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7 22:15 수정 : 2012.12.27 22:15

병역 거부를 결심하면서, 세상에 이보다 더한 어려운 결정은 없을 것 같은 비장한 각오는 다지지 않았다. ‘감옥갈 결심까지 했는데, 앞으로 살면서 어지간한 고민은 다 쉬울거야’라는 생각은 했다. 오만이었다. 병역 거부 결심할 때가 가장 쉬웠다. 세상일이란 게 병역 거부처럼 딱 명확하게 보이지 않더라. 나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과 대화나 토론, 혹은 협상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양쪽 모두 논리와 이성은 간데없고 감정만 난무한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나조차 감정에 휩싸인 나를 믿을 수 없다. 이럴 때, 따끔하고 정확한 조언을 해줄 현명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된다.

요즘은 그런 현명한 이를 ‘멘토’라고 부른다. 나는 멘토라는 말, 멘토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권위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386세대’들과 비교하면, 멘토라는 사람들이 분명 더 좋다. 그래도 우리 이야기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만약 어느 젊은 노동자가 회사에서 부당하게 잘렸을 때, 386세대는 해고된 젊은 노동자에게 “회사를 상대로 다투려면, 너는 잘 모르니까 우리한테 배워!”라고 소리 지른다. 멘토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 원래 젊음은 다 아픈 거야”라고 조곤조곤 이야기하겠지. 둘 다 해고된 노동자가 복직할 수 있도록 함께 싸워줄 것 같지는 않다. 진정 필요한 사람은, 윽박지르며 가르치려는 사람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주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고 냉철하게 알려주면서, 내가 겪는 어려운 일에 함께 싸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용석 출판노동자, 병역거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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