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5 22:54 수정 : 2013.04.19 11:30

노동운동가 이근원씨와 딸 은지양. 시청광장은 아빠에게는 이한열로, 딸에게는 촛불로 기억되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은지야, 넌 여기 서 있으면 뭐가 떠올라?”

“음…. 친구들이랑 촛불집회 왔던 거.”

“어떤 촛불집회? 탄핵 반대, 아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당연히 쇠고기 때지.(웃음) 아빠는?”

“응, 아빠한테는 이한열 장례식이 먼저야. 누군지 알아?”

지난 2월 14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 1992년생 딸과 1960년생 아빠의 수다가 한창이다. 세대가 다른 만큼 광장에 얽힌 추억도 달랐다. 그래도 서로를 알아가는 데는 인색함이 없다. 스케이트장 철거 공사가 한창이던 텅 빈 광장에선 아빠와 딸의 웃음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은지에게 서울광장은 ‘촛불’이다. 2008년 6월, 학교 친구들과 함께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을 때도 아빠 손에 이끌려 나온 적이 있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을 때도 집에서 텔레비전으로만 봤다. 아빠가 묻는다.

“너 그때 왜 나왔어?”

“학교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토론이 벌어졌어. 광우병 소가 들어온다는데 이거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한참 이야기 하다가, 한 친구가 우리도 한번 촛불집회에 나가보자고 하더라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 뭐.”

“그때 매일 나온 친구도 있었지? 그 아이 이름이 뭐더라. 요즘 뭐 하냐?(웃음)”

“응, 있었어. 그런 거에 유독 자부심 갖는 친구가 몇몇 있었어. 근데 아빠?”

“왜?”

“난 그때 가장 신기했던 게 광장에서 아빠를 만나 같이 걸어가는데 주변에 죄다 아빠랑 아는 사람들인 거야. 그거 왜 그런 거였어? 아빠가 그렇게 유명해?(웃음)”

아빠, 이근원은 노동운동가다. 그의 직장은 공공운수노조연맹이다. 조직부실장을 맡고 있다. 1980년 대학에 입학한 이후 줄곧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에 헌신해왔다.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는 아니지만 30년 넘게 한길을 걸었다. 은지가 촛불을 든 날, 아빠도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이 약속하고 만난 건 아니었다. 아빠는 반가운 마음에 은지와 친구들에게 밥을 샀다.

“한마디로 기특했죠. 딸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주고 받았어요. 그런데 딸이 과거에 서울광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이한열 열사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고요. 내게는 아직 너무나 생생한 기억인데 말이죠. 여기 진짜 사람들이 미어터질 만큼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고.”

 아빠에게 서울광장은 ‘이한열’이다. 1987년 7월 9일. 민주화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장례식이 열린 날이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그날의 역사가 은지에겐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빠는 그날,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딸에게 들려줄 역사 이야기를 쓰겠노라고.

 딸에게 ‘아빠’를 말하다  

 서울시 신청사 안에 생긴 시민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2시간여 동안 아빠와 딸이 밀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도 했고, 중간에 기자가 궁금한 걸 묻기도 했다.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만 참석해온 두 사람이 시민청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아빠의 ‘결심’은 조금씩 현실로 구체화됐다. 2010년부터 인터넷 신문 <레디앙>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연재물의 제목은 ‘아빠의 현대사’다. 지금까지 50여 편을 썼다. 5·18 광주항쟁이 일어난 1980년부터 현재까지, 아빠가 몸소 겪었거나 지켜본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담았다. 모든 글은 아빠가 딸 은지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 글들은 3월에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나온다. 책 이름도 <아빠의 현대사>다.

 그동안 역사 이야기를 담은 책은 많지만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 것은 드물다. 그나마 <세계사 편력>을 대표선수로 꼽을 수 있다. 이 책은 독립투쟁을 하다 여러 차례 투옥된 인도의 네루가 딸에게 보낸 196통의 편지글 모음이다. 아빠는 약소 민족도 세계사에서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확신으로 딸에게 세계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금세 고개를 가로젓는다. “에이…. 그건 너무 대단한 책이고요. 저는 그냥 우리 은지가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데 의미를 둔 거라서….(웃음)”

 아빠는 원래 문학소년이었다.

 “사람들이 저보고 과격하다고 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저 순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느닷없는 아빠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을 렌즈에 담고 있던 사진기자가 빵 터졌다.

 국어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아빠의 꿈은 나름 구체적이기까지 했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에 파도리라고 있는데, 혹시 아세요? 거기 파도초등학교라고, 학교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곳이 있어요. 거기서 아이들 가르쳤으면 했어요.”

 “하필이면 나는 그해 대학생이 됐다. 나이보다 한 해 늦긴 했지만 대학생이 된 나는 지긋지긋한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잘 읽지도 않는 <한국문화사>를 일부러 옆구리에 끼고, 갓 배우기 시작한 담배를 물고, 짐짓 심각한 척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 신입생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는 이런 낭만을 허용하지 않았다.”<아빠의 현대사> 중에서

 어린 시절 꿈을 펴기엔 아빠에게 닥친 현실이 너무 엄혹했다. 80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다른 많은 이들이 그런 것처럼 아빠도 운동권 학생이 됐다. “은지, 너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졌어. 5·18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바로 휴교령이 떨어졌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는데 어느 날 우연히 <뉴스위크>에 실린 광주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 계엄군이 총을 들고 학교를 지키고 있는데, 사람을 보면서 참 무섭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거 같아.”

 그날 이후, 아빠의 삶은 늘 고단했다. 전공 공부(문예창작) 대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나서야 했고, 대학을 미처 졸업하기도 전에 안산 반월공단 등지에서 위장취업을 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글로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때론 고통스런 기억도 들춰내야 하는 탓이다. 아빠가 은지에게 들려줄 글을 쓰기로 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은지 할아버지도 해방 직후 좌익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런 사실을 들었어요. 그냥 한의사 일만 하신 줄 알았죠. 아들한테 한 번도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말씀하시지 않은 거예요. 물론 당시 시대 상황이 그래서였지만, 아버지랑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기억이 없는 게 아쉽더군요.”

 은지의 할아버지가 내내 아들에게 침묵을 지킨 데는 집안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 이근원씨의 큰아버지는 1946년 미군정 식량정책에 항의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 뒤 월북한 사회주의자다. 연좌제로 인해 큰아버지의 아들인 사촌형은 어떤 기업에도 취업할 수 없었다. 만해시인학교 교장인 이근배 시인이다. 사촌형의 친구들 상당수도 아버지의 제삿날이 똑같다. 시위 과정에서 같은 날 목숨을 잃은 경우다. 또 다른 사촌형 이근성 <프레시안> 고문은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바 있다.

 “큰아버지 사진을 처음 본 게 불과 5년 전 일이니까요. 민주화된 이후에도 시대가 다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안 사람들끼리도 쉬쉬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래도 아버지가 묵묵히 제가 하는 일을 지지해주셨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라고요. 데모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뒤 훈방이 됐는데, 약값 대신 받은 바바리 코트를 주면서 그러시더군요. ‘형들한테 뺏기지 말라’고…. 당시 데모하는 다른 친구 부모님들은 머리 깎고 가둬버리던 시절이었거든요. (은지를 보며) 너희 엄마도 그때 그것 때문에 가출했었어, 알아?”

 내 기억 속의 아빠, 잘 몰랐던 일들

 “응, 알아. 엄마가 가끔 술 마시면 경찰서에 끌려간 이야기 같은 거 해줬어.(웃음) 근데, 아빠?”

 “왜?”

 “나…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도 아빠가 뭐 하는지 잘 몰랐어.”

 “그으래? 그럼 촛불집회에 나올 때도 몰랐단 말이야?”

 “응. 그때도 친구들이 아빠 뭐 하는 분이냐고 물으면 그냥 얼버무리고 그랬어.”

 막연히 엄마에게서 아빠가 하는 일이 ‘노동운동’이라고 들었지만, 그게 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학교에 내는 서류 가운데 아빠의 직업란엔 ‘회사원’이라고만 써냈다. 많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린 시절엔 아빠가 부디 게임하는 걸 좋아하게 돼서 게임기를 많이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3년 전 은지도 대학생이 되면서, 그리고 아빠가 쓴 글을 하나씩 읽고 나서야 ‘감’을 잡았다. 글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았다. 등장인물도 너무 많았고, ‘전노협’이니 ‘국민 승리21’이니 하는 수많은 단체의 이름도 헷갈렸다. 딸은 잠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 시대를 직접 살아왔으니까 아는 게 많지만, 나는 아니잖아. 이걸 다 어떻게 외우냐고!”

 “(웃음) 은지야. 너한테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일부러 사람들 이름을 많이 넣었어. 왜냐면….”

 아빠의 속사정은 이랬다.

 “백조가 위에서 보면 참 우아하지만 그 밑에 굉장히 많은 발이 분주히 움직이잖아.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역사도 그런 거야, 은지야. 동생 은수가 ‘호빵맨’으로 부르는 아저씨, 노회찬 같은 분들 말고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 이광섭이라고…. 아빠 선배가 한 분 있는데 반월공단에 같이 다니다 일주일 만에 손가락 세 개가 프레스에 잘렸어. 이런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주겠니….”

 대신 아빠와 엄마, 그리고 엄마 뱃속의 자신이 등장한 대목은 줄줄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다고 했다. 아빠는 1989년 위장취업한 상태에서 엄마와 결혼식을 올렸다. 만년필과 볼펜, 라이터 등을 만드는 공장에서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려고 안간힘을 쓴 때였다. 학력과 이름, 나이 등을 속이고 취업한 터라 하객도 거의 없었다. 정말 가까운 몇몇만 불러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치렀다. 신혼여행도 1박2일 짧게 수안보로 다녀왔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있는 은지는 요즘 아빠의 책에 넣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표지 그림까지 포함해 모두 7장을 그려야 한다. 시대별로 분위기에 맞는 그림을 구상하느라 끙끙대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도 아빠와 함께 하는 작업이 즐겁기만 하다.

 “되게 좋은 건 뭐냐면요, 아빠가 겪은 역사를 말이 아니라 글로 주는 거예요. 글이나 책으로 아빠를 만날 때는 약간 타인이라는 느낌이 있잖아요. 조금 거리 두기를 하는 거라고 할까요? 그런 식으로 좀 떨어진 상태에서 읽으니까 감정이입도 더 잘되고 아빠를 이해하기도 쉽고….” 촬영에 열중하던 사진기자가 한마디 거든다. “아버지를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몰입하는 대통령 당선인보다 낫네요.”

 회고가 아닌 공유를 위한 글쓰기

 “아빠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알아?”

 “뭔데?”

 “내가 니맘 때는…, 이렇게 이야기 시작하는 사람들!”

 아빠는 1980년 5월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몸에서 나는 최루탄 냄새가 버스 안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재채기에 기침을 하는 승객들이 미안해 맨 뒷자리로 갔다. 그때 술이 얼큰하게 오른 한 승객이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너 데모했구나. 임마, 나도 니 나이 때는 그랬어.’ 아빠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나중에 후배가 생기면, 또 아이를 낳게 되면 절대 그 말만은 하지 않겠다고 일기장에 썼다.

 “과거에 한 일을 훈장처럼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싫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과거 운동 경력을 팔아서 정치권에 간 사람들 별로 맘에 안 들고요. 현재가 중요한 거잖아요.” 이번 책이 회고담이 아닌 공유를 위한 매개가 되길 바랐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빠는 이번에 책을 내기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해 다른 이의 ‘기억’을 기부받을 계획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1987년 6월항쟁 일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요. 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치소에 있을 때 거든요. 언젠가 영화감독 변영주가 6월항쟁의 기억을 페이스북인가에 올려놓은 걸 봤는데 되게 감명적이더라고요. 그런 몇 가지 역사 현장에 대한 기억을 기부받았으면 해요.”

 은지에게 들려줄 역사 이야기를 쓰면서 아빠는 “사분오열된 진보정당 부분을 쓸 때가 가장 안타까웠다”고 했다. “정말 미안한 게 뭐냐면, 괜찮은 진보정당 하나 물려주고 싶었거든요. 얘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을 했는데요. 그 학교는 당(그룹)을 만들어야 출마를 할 수가 있어요. 그때 은지네 당 이름이 ‘바지락’이었어요. 바꿀 건 바꾸고 지킬 건 지키고 즐길 건 즐기자, 바지락…. 그 이름이 좋아서 나중에 진보정당 만들 때 써먹으려고요. (은지를 보며) 은지야, 아빠가 다시 만들어줄게, 그거 때문에 아빠 어제도 술 마셨어.(웃음)”

 위장취업으로 전전하던 시절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빠가 하는 일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빠는 요즘 KT&G의 자회사 한국인삼공사에 결성된 노조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한때 250명이 넘던 조합원이 40여 명으로 줄었고 노조 간부 3명이 해고된 곳이다. 부여인삼창 앞에서 천막 농성을 벌인 지 150일이 넘었다.

 “은지야, 너도 천막에 한번 와봐. 별로 춥지 않아.(웃음) 지금 노동조합이 힘이 많이 없는 것 같지? 그렇지 않아.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고 있는 어떤 것들이 실은 누군가가 많이 싸워서 얻어낸 것일 수도 있어. 누군가가 힘들게 싸우면 다른 쪽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게 있거든. 마구잡이 정리해고 같은 게 그래.”

 이거, 어디선가 많이 듣던 얘기구나 싶었다.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 나오는 지로의 아버지가 겹쳐졌다.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발 한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하지만 너는 아버지를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바디로 바보야, 바보.”<남쪽으로 튀어> 중에서

 인터뷰가 끝난 뒤 아빠와 딸은 그 영화를 보러 갔다. ‘치맥’(치킨과 생맥주)도 곁들일 예정이라고 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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