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7:32 수정 : 2013.01.08 17:32

만 나이로 스물다섯에 재벌그룹을 만들겠다는 야망을 가진 청년이 있었다. 다니던 대기업도 하루아침에 그만뒀다. 샐러리맨 대여섯 명을 스카우트해 자기 회사를 차렸다. 1978년 가죽을 수입해 ‘세무’(섀미·Chamois) 점퍼를 만들어 수출하던 주제실업(主帝實業)이었다. 서울 구로동 봉제공장에 주문생산을 맡겼다. 당시로선 국내에서 유일하게 어깨선 봉제 기술을 갖췄다. 덕분에 실적도 나쁘지 않았다.

임금 ‘제’(帝)가 들어간 회사명. 주변에선 건방지다고 했다. 형님에게서 빌린 1천만 원이 종잣돈이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한성실업을 자본금 500만 원을 가지고 시작하던 시절이었어요. 내가 김 회장보다 ‘따블’로 출발한 거였지요. 직원들도 에이스로만 골라 왔고.”

종합상사를 만들려던 그는 “귀 후비는 면봉까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뭐든지 팔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기 때문이었다. 샘 솟는 에너지를 어찌할 수 없어 아침에 일어나면 지구를 깨물 수 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주제건설·주제중공업·주제석유화학·주제항공 등 회사 설립준비위원장 직함만 10개가 넘었다. 주제그룹을 만들려는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이 꿈은 1년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돈줄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대기업맨’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청년은 지금 경제관료로 공직에서 뼈를 묻고 있다. 바로 김석동(59) 금융위원회 위원장의 이야기다. 2012년 12월 21일, 서울 세종대로 금융위원회에서 김영배 <한겨레> 경제부장과 <나·들>이 그를 만났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담 김영배 <한겨레> 경제부장, 정리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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