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3 15:50 수정 : 2013.07.05 14:57

지난 6월 14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옥인연립에서 김성환·복환 형제가 수도배관 공사를 하고 있다.한겨레 정용일
‘어라? 이 골목에 이런 가게가 있었나?’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가회동 헌법재판소 쪽으로 50m쯤 걷다 한 허름한 가게에 시선이 머문다. 붉은 벽돌 로 지은 2층짜리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대흥설비’다. 고작 13㎡(약 4평) 남짓 되는 작은 가게로, 요즘 좀처럼 보 기 힘든 구식 간판을 달고 있다. 나무판자에 흰 페인트로 바탕을 두른 뒤 검은색 붓글씨로 상호명을 직접 써내려간 듯하다. 그 밑에는 반쯤 지워져 알아보기 힘든, 붉은색으로 쓴 가게 전화번호가 세월의 더께를 보여준다.

‘낡음’은 ‘새것’과 함께 있을 때 더 눈에 띈다. 대흥설비 바로 맞은편에는 송원아트센터가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세련된 디자인에 다크그레이의 스틸 벽재로 지은 건물인 데, 건축가 조민석씨가 설계한 것으로 그 자체가 예술품으로 알려져 있다. 1층에선 프렌치 레스토랑 ‘비앙에트르’가 구색을 맞춘다.

굳이 이 건물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대흥설비 외관은 주 변 골목에서 도드라진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대흥 설비가 있는 화동은 ‘북촌’(가회동·삼청동·재동 등) 일대에 속한다. 원래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거 공간이었다. 이후로도 전통 한옥이 밀집돼 있던 북촌은 한동안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보존돼왔다.

‘전통’과 ‘현대’의 공존이라는 명분 아래 2000년대 이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북촌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통 가옥에는 현대적 건축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고, 골목마다 커피숍과 레스토랑, 부티크 등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호젓한 주택가는 자취를 감췄고 북촌을 보러 오는 외국인 관 광객으로 늘 북적인다.

대흥설비 주변도 예외는 아니다. 대각선 맞은편 방향에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플로라’와 영국 코스메틱 전문점 ‘러쉬’, 한글 간판을 단 커피전문점 ‘더 커피 빈 앤 티 리프’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대흥설비의 구식 간판이 이런 모던한 상가 건물들과 어울릴 리 만무했다. 주변 골목이 서구화될수록 대흥설비는 마치 고립된 섬처럼 되었다.

<나·들>이 대흥설비를 운영하는 김성환(55) 사장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온 사연은 대충 이렇다. 인터뷰 약속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막힌 하수도를 뚫고 보일러를 수리하는 김 사장의 작업 일정을 미리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고객이 전화로 요청하면 곧바로 출장 수리를 나서는 식이기 때문이다.


화동과 누하동의 ‘대흥설비’… 상호도 쌍둥이

뙤약볕이 내리쬐는 지난 6월 14일 오전 9시. 북촌의 대흥설비를 찾았다. 그저 걷기만 해도 등줄기에 땀이 흘러 내리는 무더운 날이다. 아침부터 ‘푹푹 찐다’는 말이 절로 입가를 맴돈다. 이른 아침에 가게를 찾기로 한 건 인터뷰 시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계세요?”

아뿔싸! 인기척이 없다. 가게문도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김 사장은 이미 일을 나간 뒤였다. 곧바로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린다.

“급하면 이쪽으로 오시든가….”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는지 출장 공사를 나간 옥인연립(종로구 옥인동)으로 기자를 부른다. 냉큼 달려갔다. 9번 마을버스 종점 부근 옥인연립의 어느 살림집에서 수도 배관 공사가 한창이다. 이미 집안은 아수라장이고 공사 도구들이 뿜어내는 소음도 굉장하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잠시 시간 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김 사장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순간 당혹스러워하는 기자의 눈앞에 또 다른 얼굴이 쓱 나타난다.

“지금 왔어요? (인터뷰할 거면) 빨리빨리 합시다.”

헉! 얼굴이 닮았다. 아니 완전 똑같다. 느닷없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배관공 형제가 쿠파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는 여정을 배경으로 한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등장에 말문이 막힌다. 멜빵바지와 콧수염만 대입시키면 영락없는 마리오 형제다. 기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는 쌍 둥이 동생 김복환(55) 사장이었다. 형에게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인터뷰에 대해 알지 못할 터이다. 작업모와 작업복마저 비슷한 배관공 형제 가운데 누가 형이고 아우인지 구분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황하는 기자에게 집주인이 넌지시 한마디 건넨다.

“아랫집에 물이 샌다고 해서 (김 사장을) 불렀어요. 저 양반들이 워낙 일 잘하는 걸로 소문나서 안심하고 맡긴 겁니다.”

물이 샌다는 사실을 알리면 (윗집 주인이) 부담스러할 까 봐 꾹꾹 참고 있던 아랫집 어르신은 최근에야 공사가 필요하다는 걸 알렸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노후된 집 을 보수하는 공사비를 지원해준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위층과 아래층을 오가며 형제처럼 지내는 두 어르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쌍둥이 형제를 칭찬한다.

그랬다. 이미 인근 동네에서 쌍둥이 배관공 형제의 공사 실력은 명성이 자자했다. 배관공으로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의 고향은 강원도 속초다. 아우는 형보다 딱 5분 늦게 태어났다. 형제는 어릴 때부터 의기투합이 잘 됐다. 결혼식도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동시에 올렸을 정도다. 동생이 2년쯤 먼저 짝을 찾았지만 형이 형수를 데려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때부터 배관 일을 배웠다. 갑갑한 직장생활보다 배관 일을 배워 가게를 내겠다는 꿈을 키우던 시절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배관공이 되기로 한 걸까.

“계기? 그런 게 어딨어요. 그때는 밥만 먹여주면 그냥 하는 거죠.(웃음) 동네에 아는 형이 배관 일을 하기에 쫓아 다니면서 배운 겁니다.”(형)

“남의 집 물 새는 거 고쳐주면 그렇게 기분 좋더라고요. 이게 일반 사람들이 하기 어렵고, 또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이잖아요. 우리가 고쳐주고 나서 집주인이 흡족해할때… 그냥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거 같아요.(웃음)”(동생)

무덤덤하게 툭툭 던지듯이 말하는 형에 견줘 동생의 말솜씨는 한결 살갑다. 쌍둥이 형제를 구분해내는 방법은 외모의 작은 차이를 발견해내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 형제는 1985년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설악산 부근에서 여관·모텔 등의 공사를 맡아 했는데, 일감이 많지 않았다. 북촌을 찾은 것도 오래된 한옥집이 많아 배관공사 수요가 많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서울살이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처음에는 지금 가게에서 몇십 m 떨어진 재동초등학교 네거리에 가게를 차렸다. 화동으로 옮겨온 건 1990년대 후반이다(쌍둥이 형제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대흥설비 자리에 있던 솜틀가게를 인수하면서다. 일감이 늘면서 동생이 누하동에 똑같은 상호(대흥설비)로 가게를 낸 것도 이 무렵이다. 누하동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서촌’으로도 불린다. 사대부 양반들이 살던 북촌과 달리 서촌에는 역관이나 의관 등 조선시대 중인들이 사는 터전이었다. 근대에 와서는 이상, 윤동주, 구본웅 등 문인과 화가들이 여럿 살던 곳이기도 하다.

쌍둥이 형제는 북촌과 서촌에 각기 가게를 두고 있으면서 작업할 게 많은 날에는 함께 일을 다닌다. 형과 아우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늘상 만난다. 좁은 골목이 많아서 자동차를 이용하면 외려 기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형과 아우를 구분하지 못해 기자가 겪은 혼란은 수리 공사를 요청한 집주인들도 빈번하게 겪는 일이라고 했다. 좀전에 1층에서 형이 일하는 모습을 본 집주인이 지하실에서 동생을 보고 놀라서 혼비백산한 적도 있다. 단골 고객을 늘려간 데에는 쌍둥이라는 점이 적잖이 도움을 줬다.

“한번 우리를 불러 일을 시켜서 깔끔하게 마무리되면 집주인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거예요. 쌍둥이라서 기억에 남는다는 거죠. 반대로 우리가 일을 제대로 못했더라면 벌써 문 닫았을 겁니다.(웃음)”


변화를 바라볼 뿐… 그리운 토박이들

입소문이 퍼지면서 ‘나와바리’(구역)도 점차 넓어졌다. 멀리 종로구 혜화동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 이 때문에 쌍둥이 형제와의 인터뷰는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루 많게는 출장을 7군데 나가는 통에 대화할 시간은 한 번에 10분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질문 하나 던질 때마다 형제는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갑자기 그런 걸 물으면 어떡하나…”는 식으로 답해 기자를 곤란에 빠뜨렸다. 이들의 머릿속엔 오직 배관일 뿐이었다.

언론과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진촬영 할때는 노련함이 묻어났다. 옥인연립 공사 과정에서 두 사람의 몸동작은 흡사 원로 코미디언 ‘남철-남성남 콤비’1를 연상시켰다. 그만큼 호흡이 착착 맞았다. 그들에게서 느낀 ‘노련함’의 진원지는 다른 데 있었다. 빨리 찍고 취재진이 나가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거였다.

“이전에도 어느 방송사에서 우리를 촬영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영 부끄럽더라고요. 거절했어요.”

“그럼 <나·들> 인터뷰는 왜 허락했나요?(웃음)”

“누가 허락해요? 그쪽에서 자꾸 귀찮게 찾아온 거잖아.(웃음) 그나마 텔레비전에 얼굴 나오는 건 아니라니까 다행이지만…. 근데 이거 인터뷰하고 나면 우리한테 뭘 주는 건가요?”

두 번째 만남은 6월 19일 오후 4시쯤 형 가게 앞 도로 변에서 이루어졌다. 두 시간 여를 기다린 끝에 ‘부르릉’ 하는 쌍둥이 형제의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북촌과 서촌의 개발은 쌍둥이 형제에게 일감을 늘려 주는 계기가 된 동시에 삶의 공간이 눈요깃거리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씁쓸함도 안겨준다. 우선 커피숍 등이 새로 들어서면 그 업태에 맞게 수도관을 개조하는 등의 주문이 밀려온다. 김성환 사장은 “개발이 거의 완료된 북촌에 견줘 서촌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일감이 많은 편”이 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한옥을 완전히 개조해서 싹 수리해버리면 외려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오래된 한옥을 계속 보존하는 것이 이들에겐 훨씬 이득이라고 말했다.

한 집 한 집 수리할 때마다 동네 풍경도 조금씩 달라 졌다.

“원래 가게 부근에 뭐가 있었나요?”

“저어기… 커피숍 보이시죠? 예전에는 다 일반 주택이었어요. 하나둘씩 없어지더니 지금은 저렇게 변했지만….”

“안타까우신 거죠?”

“뭐… 순리대로 사는 거니까… 그런 생각은 잘 안 해요.”

두 사람 모두 말은 무덤덤하게 내뱉지만 속내는 달랐다. 화동 김성환 사장 가게는 이미 개발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비밀’이라고 했지만 처음 솜틀집을 인수할 때보다 땅 값이 부쩍 치솟았음은 누구나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러브콜’을 받은 지 한참이지만 그는 가게를 내놓을 마음이 전혀 없다고 했다.

“(손사래를 치며) 5년 전부터 가게를 팔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거든. 앞으로도 계속 여기에 있을 거예요.”

변화를 거부하는 쌍둥이 형제의 신념은 예상보다 훨씬 확고했다. 이들은 눈에 띄는 구식 간판도 일부러 놔둔 거라고 귀띔한다. 30년 가까이 된 간판으로, 예전에 같이 일하던 직원이 만들어준 것이다. “주변 골목에 번지르르한 커피숍들이 생기니까 우리 가게가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사 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웃음)”

“혹시 다른 일은 해보려고 마음먹은 적 없나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데 어떡하라고! 허허허.”(형)

“다른 거 해봤자 뭐하고 살겠어요? 적어도 일흔다섯 살까지는 일할 생각입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차분하게….” (동생)

“그래도 일이 너무 힘들 때가 있잖아요.”

“글쎄… 오늘처럼 날씨가 너무 더울 때는 힘들기도 하죠. 근데 뭐, 이 정도야…. (웃음) 아! 그게 있네요. 아침에 빨리 와서 고쳐달라는 데가 두세 집 ‘따블’될 때 무척 신경 쓰이 더라고. 어느 집을 먼저 가야 할지…. 대부분 단골이거든요.”

‘유도성 질문’(?)은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쌍둥이 형제의 직업만족도는 기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하던 화동 대흥설비 가게 앞에 때마침 관광버스 한 대가 선다. 관광객이 북적대는 건 김성환 사장에게 적잖은 스트레스다. 그는 “이전에도 드문드문 관광객이 찾긴 했지만 요즘처럼 주말마다 사람들로 꽉 찰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김 사장은 몇 해 전 KBS <1박2일> 팀이 다녀간 이후로 관광객이 훨씬 더 늘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동생 김복환 사장은 ‘가회동 1번지’에 살던 이웃 주민이 가끔 생각난다고 했다. 지금은 고급 한옥 빌라가 들어서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그곳에 가구 수가 많았다. 좁은 골목에서 만날 때마다 주민들과 안부를 주고받던 시절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누하동 가게 바로 옆에 있는 대오서점에 기자들 이 들락거리는 것도 마뜩잖아했다. 이 서점은 1950년 문을 연 오래된 헌책방으로, 서촌의 명물이 됐다. 하지만 실제 서점으로서 기능은 수명을 다한 지 오래다.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보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이 그 립다’는 뜻이었다.

“서울, 그중에서도 서촌.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장소도 그렇고,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삶도 그렇다. 특히 오늘의 관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장소도 꿈을 꾸고, 사람도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 꿈의 모양새와 빛깔은 각양각색 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 꿈의 끝자락을 놓지 않았다. 허공으 로 날아가버린 꿈은 없다. 지금도 서촌의 여기저기를 잘 들여다보면 어느 한구석에선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손길을 내밀어 자신의 한 자락을 잡아주기 바라는 미완의 꿈, 미제로 남은 꿈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최종현·김창희, <오래된 서울> 중에서)


전통과 현대의 삶 고치며 오늘도 부릉~

특정 장소를 대변하는 것은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장소는 그 자체로 존재 한다기보다 반드시 사람이라는 매개변수를 필요로 한다” 고 강조한다.

지금 서촌에서 토박이를 찾는 건 매우 힘든 일이 돼버렸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사람이든 새로 유입된 사람이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도록 서촌에 살던 장동 김씨 (안동 김씨의 서울 파벌)들은 떠난 지 오래고, 조선시대 중인들도 본래 도시 안에서 필요에 따라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세거’(어느 한 지역에서 대대로 사는 것)의 개념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2

어찌 보면 쌍둥이 형제의 모습은 ‘필요에 따라’ 사는 곳을 옮겨 다닌 조선시대 중인들의 서울살이와 닮았다. 전통과 현대, 그 어느 쪽과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보이는 이 형제가 이곳에 정착한 사연도 그렇거니와, 급격한 개발 속에서도 여전히 이곳에서 생활하는 서민들의 주거공간을 어 루만지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30년 전 전통 한옥을 고치러 왔던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때때로 현대식 건물로 개조하는 일을 돕기도 한다. 이 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전통과 현대를 오간다. 낡은 오토 바이 두 대는 쌍둥이 형제를 움직여주는 발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통 한옥을 수리하다가도 어느새 모던한 스타일 의 레스토랑으로 달려가는 식이다.

개발과 변화를 극렬하게 거부하지도, 사라져가는 옛 풍경을 그리워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도 않는다. 다만 배관공사를 하면서 이곳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공간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데 온 힘을 쏟을 뿐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더 이상 배관공사할 일이 없어지게 된다면 다른 곳을 찾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주변 모든 것이 특정 가치만 좇으며 한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이즈음에도 꿋꿋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쌍둥이 형제가 진정 ‘노마드’스러운 건 아닐까.

글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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