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3 17:44 수정 : 2013.04.03 17:44

지율 스님과 나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여러 차례 내성천을 오갔다. 지율 스님 제공
지율 스님을 처음 본 건 2005년 1월이었다. 그날 공기는 몹시 맵찼다. 스님은 청와대 인근 효자동의 깊은 골목 안쪽에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단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날로 79일째였다. 그 전에도 이미 세 차례나 목숨 건 장기 단식을 감행한 터였다. 스님은 노트북을 열어 문서 일을 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얹어놓은 종이 궤짝을 사이에 두고 3시간 남짓 인터뷰를 했다.

나는 윗몸을 최대한 스님 쪽으로 기울여야 했다. 미세한 진동에도 금세 바스러질 듯한 마른 육신에서 목소리는 가까스로 새어나왔다. 그런데도 스님은 몸가짐이 흐트러지기는커녕 인터뷰 내내 한 번도 결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나는 3시간짜리 연극을 마치고 내려온 배우처럼 혼곤해졌다. 합장하고 신문사로 돌아와 이틀 동안 눈물을 쏟아가며 기사를 탈고했다.

스님은 한 달 가까이 단식을 더 이어가다 주변 의료진에 의해 반강제로 실려 나왔다. 나는 기사 한 번 쓴 것 말고 하릴없이 날짜만 헤아렸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그랬다. 한낱 미물들을 위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초인적 싸움을 벌이는 그가 경이로웠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우연하게라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눈물이 났다. 그렇다고 스님의 싸움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율을, 그의 손가락 끝을 보고 있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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