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10:36 수정 : 2014.06.13 13:28

서울 ‘강남 키드’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집에서 나오는 등록금·학원비와 도심 학교의 입시체계가 맞물려 있다. 집안 사정으로 이 균형에 파열이 나는 날이면 강남은 어느 곳도 갈 수 없는 감옥이 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에서 영어 조기교육을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물론 나는 일을 좋아하진 않아. 나도 빈둥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훌륭한 일에 대한 공상이나 했으면 좋겠다구. 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나는 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좋아한다구. 그건 자아 발견을 할 수 있는 기회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아는 것인데, 이 실체야말로 다른 사람들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해. 다른 사람들로서는 외양만 볼 수 있을 뿐 그 외양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결코 알 수가 없는 법이야.” -조지프 콘래드, <암흑의 핵심>, 민음사, 66쪽

나는 카페에 앉아 압생트를 마시는 친구들을 바라본다. 그놈들은 뭐가 좋은지 자기들 이야기에 넋을 놓고 등을 동그랗게 말아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하며 심각하게 떠들다가도 옷차림이 화려한 아가씨의 등장에 넋을 놓기도 한다. 그럴 셈이라면 물랭루즈에 죽치고 앉아 있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시끄러운 음악에 묻혀 사라지는 새틴 드레스의 사각거리는 소리 대신 박자에 맞춰 드러나는 무희의 다리를 구경하거나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나는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어도 함께 춤을 출 수는 없다. 나는 발이 잘 닫지 않는 카페의 의자에 올라 앉거나 가끔은 바 위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인다. 내가 13살이던 날, 나는 불운한 사고로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는 힘과 어른스러운 키를 모두 잃고 말았다. 나는 로트레크,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다.

나는 왜 그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왜 언제나 그들을 바라보기 위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일까? 어느 댄스홀의 한구석에서, 물랭루즈의 홀 가장자리에서, 혹은 테이블에 모여 앉은 친구들과 조금 떨어진 바에서 나는 그들을 바라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친구들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마음껏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나는 나의 시선을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태도 덕분에 나는 모순 속에 갇혔다. 무엇에든지 몰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죄책감이 자리한 만큼 온전한 기쁨을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바라보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채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였다. 이 시선은 죄책감을 강화하고 타인의 평가에 대한 압박감으로 바뀌기도 했다. 내게는 일종의 감옥이었다.

로트레크의 그림에서 발견한 나

2014년 봄, 지금 나의 시선은 27년 동안 이어온 나의 지나간 삶을 향해 있다. 나는 과거의 ‘나-들’과 나의 시선을 동시에 바라본다. 마치 타인을 바라보듯 나를 보는 나를 나 자신이 의식한다. 내가 로트레크의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그림에서 나의 시선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불편한 몸으로 선뜻 춤추러 나설 수 없었으면서도 언제나 물랭루즈를 찾았듯, 나 역시 한 번도 진짜 소속감을 갖지 못했으면서도 나의 집과 나의 학교를 포기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그곳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나는 1987년 서울 강남에서 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63년 서울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자기보다 2살 많고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대단한 수재는 아니었지만 형제들 중 공부로는 가장 나아서 할머니의 기대를 독차지했다. 결국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가져간 며느리가 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에게는 최고의 아들이었지만 저간의 사정은 그런 할머니의 믿음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마친 아버지는 내 외할아버지의 보증을 통해서야 첫 직장을 얻을 수 있었을 정도다. 게다가 신혼살림을 차린 서울의 아파트를 얻는 데도 외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결혼 직후 신혼집을 시집에 넘기고 다른 아파트의 전세를 얻어 사는 게 어떠냐는 시어머니의 이야기에 내 어머니가 기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부산에서 마쳤다. 이후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오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딸 둘에 아들 셋으로 구성된, 당시로서는 흔한 규모의 가족이었다. 흔하지 않았던 건 다섯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넷째인 어머니가 공부로는 가장 나았다. 외할아버지는 총명한 어머니를 예뻐하셨지만 서울로 유학을 보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화여대를 무리 없이 들어갈 성적을 받았지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길 원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면 두말없이 유학을 추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이를 계기로 어머니의 마음속에 서울대가 깊이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어머니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7년생인 외할아버지의 입지전적 삶이 그 바탕에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전쟁에 끌려갔다. 무장은커녕 식량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던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와 전쟁 영웅이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극적인 무용담에 따르면 그렇다. 나는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학도병으로 시작했음에도 이후 화려한 군인 경력은 외할아버지의 무용담을 더욱 확실하게 웅변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시작해 베트남전쟁을 거쳐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경험담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사지를 헤쳐나와 쌓은 경력으로 다섯 자녀를 모두 교육할 수 있었다는 점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어머니는 대학 다니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을 오가기 시작해 서울에서 자주 만나는 일군의 대학생 친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도 거기서 만났다. 아버지는 당시 상황에서는 당연하게도 운동권의 일원이었는데 맨 앞줄에 서는 적극적인 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슬 퍼런 당시에도 수배되거나 감옥에 가는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서슬이 더 가까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 흔한 대학생의 무용담이나 별다른 시련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강남키드’의 문화가 있는 삶

첫 신혼살림을 시작한 논현동 20평형대 아파트는 당시 가격으로 3천만원 중반대였던 것 같다. 당시로는 드물게도 자가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나는 거기서 태어나 그 뒤 27년을 서울에서 살아왔다. 너무 어린 나이라 집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머니는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술학원에 다니고 영재교육학원에 나갔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사립 유치원에 다닌 것은 물론이다. 이런 본격적인 조기교육 투자가 가능해진 데는 당시 강남의 열띤 분위기도 한몫했지만 어머니의 사업이 궤도에 오른 덕이 컸다.

어머니의 사업은 여행사였다. 1989년을 기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자 해외여행객이 급증했다. 이미 해외여행에 대한 수요는 충분했던 것이다. 해외 유학 경험과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배려로 미군 자녀들과 만날 수 있었던 어머니는 회화 실력이 유창했고, 유달리 적극적인 성격으로 사업을 크고 빠르게 키워냈다. 그 덕분에 나는 어머니 얼굴을 보는 대신 학원 선생님과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를 보는 날이 많았다. 1992년에는 압구정동의 30평형대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내림세여서 2억5천만원 정도에 산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림세이기는 했지만 결혼 이후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올랐고 어머니의 사업도 성공 가도를 달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최신 전자제품을 꼭 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만, 앞선 것에 대한 감각과 집착은 내가 어려서부터 유난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특히 강남에서의 삶이 성공적인 궤도에 진입하자 나와 당신의 인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지금이야 흔한 이야기지만, 당시 어머니는 외국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은 모두 한 가지 이상 악기를 다룰 수 있다고 들었다며 내게도 음악을 배우라고 종용했다. 나는 음악·무용·미술 학원을 두루 다니는 것보다 미술에 집중하겠노라 고집을 피웠기 때문에 멋진 중산층의 딸이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당시로선 구경하기 힘든 120색 수채화 색연필을 받게 되었다. 물론 여행사 일로 외국에 자주 나가는 어머니의 선물이었다. 많아봐야 36색 크레파스로 바라보던 색이 120가지가 되자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듯했다. 어머니는 영국의 해러즈백화점에서 외투를 사오곤 했는데, 튼튼하게 만들어진 덕분에 아직까지도 그 옷들을 입고 있다.

문화가 중심에 놓인 중산층의 아름다운 삶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입시 전쟁의 한복판에 서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꾸준한 미술 교육으로 그림에 두각을 보인 나는 예원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다. 정식 학교가 아니라 졸업할 때 학력 검정을 위한 시험을 따로 쳐야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지만 단 하나의 예술 전공 중학교이며, 이후 예고와 서울대까지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의 초입이었다. 경쟁은 상상을 초월했다. 6학년 한 해를 등교하지 않고 입시 준비에 할애하는 것을 학교에서 허락할 정도였다.

입시의 무게가 한층 무거워진 데는 집안 사정이 급변한 것도 한몫했다. 훗날 “한국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호황과 소비문화 분위기를 타고 승승장구하던 어머니의 여행사는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사라졌다. 외환 거래를 하던 계좌가 동결되는 한편, 어음이 모조리 부도나는 바람에 손쓸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경매로 넘어간 집의 명도 집행으로 아파트에서 쫓겨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신사동 등의 월세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직업은 채권 추심인으로 바뀌었다. 그 채권은 어머니 자신의 것이었다.

1년여의 수금 끝에 우리는 다시 1억4천만원을 가지고 압구정동의 전세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예원 입시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입시에 걸린 대강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1년 내내 그림을 그린 기억밖에 없다. 입시를 위해 밤 11시까지 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공부하는 것보다 그림이 더 좋았지만 인생을 걸고 그림을 그린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림으로 모의고사를 본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꾸역꾸역 시험을 보긴 했지만 평가 시간이 되면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내가 입시에 몰입하지 못하는데도 그런 결과물을 남 앞에 보이고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연습보다 실전에 약한 타입이 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미술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피난 생활

예원 입시는 성공했다. 어떻게 합격했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나에겐 여러 가지 탈출구가 생겼다. 우습게도 첫 번째 도피처는 공부였다. 어머니의 기대가 예원 입시에 성공한 미술에 기울수록 나는 공부에 힘을 쏟았다. 아예 공부로 전교 1등을 했다. 다른 도피처는 그야말로 도피처다운 것이었다. 바로 미션스쿨인 예원의 선교부장 자리였다. 때때로 실기 연습에서 도망나와 기도실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 예고 입시에 낙방했다. 그러고는 예원 건너편에 자리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으니 이제 나의 본업은 공부가 되었다. 학교에서의 기대도 대단했다. 난데없는 ‘서울대 준비반’이라는 서슬에 또다시 부담감이 엄습했다. 공부는 더 이상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예원에서 예고로 진학하지 못해 깨달은 것도 있었다. 나는 그곳이 좋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러 가던 친구들이 그리웠다. 입학하자마자 다니기 시작한 화실에서 그림을 재발견했다. 예원 3년 내내 지지부진하던 그림 실력이 몇 달 사이 어머니가 채권을 추심하듯 늘어갔다. 그리고 예고 편입에 성공했다. 애당초 입시보다 훨씬 어려운 편입 시험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다시 미술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도망치기 위해선 먼저 그곳에 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예고 입시 실패로 배운 셈이었다. 내가 갇힌 감옥의 구조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시점이 아닌가 싶다.

예원과 예고는 입시에 최적화된 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전국에서 지원자가 모이지만 대개 서울 출신이다. 예원은 학교에서 버스를 운영한다. 내 기억으로 학교에서 가장 잘사는 집 아이들은 평창동이나 성북동에서 왔다. 그리고 가장 많은 학생을 싣고 오는 버스는 강남, 그러니까 압구정동이나 대치동에서 오는 것이었다. 예고에선 스쿨버스를 운영하지 않는다. 학교 친구들 중에는 부모님이 고용한 운전 기사와 친한 경우가 많았다. 예원 시절, 한번은 친구들과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나 혼자 지하철 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런 애들은 예원 시절에 얌전하다 예고에 가자마자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늦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대신 취향만은 조숙했다. 영화를 보기 위해 광화문에 위치한 씨네큐브를 찾았다. 거기서 예술영화를 보았다. 음악은 외국의 인디음악이나 얼터너티브를 선택한다. 자우림은 중학교 1학년, 음악 입문용이었다. 이후 델리스파이스나 롤러코스터의 음악을 들었다. 광고에 나온 이국적이고 특이한 음악을 찾아내 친구들과 돌려 듣는 재미도 있었다. 우리는 주로 ‘엔티카’(www.entica.com)에서 음원을 구하곤 했다. 도서부 친구들 사이에선 일본 소설이 유행했다. 그러다 곧 프랑스 소설로 옮겨갔다. 만화도 있었다. 순정만화는 초등학교 때까지였다. 일찍 눈뜬 친구들은 만화잡지에 연재되는 만화에 손대기 시작했다. <원피스> <최유기> <트라이건> <봉신연의> <샤먼킹> 등에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을 망라했다. 여기엔 은밀한 취미도 함께했다.

일찍부터 입시에 시달린 고단한 마음을 감추고 새침한 듯 자기만을 챙기면서 단체활동에는 무심한 모습을 보이던 아이들은 하나의 행사에는 열광적으로 참여했는데, 그것은 바로 합창대회였다. 예원과 예고에는 미술뿐 아니라 기악, 성악, 무용 전공생들이 함께 다니고 있었는데 노래와 가장 인연이 없을 미술 전공생들의 실력도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회를 앞두고 성악과 교수들의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합창에는 우리를 재발견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안식처이자 감옥, 탈선할 수 없다

내가 예원에 입학하자 나의 아파트 삶도 끝났다. 어머니의 사업은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이미 1997년 이후의 세계는 빈손으로 시작하는 소규모 자영업에는 가혹했다. 2000년 이후 10여 차례 갖가지 이유로 이사를 다녔다. 특기할 사항은 그곳은 모두 강남구의 다세대주택, 혹은 다가구주택이었다는 점이다. 아마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지역인 강남구에서의 그럴듯한 삶은 외환위기 이후 끝나버렸지만, 1987년부터 1997년까지 10년간 가꿔온 생활조직과 미래의 전망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나의 입시미술학원이 여기에 있고 어머니의 몇 가지 아르바이트와 마침내 자리를 잡은 영어 과외도 이곳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삼고서야 가능했다. 우리는 강남구에 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의 생활 공간은 학교가 있는 도심, 집과 학원이 있는 강남구,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지하철이 전부였다. 강남구의 집에서 나오는 학비, 학원비와 도심 학교의 입시 체계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었다. 들쑥날쑥한 집안 사정으로 이 균형에 파열음이 나는 날이면, 나는 집과 학교 중 어느 곳에도 갈 수 없었다. 외부가 없었으므로 내가 의지할 공간은 집과 학교 사이에 놓인 지하철뿐이었다. 역을 빠져나와 바라보는 햇살은 언제나 나를 감시하고 옥죄는 어머니의 눈길 같았다. 실제로는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삐삐와 휴대전화가 원흉이었지만. 시내를 관통해 시청역에 도착하면 2호선 순환선에 몸을 싣는다. 지하철 정액권은 3시간이 지나면 다시 요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3시간을 버틴다. 그러니 달리 좋아하는 역이 있을 리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두 번의 가출을 시도했다. 지하철도, 버스 종점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 터지면 어떡해서든 바깥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시의 눈을 피해 먼 곳으로 나서자 비로소 나를 감시하는 내 존재가 분명히 드러났다. 나는 조금의 탈선도 하지 못했다. 안심하고 잠을 잘 곳이 없어 뜬눈으로 버티다 돌아온 적도 있다. 처음 꿈꾸었던 미래에서 벗어났지만 나와 어머니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했다. 나는 좋았던 과거에 설계했던 미래의 청사진을 따라 살고 있다. 그것이 이미 신기루로 판명이 났음에도 변한 것은 없다. 그리고 나는 과거에서 온 미래에 속하기를 힘쓰면서도 현재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방황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감옥은 아마도 여기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붙임 아니나 다를까, 나는 미대에 입학했다. (예고에서 미대에 가지 그럼 어디에 가겠는가. 가끔 예외의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전공을 디자인으로 바꾸었다.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내 시선은 차라리 디자인 작업에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업에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지만 도무지 전망을 알 길이 없는 순수예술을 하는 것보다 직업을 가지고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겠다는 결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디자인으로 미술에 안착해보려던 나의 시도는 곧 실패했다. 장학금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학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번의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디자인업계의 실상을 배우고 말았다. 결국 나의 졸업 작품 주제는 돈 문제로 귀착됐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나의 미술 교육에 얼마를 썼으며 앞으로 나는 미술 교육을 발판으로 얼마를 벌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미술학원에 처음 다니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던지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지능의 민주화, 기회의 비민주화

아직 유치원도 다니지 않는 6살 미경이는 특기가 많다. 미경이가 다니는 학원 목록은 다음과 같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용학원에서 발레와 고전무용을 배운다. 한 달에 3만5천원이다. 화·목·토요일 사흘은 월 2만5천원에 바둑을 배운다. 매주 일요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재능교육원에서 바이올린, 시조, 한문을 배운다. 두 달에 7만원이 드는 곳이다. 집에서도 노는 것은 아니다. 한 달에 9천원을 내고 학습지를 구독한다. 송파구 둔촌동의 체육센터도 나간다. 한 학기에 21만원을 내는 이곳에서 수영과 각종 체육 수업을 받는다. 1989년 8월19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획 연재 ‘다양화 사회’ 24회에 실린 조기교육 열풍에 관한 내용이다.

미경이네 집에서 미경이의 학원비로 한 달에 쓰는 돈은 10만원이 훌쩍 넘는다. 같은 해 6월8일 <경향신문>에 실린 노동부의 ‘매월 노동문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 산업의 평균 월급여는 41만2573원, 정액급여로 따지면 30만2133원이었다. 당시 대기업의 월급이 40만~50만원 선이고 연말 보너스로 100~300%를 받는다고 생각하더라도 미경이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는 소득에 비해 적지 않다. 기사에 등장하는 미경이 어머니는 경제적 부담을 호소하면서도 주위에서 다 하기 때문에 자신 역시 그만둘 생각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같은 기사에서 인용한 서울 강남교육청의 통계를 보면, 강남구의 경우 지난 1년간 음악, 미술, 연극·영화 학원이 21곳 증가했고 규모가 더 작은 예체능 과외 교습소는 63곳이 증가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조기교육 열풍은 새로이 부상하는 중산층의 과소비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득에 비해 과해 보이는 사교육비를 일찍부터 투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동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실질지수로 연평균 10%가 넘는 경제성장에 뒤이어 서울의 주택 가격도 급등했다. 연말 보너스와 자산 소득을 동시에 얻은 중산층은 1987년 <동아일보>에 소개된 영국 퍼블릭스쿨의 귀족 교육에 큰 감명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기자가 조기교육 열풍이 한 계층에게만 집중되는 현상을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자는 민주국가와 경제 수준을 모두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능의 민주화” 역시 이루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지능의 민주화는 대학 정원 자율화로 실현됐다. 교육과 입시 관련 산업 역시 급성장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대학 정원 책정 권한을 단계적으로 대학에 일임하겠다고 발표한 이래,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학생 정원에 관한 사항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학칙으로 정하도록 함’으로써 대학 정원이 크게 늘었다. 1990년 158만 명이던 전국 대학 정원이 1995년에는 221만 명, 2000년에는 313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능의 민주화가 경제활동 기회의 민주화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의 2013년 산업디자인 조사에 따르면, 330만 명이 넘는 현재 전국 대학생 중에서 디자인 전공 대학생은 약 13만 명으로, 2013년에는 2만1689명이 졸업하고 1만1413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2010년 1만3135명이던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2012년 3만1291명으로 늘었다.글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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