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5:58 수정 : 2014.03.30 14:16

공무원 상품으로 대출받은 1억원도 서울에서 혼자 살 만한 전세를 구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전세 1억원에 1년 이자 400만원은 집 구하는 자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뉴시스
2년여의 준비 끝에 국가직 9급 공무원이 된 것은 2008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독립이라 함은 물론 부모로부터의 독립이요, 운동이란 이 과정이 그다지 순탄하지 않은데다 설사 따로 산다 해도 생활의 여러 부분을 부모의 그늘에 허용하고 마는 현실을 자조 섞어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지방 국립대를 졸업했다. 이곳 분위기는 묘하기 짝이 없었다. 문과대의 특성상 남학생 수가 적은 것이야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이곳은 적어도 너무 적었다. 한 학번에 한두 명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숫제 기계과에 다니는 여학생 수만도 못한 거였다. 설명은 간단하다. 여기는 바로 지방이며 국립대인 것이다. 국립대의 입학 성적은 서울의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였다. 그러나 지방에 사는 딸 된 사람으로서의 사정은 아들과는 다르다. 부모들은 아들만은 타지에 홀로 유학 보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집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려 애쓴다. 그러나 딸에게는 고리타분한 염려가 더 큰 법이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조금 더 좋은 성적을 받아 국립 서울대에 입학할 수만 있었다면 나도 좀더 이른 시기에 서울로 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중간한 사립대에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국립대가 낫지 않으냐는 부모님의 주장을 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국립대 캠퍼스에는 공통의 우울함이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이거나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서울로 가지 못한 억울함이었다. 게다가 내 부모님은 통금 시간마저 빡빡하게 정했다. 밤 11시 전에 집에 도착해야 하는 대학생활은 신데렐라보다 나을 게 없었다. 친구들과 술자리에 앉자마자 시간을 확인하고는 첫 술잔을 들기도 전에 술맛을 버리는 것이다.

첫 발령지는 집과 1시간 거리에 있는 경남 밀양이었다.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전화 연락을 목요일에 받았다. 조금 무리하면 집에서도 통근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독신자 기숙사가 주어지는 이 기회를, 드디어 부모 품에서 벗어날 이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마음먹으면 집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이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의 독립운동은 마치 아기가 젖을 떼듯 집과 1시간 거리의 공무원 독신자 기숙사에서 시작됐다.

생애 첫 독립, 밀양의 독신자 기숙사

밀양의 공무원 기숙사는 2층 건물에 6개의 방이 있는 구조였다. 한 사람에게 배당되는 한 방에는 개별 욕실이 딸려 있었다. 주방과 세탁실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관리비와 보증금은 국가에서 보조해주었고 수도광열비만 본인 부담이었다. 당시 한 달 월급이 120만원이었다. 주말마다 부산에 있는 집에 다녀오는 차비에 점심 밥값 정도에다, 도시가스가 없는지라 겨울이면 추가로 난방비 20여만원이 나갔다. 자취를 위한 집세가 따로 들지 않는데도 저축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조적 문제도 있었다. 문자 그대로 구조적 문제였는데, 바로 바닥이 기운 것이다. 좁은 방바닥에도 구슬을 놓으면 점점 가속도가 붙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원인은 지반 침하였다. 기숙사를 지은 자리는 원래 논이었다. 논바닥을 제대로 다지지 않고 집을 얹어 한쪽이 내려앉은 것이다. 함께 일하던 과장님이 직원들 자다가 허리 나간다며 걱정해주었다. 이 걱정이 말뿐은 아니어서, 곧 지반 보강 공사와 기운 건물의 보수 공사가 이어졌다. 여기서 3년을 살았다.

독립운동이 획기적 전기를 맞은 것은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다. 밀양에서 ‘예방주사’를 맞은 어머니는 서울행도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무엇보다 서울에도 독신자 기숙사가 있었다. 2007년에 준공된 건물로, 국정감사에서 ‘호화 숙소’로 구설에 오른 적도 있다고 하여 내심 기대가 컸다. 문제를 제기한 국회의원은 어디서 사는지 모르겠으나 호화 숙소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두 명이 함께 쓰는 기숙사는 13평(43m²) 정도의 크기로 작은 주방 겸 거실과 욕실, 그리고 방 2개로 구성됐다. 방 하나는 간유리 미닫이문으로 막아, 거실을 겸할 수 있는 방이었다. 내가 들어간 방이 바로 여기였다. 3평(9.9m²)도 되지 않는 방에 붙박이장까지 놓여 있었다. 일본 소설에 늘상 등장하는 ‘1평 반짜리 방에서’로 시작하는 구절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새장은 새가 날개를 편 길이의 5배는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는 운동 부족으로 몸이 약해져서 일찍 죽게 된다. 나도 이 좁은 곳에서 일찍 죽을 수는 없어 좀더 자주 밖으로 나갔다.

여름에는 더 자주 나갔다. 2012년 여름은 유독 더웠다. 기숙사는 복도식이어서 바람이 통하게 하려면 현관문을 열어야 했다. 현관문을 열면 모기가 습격했다. 에어컨은 없었다. 선선한 가을이 오고 기숙사에서 산 지 1년이 되어가자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세는 따로 없었고 관리비가 한 달에 6만8천원이었다. 수도광열비는 따로 냈다. 한 달에 주거 용도로 들어가는 돈이 20만원 정도였다. 서울의 주거비를 생각한다면 저축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했다. 공무원 기숙사는 2년 거주가 보장되고, 새로운 입주 신청자가 있으면 오래 산 순서대로 방을 비우게 된다. 이른 결심을 이끈 것은 공무원 대출 상품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기관과 제휴를 맺고 있는 은행에서 출시한 대출 상품은 고정금리 4%에 1억원까지 대출이 가능했다. 연차가 늘어나면 한도도 함께 는다. 주변 공무원 중 결혼해서 아이 키우는 집에서는 이 대출을 쓰지 않는 경우가 없다. 당장 갚아야 하는 독촉이 없으니 적당히 관리하다 퇴직 때 퇴직금으로 한꺼번에 갚는 방법을 쓴다. 기혼에 군필인 남자의 경우 금리는 3.6%까지 내려간다.

서울 발령과 방 구하기 대소동

돈을 마련한 뒤에는 집을 알아봐야 한다. 집을 알아보려면 먼저 어디에 살지를 정하고 근처 부동산 중개업자의 도움을 받지만 중개비를 아끼고 급하게 나온 좋은 물건을 구하기 위해 직거래를 하기도 한다.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cafe.naver.com/kig) 같은 인터넷 카페가 성황이다. 세입자가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이사해야 할 경우 집주인을 대신해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 게시물의 표현은 번역을 거쳐야 한다.

예를 들어 ‘환기가 잘된다’는 외풍이 심하다는 뜻이다. ‘채광이 좋다’는 여름에 매우 덥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인이 친절하다’는 언급을 보면 집주인이 하루에 세 번씩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참견을 할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반면 ‘주인의 간섭이 전혀 없다’면 보일러가 고장나고 수도관이 터져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지 모른다. ‘예쁘게 꾸며놓았다’면 다이소에서 산 스티커를 몸소 떼어낼 각오를 해야 한다. ‘계단 두 개 내려가는 1층’은 반지하, ‘옥상을 마당처럼 쓸 수 있는’은 옥탑방을 조심해야 한다. 이 정도는 방문해서 알 수도 있다. ‘저도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결혼해야 해서(혹은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어서) 방을 빼게 되었습니다’는 계약해보니 살 곳이 아니었다는 뜻이므로 특히 주의해야 한다.

처음 본 집은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허름한 다가구주택이었다. 빼곡한 재개발 구역 사이에서 섬처럼 남은 집이기도 했다. 1층에는 상가가 있고 2·3층은 주거용으로 계획돼 있었다. 집은 네모반듯하기는커녕 마름모꼴로 생겼지만 방만큼은 간신히 네모난 전세 4천만원짜리 집이었다. 당시는 셀프 인테리어의 양대 산맥 ‘김반장’과 ‘우연수집’에 주목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김반장’은 인테리어 인터넷 카페인 레몬테라스(cafe.naver.com/remonterrace.cafe)에서 많은 팬을 거느린 전세 아파트 거주자였다. 단란한 가정을 꾸린 ‘김반장’을 벤치마킹하면서도 1인 가구가 공감할 수 있는 콘셉트를 들고나온 이는 ‘우연수집’이었다. 그는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이태원 어딘가의 재개발 예정인 곳에 외지인이 사놓은 집의 세입자가 된 뒤 그곳을 ‘기깔나게’ 고쳐 윤종신 뮤직비디오도 찍고 방송에도 나오며 화제가 된 인물이다. 이를 계기로 책도 쓰고 서촌에 가게를 차리기도 했다. 나 역시 이를 보며 새로운 생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직장에서 너무 먼 강북 변두리를 뒤로하고 본 집이 다름 아닌 ‘옥상을 마당처럼 쓸 수 있는 집’이었다. 집주인은 한사코 이것은 옥탑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내가 보기엔 옥탑만큼의 믿음도 가지 않았다. 옥상에 부자연스럽게 살짝 올려놓은 집은 손으로 밀면 옆 골목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샌드위치 패널로 증축한 옥상 위의 집은 인터넷 여론에 밀려 탈락했다. 직장과 너무 멀고 그나마 역에서 20분은 걸어가야 하는 곳도 꺼려졌지만, 역세권에 흔한 풀옵션 원룸도 싫었다. 그렇게 판에 박힌 좁은 방에서는 잠자는 것 빼곤 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셀프 인테리어에 눈을 돌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허름하지만 싸고 좀더 넓은 집에 자리잡고 적당히 고쳐서 예쁘게 살아보자.

다음에 본 집은 경복궁의 서쪽, 서촌의 한 한옥이었다. 개조를 마친 한옥으로, 안마당을 향해 열려 있는 통유리창이 인상적인 집이었다. 전세가 1억원. 1년에 이자로 400만원을 들이면 내가 구할 수 있는 돈의 한계에 딱 맞는 집이었지만 그 찰랑찰랑한 한계가 무서워서 포기했다. ‘9천만원이기만 했어도….’ 집을 보고 돌아나오며 아쉬워했다. 곧이어 신촌의 한 곳을 소개받았다.

나는 집을 구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해두었다. 그중 하나가 복도형, 특히 중복도형 배치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기숙사에서의 여름에 스트레스를 받은 터인데다, 집에 들어오며 남들 눈을 신경 쓰는 것도 고달픈 일이다. 신촌의 원룸은 전세 7천만원짜리 방이라 해서 보러 갔다.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니 2개의 문이 나란히 있었다. 여기까지는 합격. 그런데 그중 한 문을 여니 다시 복도가 나오는 것이다. 그 복도에 또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원래 한 집을 원룸으로 만들기 위해 두 집으로 쪼갠 것이었다. 내가 본 방에는 엉뚱한 곳에 기둥이 튀어나와 있고 방 모양도 어색했다. 이 방은 원래 작은 방과 현관, 부엌 약간을 섞어 만든 것이었을까.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이 솟은 느낌이었다. 집주인 키가 180cm는 돼 보였는데 머리가 거의 천장에 닿았다.

낡거나 이상하거나

서러운 마음에 전화기 건너편 친구를 붙잡고 한참 울었다. 기숙사에서 더 버틸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큰돈을 빌려 나오는데 이렇게 가난하게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신촌의 그 원룸들을 보고 나니 너무나 우울해졌다. 자신이 없어졌다. 이럴 때는 그냥 자라는 친구의 충고를 듣고 난 다음날 아침,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는 합정동이었다.

서둘러 퇴근해서 달려갔지만 저녁 7시,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초행길이라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실행시킨 다음 찾아가자니 역에서 집까지 꽤 멀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 근처에서 다녀본 곳은 ‘KT&G 상상마당’, 홍대역 9번 출구 근처였을 뿐인데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서 마을버스를 타고 어두컴컴한 당인리 발전소 쪽으로 달려가자니 뭔가 우울함이 치밀어올랐다. 당인리 발전소 정문 로터리에 서 있으니 소설 속의 디스토피아가 연상되기까지 했다. 낙엽이 흩날리고, 페덱스 사무실에서 택배차가 드나들고,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은 풍경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때 훤칠하게 잘생긴 집주인의 아들이 나를 맞았다. 그를 따라 걸어간 곳에 자리한 카페 불빛이 예뻐 보였다. 집 앞에 이런 곳이 있으니 밤에 걸어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가니 한 층에 단 두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열었더니 엉망진창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식용유와 달걀 껍질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신혼부부는 둘이 함께 미용실을 하는데 이제 더 큰 집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가계약을 하고 돌아온 다음날 다시 찾았을 때, 청소해둔 방에는 식용유와 달걀 껍질 대신 뚜레쥬르 케이크와 아사히맥주 캔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세입자와 자신들의 새 출발을 자축하고 있었던 것일까.

계약 기간 2년에 전세 8천만원 범위에서 자유롭게 조정이 가능했다. 나는 보증금 6천만원에 월세 20만원을 내기로 계약했다. 풀옵션 원룸이 아니라서 접이식 침대와 붙박이장, 싱크대 안에 드럼세탁기 따위를 갖춰놓은 집이 아니었다. 대신 집주인이 가스레인지·세탁기·냉장고를 새것으로 바꿔주었고, 보일러도 때가 되니 새것으로 교체해주었다. 갖가지 집주인에 관한 증언을 접할 때마다 이 집도, 주인도 잘 만난 듯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는 꽤 운 좋게 독립의 첫발을 뗀 것이다.

하지만 이 집에 만족하지 못한 나는 끊임없이 다음 집을 알아보고 있다. 여기서 산 지 딱 1년이 지나자 권태기가 찾아왔다. 집을 알아보는 데는 이미 이력이 났을 뿐만 아니라 재미마저 느끼고 있다. 고양이 키우는 커뮤니티에 가면 고양이가 아니라 배경인 집이 먼저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까. 다이소 소품, MDF 상자가 가구인 또래 여자애들이 대부분인데 가끔 아파트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독신 여성이 있다. 나도 고양이를 키우다보니 이 녀석들에게 방해받지 않는 내 방을 갖고 싶고, 야경이 보이는 베란다에다 화분도 놓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탐험을 재개했다.

첫 표적은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단층 단독주택 독채 전세였다. 거의 매일 체크하는 네이버 부동산에서 발견했다. 네모난 마당과 네모난 집, 마당에는 화단이 있고 감나무가 3그루, 대문 옆에 연탄 넣어두는 창고가 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거실과 방 3개가 있고 한쪽에 부엌이 있으며 화장실이 2개 있었다. 이 물건이 전세 6천만원. 게시물을 발견한 지 2시간 만에 계약에 이르는 것을 회사에서 지켜보았다. 비슷한 단독주택 전세가 근처에 꽤 있었다. 다른 부동산에서 알아봐준 유사한 곳은 리모델링해서 8천만원, 리모델링하지 않은 곳은 7천만원이었다. 그러나 놓친 집만큼 구조가 좋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시 경계를 넘어 인천으로 가보았다. 지금 살고 있는 전세 가격이면 18평(60m²)형대 아파트 전세를 구할 수 있는 곳이다. 항구도시 출신이어서 잘 적응할 자신도 있었다. 게다가 인천으로 옮기면 승진이 빠르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인천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접근할수록 날이 어두워지는 느낌, 이 도시는 쇠락하고 있다는 느낌이 바로 들었다. 집을 보고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양천구 양평동 즈음을 지나며 창밖의 서울을 보니 마치 고향처럼 느껴졌다. 집에 온 것 같은 이 기분은 분명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단칸방이긴 하지만 역시 서울에 살아야겠다 결심했다.

사정에 맞춰 살 수 없는 곳, 서울

가장 최근에 본 집은 마포구 공덕동의 단독주택 2층이다. 남자 둘이서 5년간 살던 집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 함께 살다 친구 한 명이 먼저 결혼하고 남은 한 명도 드디어 결혼하게 돼서 다른 세입자를 찾고 있었다. 전화 통화로 왜 시세보다 싸냐고 물었더니 살짝 언덕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가는 길은 계속 평지로 언덕이 없었다. 그런데 도화2로 안길에 도착하니 갑자기 계단이 등장했다. 시멘트로 대강 만든 계단길을 따라 13개의 집을 지나자 마침내 그 집이 나왔다. 2층이었는데 1층의 반은 땅에 묻혀 있어 지하층일 수도 있었다. 그곳에는 주인이 살고 위층이 세로 나온 것이다. 창밖으로 공덕역 부근에 새로 들어선 고층 건물들이 눈앞을 막고 있었다.

내부 구조도 조금 이상했다. 세를 주려고, 내부의 계단을 막고 구조를 고친 듯 보였다. 2층에는 원래 침실만 있고 부엌이 없었는데 억지로 부엌을 달아내듯이 만든 것 같기도 했다. 화장실도 마치 가건물처럼 어중간하게 붙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부엌이 있고 부엌에 난 문을 열면 거실이 나오는 구조였다. 이제 40년이 된 집, 겉도 이미 멀쩡하지 않아 드라마에 나오는 가난한 동네 풍경 그 자체였다.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전세 7천만~8천만원의 집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수준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서울, 특히 도심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집들은 내 믿음을 쉽사리 배반했다. 낡은데다 구조마저 이상한 집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꼬박꼬박 챙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살겠다는 사람이 몰리는 동네라 그런지 집주인은 작정한 듯 집 상태에 무심했다. 자신의 경제 사정에 맞춰 사는 곳을 결정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나도 알고 있지만, 새로운 집을 알아볼 때마다 앞으로의 서울살이가 아득해지는 것이다.

구술 강선영·정리 박재현


‘집으로 중산층 진입’ 시대는 끝났다

이상적인 집이란 저축이 가능한 집이다.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어간다. 우선 집을 빌리거나 소유하는 데 드는 돈을 생각할 수 있다. 집을 월세로 빌린다면 매달 월세를 지출해야 하고, 전세로 빌린다면 전세금 이자만큼의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아예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질 수도 있다. 집을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빚내어 집을 산다면 빚을 갚기 위해 이자와 원금 상환에 지급할 돈이 필요하다. 여기에 수도요금과 난방비, 전기요금 등이 든다. 그리고 생활비를 지출한다. 그 나머지를 저축할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저축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상적이라기보다 적절한 생활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상이란 더 나은 생활을 바라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상을 지금 바라는 어떤 꿈의 공간으로 여기지 않고 생애주기의 어떤 한 지점에서 달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한다면, 저축은 독립을 시작하는 젊은이에게 이상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적절한 생활 형식을 얻고 이를 꾸준히 지탱하면서 언젠가는 이상으로 그리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산업화 시기를 거쳐온 기성세대의 고단한 삶을 지탱해준 사회의 이상이기도 하다.

지난 2월19일 국토교통부의 대통령 업무보고를 전하는 뉴스에 따르면, 재건축 규제를 완화하면서 과밀억제권역에서도 1가구 1주택을 포기하기로 했다. 민간 임대주택 활성화를 위해 리츠(부동산 개발 특화 펀드)에도 국민주택기금이 출자하는 방안이 논의된다. 이제 주거 정책의 큰 틀은 1가구 1주택에서 벗어나 다주택자를 통한 민간 임대 중심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분양가 상한제와 1가구 1주택 중심의 주택 공급 정책을 바탕으로 중산층에 도약할 수 있었던 산업화 시대는 마감됐다. 주택을 소유하고 주택 가격 상승을 바탕으로 중산층에 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가계는 오직 소득과 저축을 통해 미래의 삶을 계획하며 현재의 삶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소득과 소비다.

2008년 이후 한국의 실질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고용 역시 마찬가지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자 청년층은 취업준비생 상태로 대기 중인 반면, 노령층이 빠르게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독립한 청년층 1인 가구는 현재 상황을 단적으로 증언한다. 39살 이하 1인 가구의 소득은 2008년 이후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대신 소비는 식료품과 월세 등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두 항목은 필수적 지출이어서 절약하기가 어렵다. 앞으로 가스와 전기, 수도 등 공공요금이 인상된다면 이들의 저축 여력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이들의 소득을 보조하기 위해 정부는 월세 세금 공제액 한도를 늘렸다. 그러나 이 제도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임대소득 노출을 꺼리는 집주인의 동의를 얻기 어려워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아예 임대소득과 그 규모를 파악할 수단으로 임대용 주택을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지만 국토교통부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오히려 민간 임대시장 활성화를 위해 세금을 감면해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문제는 사실상 주택임대사업을 하는 다주택자들은 이미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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