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3 16:23 수정 : 2013.04.08 19:37

한겨레 자료
20대 후반 최아무개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몇 년째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해왔다. 그런데 자신의 언변과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남다른 그는 요즘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다.

“잘나가는 학원강사 연봉이 대기업 월급쟁이보다 낫지 않아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됩니다. 과외와 학원강사 경험이 있고, 이 정도 갖췄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서 학원강사는 홀대받는 직업군이었다. 낮은 급여에 4대 보험과 퇴직금 혜택도 없었다. 늦은 밤, 주말에도 강의 일정이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취직 기회를 놓쳤거나 잃은 사람들이 마지못해 정착하는 유배지처럼 취급됐다. 학생과 학부모는 제도권 밖 스승을 존경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선입견이 깨졌다. 스타 강사, 고액연봉 강사가 속출하면서부터다. 인기 강사 반열에 오르기만 하면 하나의 움직이는 기업이 된다. 부와 명예가 일평생 보장된다. 최씨가 사교육계 진출을 꿈꾸는 이유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학원강사의 고수입 문제가 입길에 올랐다. 사교육 시장에 진출한 386 운동권들이 호된 질타를 받았다. 그때도 스타 강사들은 ‘억’ 소리 나는 연봉을 챙겼다. 사교육이 호황을 누리면서 학원장들도 호의호식했다. “사회의 낮고 어두운 곳에서 헌신(?)해도 모자랄 판에 잘살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은 공개적으로 “386 운동권은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고, 사교육 시장을 키운 주범이며, 학원 장사를 해서 떼돈을 벌었다”고 비판했다.

비판의 이유는 충분했다. 이들의 모습은 아스팔트 위에서 공권력과 최루탄에 맞서 민주화와 사회 변혁을 외치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이들도 “현실적 제약 때문에 뛰어들었지만 뜻하지 않게 고소득을 올렸다. 대학입시 위주의 사교육 시장을 초·중등 시장까지 낮추는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한다. 한때 부와 명예를 좇아 학원의 대형화와 사업 다각화를 꾀하는 등 시장 논리에 매몰되고, 경영 면에서 성과와 수익을 중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언론에 공개된 이들의 모습은 여기까지다. MB 정권 이후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너무 잘살아서 ‘사교육계 386의 변절자’(?)라는 오명을 얻고 난 뒤 10년 가까이 이들에 대한 정보는 한 번도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이들은 학원가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까? 부와 명예를 누리는 탄탄한 자본가 반열에 올라섰을까? 최근 ‘우정파괴’ 논란에 휩싸인 메가스터디 광고는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밉상들’ 소식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나·들>이 사교육 시장 386 운동권의 어제와 오늘을 추적해봤다.

기: 입성

386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에 유입된 시기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건대 사태, 1987년 6월항쟁 등을 주도한 이들의 사회 진출 통로는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다. 수배·구금·투옥·제적 등 ‘빨간 딱지’ 붙은 운동권을 기업이나 관공서 등에서 반길 리 만무했다. 민주화 투쟁에 몸담았던 이들 역시 양심과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독점재벌에 입사하는 것만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학원강사는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특히 투옥 경력이 있거나 수배 중인 운동권이거나, 대학 졸업 뒤에도 조직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학원은 ‘신이 내린 직장’과 다름없었다. 김호진(44·연세대 89학번) 1 하이논술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건대 사태가 사실 운동권을 대거 사교육 시장으로 내몬 거나 다름없지요. 운동권의 씨를 말릴 참이었는지 워낙 많은 학생을 구속시켰습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의 앞길이 다 막혔어요. 하나둘씩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밥벌이도 해야 했고. 386이 사교육 시장으로 진출한 데는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요인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교육 시장은 노량진 중심의 대입 종합학원과 각 지역 소규모 속셈학원,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강의 경력이 일천했던 386 운동권은 주로 후자 쪽에 몰렸다. 교육평론가 이범(서울대 88)2씨는 “개인적 앞가림을 위해서든, 조직활동을 위해서든 돈을 벌어야 했다”며 “처음부터 노량진에 진출하는 경우는 극소수였다”고 했다. 학원을 직접 차린 경우도 허다했다. 다른 자영업과 달리 소자본 창업이 가능했고, 실패 확률도 적었기 때문이다. 이범씨는 “분필과 칠판, 강의 공간만 얻으면 되었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낮았다”고 덧붙였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학원강사, 학원장을 거쳐 메가스터디 대표가 된 손주은(서울대 81) 3 씨다. 1987년 과외를 시작으로 사교육계에 몸담은 손 대표는 3년 뒤 자신의 학원을 차렸다. 1997년부터 대중 강의를 했는데, 일명 ‘손사탐’으로 불리며 서울 강남 일대 인기 강사로 급부상했다. 8명으로 시작한 수강생이 5개월 만에 2천 명까지 늘어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이 40만~50만 원 하던 시절, 그는 한 달에 2천만 원 이상씩 벌었다.

그다음으로 주목받은 인물은 서울 강동 청산학원 대표 최원극씨다. 1990년대 청산학원은 한국외국어대 출신 민족해방(NL) 계열 운동권의 집결지로 유명했다. 비강남권임에도 과학고, 민족사관고, 외국어고 전문학원으로 명성을 쌓았다. 한창 때는 매출이 100억 원을 훌쩍 넘겼다. 사노맹 계열의 장민성(성균관대 81)·박홍순(성균관대 82)씨가 세운 유레카논술아카데미, 민중민주(PD) 계열 초암논술아카데미는 3대 운동권 분파를 대표하는 학원으로 꼽혔다.

이외에 전대협 2기 출신 조동기(고려대 85)씨가 설립한 조동기논술학원, 노원구 학림학원(채광석·성균관대 87), 소피스트논술학원(이선태·서울대 83), 케이스논술학원(황철연·서울대 80), 플라톤·강남청솔학원 등이 386 운동권이 주로 활동한 학원으로 분류된다.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지낸 황광우(서울대 77), 이우학교 교장을 지낸 정광필(서울대 78), 김찬휘(서울대 83), 한석원(서울대 83) 등도 운동권 출신 인기 강사로 이름을 떨쳤다. 정청래 민주통합당 의원(건국대 85)과 정봉주(외대 80) 전 의원 역시 각각 마포구 길잡이학원과 외대어학원을 성황리에 운영하다 정치권에 진출했다.

 

승: 성장

호구지책으로 선택했지만, 운동권이 주축이 된 학원은 큰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학벌 지상주의’의 혜택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범씨는 “당시 학원강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386 운동권처럼 고급 두뇌는 사교육계로 가지 않았다”며 “이른바 SKY, 명문대 타이틀이 있어서 수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으로 대입 전형이 바뀌면서 운동권 학원들은 일제히 단비를 맞았다. 1994년부터 통합적 사고를 중시하는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고, 논술과 본고사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들을 찾는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적어도 이들은 <철학에세이>를 비롯해 인문교양 서적을 대학 재학 중에 두루 섭렵했다. 철학적·비판적·논리적 사고와 추론에 나름 익숙했다. 학회 활동 등을 통해 토론식 세미나에도 단련돼 있었다. 기존 학원강사에겐 생소했던 ‘논술강사’로서 경쟁력은 충분했다.

특히 논술 시장의 확대는 조동기, 초암, 유레카 등 386 운동권 주축의 학원들이 성업하는 데 결정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논술을 비롯한 입시학원으로 학원생들이 몰려들어 학원 규모가 커졌을 뿐 아니라, 강사 수입도 이전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다. 잘나갈 때는 강의로만 매년 수억 원을 챙겼다. 4 이른바 명망 있는 학원들은 한 해 매출이 수십억~수백억 원을 오갔다. 당시 386 운동권이 질타를 받은 데는 이들이 평범한 월급쟁이의 소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수입을 올린 탓이 크다.

운동권 특유의 조직력·친화력은 학원에 큰 성장 동력이었다. 김호진 대표는 “기존 학원·강사들이 돈과 재물을 좇는 경향이 강했다면, 우리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사교육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가 끈끈했고, 유대감도 각별했다”고 말했다.

개인별 맞춤학습 관리, 입시 대응전략 수립, 학부모 교육 등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한 것도 성공 비결이다. 김 대표는 “특히 청산학원은 업계 최초로 차별화된 입시 분석을 한 학원으로 유명했고, 내신 보충 등 학생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했다”며 “입시가 바뀌면 능동적으로 대처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고, 수업 이후 자습·분반수업 등 청산만의 차별화 전략을 실행했다”고 말했다. 이범씨 역시 386 운동권이 대거 진출해 사교육의 한계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서비스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린 점을 높이 평가했다.

무한경쟁을 벌이는 사교육 시장에서 민주적으로 학원을 운영한 것도 되레 보탬이 됐다. 한창 때 초암논술아카데미 강사들은 교육 방식이나 시험 대비책 등을 주제로 밤새 세미나 형식의 토론과 회의를 진행했고, ‘뒤풀이’로 마무리 하는 전통이 있었다. 강의 배정이나 수익 분배에서도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기보다 함께 나누는 방식을 중시했다. 당시 이들 사이에는 원장의 ‘독재(?)’를 인정하면서도 강사의 민주적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나름의 불문율이 있었다.

전: 과욕·오판

“2000년대 초 메가스터디의 성공이 화제였어요. 다들 부러워했지요. 그러면서 지역 소규모 학원들이 하나의 브랜드로 모여서 교재를 만들고 온라인 강의를 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겁니다. 한때 운동권 학원이 주축이 된 학원연합체 ‘백년대계’를 꾸린 적이 있었어요. 그런 모델을 실질적으로 해보면 어떨까, 다들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땐 너도나도 투자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외국계 펀드, 심지어 호텔에서도….” 익명을 요구한 강남의 어느 학원장의 회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학원계에서는 ‘학원-출판-온라인’을 한데 묶어 대형화하는 추세가 경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비자의 원스톱 서비스 욕구를 반영해 영어학원, 수학학원, 영어학원, 교재 등을 한 울타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종합화하려는 취지였다. 2007년 ‘타임교육’은 그렇게 출발했다. 강동 청산학원, 중계동 학림학원, 마포 길잡이학원, 일산 푸른학원, 수학전문 뉴스터디학원의 5개 학원이 사모펀드 티스톤과 결합했다. 이후 하이스트, 미래탐구, 소마에듀, 엘란어학원을 비롯해 타임북스, 랑구아포럼 등의 출판사들도 타임교육 아래 뭉쳤다.

조동기, 박학천(운동권과 연관성은 미약), 초암, 유레카 등의 논술 전문학원들도 경쟁적으로 수십 개 분원을 세우며 몸집을 불렸다. 당시 학원장들이 모이면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김호진 대표는 “다들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선생들이 강의자료를 만들어 강의 준비하기보다 투자받기 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는 데 열중했다. 학원강사가 아니라 기업의 부장·과장·대리처럼 움직였다. 코스닥 상장과 그에 따른 일확천금에 대한 기대가 무엇보다 컸던 것 같다”고 했다.

“돈, 명예,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식들한테 직업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다들 품었어요. 당시 몇몇 선생님은 기필코 성공해서 이 바닥을 떠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어요. 물론 학원을 키우고, 사업 다변화를 꾀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원극 선생이나 이윤호 선생 등은 기대보다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청산학원 최원극 대표는 타임교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자의 반 타의 반 현업에서 물러났다. 조동기, 박학천, 이윤호(초암) 등은 무리한 사업 확장을 꾀하다 자멸했다. 최 대표는 현재 사교육과 무관한 중국 관련 무역사업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초암논술아카데미 강사 일부는 현재 김호진 대표가 운영하는 하이논술에 몸담고 있다. 초암이 경영난을 겪던 2011년, 김 대표가 지분 50%를 인수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잊혀졌다.

환상은 사라지고 비난은 남았다. 둘 사이의 넓은 간극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우리를 비판할 때 386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거든요.” 목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유아무개 원장은 이렇게 항변했다. 한때 무리하게 사업을 확대하고 코스닥 상장이라는 신기루를 좇긴 했지만, 사교육 시장 장악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상하 비판적사고 원장은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의 주축인 386 역할론에 기대를 걸었다”며 “그 희망과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서 2000년대 중반 사교육 시장의 386에 주목하고 비판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바닥에서 성공한 386 운동권은 5%도 채 안 될 겁니다. 사교육 시장이 훈풍일 때 지분을 팔고 떠난 사람 중 윤택하게 사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한때 현업에 있었든, 지금 현업에 있든 대부분 월급 받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산다는 사실입니다.”

사교육 시장이 확장된 흐름 역시 386 운동권이 아닌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1990년대 이후 대치동에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입주함에 따라 노량진에서 대치동으로 사교육 시장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목동, 중계동, 분당, 일산, 평촌 등으로 확대 역시 중산층의 대거 이동과 연관 있다고 본다. 익명을 요구한 이아무개 원장은 “사교육 시장을 장악하고 키운 건 사교육에 있는 386 운동권이 아니라 학부모가 된 386 운동권이다. 한글도 못하는 3살짜리 아기한테 ‘신기한 한글나라’를 시킨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라며 “먹고살 만해진 386세대 부모들의 교육열이 과열되면서 외고나 특목고, 명문대 진학을 목적으로 무리하게 사교육에 올인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결: 빈 껍데기·속 빈 강정

현재 사교육 시장에서 386세대의 흔적을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인기 강사 5 의 명망을 유지하고 있는 강사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현업을 떠났고, 남아 있더라도 지역의 소규모 학원에서 생업을 위해 강의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40대만 되어도 이 바닥에서는 고령이라 은퇴해야 합니다. 학생도 학부모도 나이 지긋한 강사의 강의를 찾지 않습니다. 386세대 강사를 선호하는 학원도 당연히 없지요.” 대치동에서 만난 50대 현업 학원강사의 푸념이다. 그렇다고 사교육계를 떠난 386 운동권들이 목돈을 쥐고 떠난 것 같지도 않다. 김호진 대표는 “절대 그렇지 않다. 지분을 일부 갖고 있긴 하지만 상장 상태가 아니어서 생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걸 갖고 있기 때문에 개인 학원을 차릴 수도 없는 형편일 것”이라며 “한때 이 바닥을 주름잡던 선배 대부분은 지금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한다”고 전했다.

은퇴한 386세대가 다시 사교육 시장 전면에 나설 확률도 거의 없어 보인다. 밤 10시 영업시간 및 수강료 규제에 이어 내신 위주로 외고·특성화고·자사고 전형이 바뀌고, 경제불황이 장기화하면서 향후 사교육 시장 위축이 불 보듯 뻔하다. 대형학원 또는 경쟁력을 갖춘 소규모 학원으로 사교육 시장은 구조조정될 것이다. 메가스터디 같은 ‘대박’ 신화가 나올 확률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 50대가 된 386 운동권 학원강사들, 인기는 고사하고 체력도 열정도 예전만 못하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사교육 시장에 영입돼 이미 맹활약 중이다. 젊고 활기찬 30~40대 강사를 선호하는 분위기는 더욱 확산되는 추세다. 더 이상 사교육 시장에 386 운동권은 없다. 이들이 다시 나서야 할 명분도 없다. 분명한 건 2013년,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은 이들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1 상대적으로 연배가 낮은 그를 인터뷰한 건 그가 청산학원, 초암논술아카데미 등을 거치며 사교육계에 몸담았던 386세대 형님(?)의 고민과 생활 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2 18억 원 연봉을 뿌리치고 교육평론가로 변신한 이범씨는 자신이 교육계에서 받은 충격적인 사건을 세 가지로 꼽았는데, 그중 하나가 스타 강사의 고액연봉이다. 3 손주은 대표는 사교육계에 진출하기 전 노동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여동생이 노동전문지 기자였을 뿐이라는 설과 이에 대한 반론이 분분하다. 4 손주은 대표는 2000년 7월 조진만·이범 씨와 온라인 동영상 강의를 중심으로 하는 메가스터디를 설립, 2002년 코스닥 시장 상장에 성공했다. 2004년 시가총액 1조 원을 달성, 2008년 시가총액 2위까지 오르며 코스닥업계와 사교육업계 ‘대박신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5 메가스터디 성공은 온라인 강좌를 통해 평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틀을 조성했다. 굳이 학원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저렴하고 합리적인 비용으로 질 높은 강의를 접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반면 정보기술(IT)이 교육과 접목되면서 강사가 강의와 콘텐츠, 학생과의 소통보다는 자신의 외모와 몸매를 더 가꾸는 풍토를 조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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