아직 미숙하고, 일 많고, 무엇보다 고참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지금 윤병술 일병은 맷집을 키우는 중이다. 농부가 농부에게, 세상이 농부에게 쏟아내는 포탄 속에서 그는 여전히 하이바(철모)를 단단히 조여매고 전선을 응시하고 있다. 어딘가에 일병 동기들이 있을 것이다. 윤병술 일병에게 감자 3kg짜리 340개를 펀드 배당용으로 주문했다. 그에게 “펀드 배당용 감자는 선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세상이 사람을 선별하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농부가 자식 같은 감자를 선별할 필요 있는가. 윤병술 일병 구하기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윤병술 일병이 우리를 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윤병술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ybs6

글·사진 권산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해 웹디자인과 인쇄물 디자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부업으로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7년 전 전남 구례군으로 이사했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디자인 일을 한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아버지의 집> <맨땅에 펀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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