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1:09 수정 : 2014.07.03 11:15

지난 5월9일 새벽, KBS 보도국장의 막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KBS 사장과의 면담이 성사되지 않자 세월호 유가족들은 다시 한번 청와대를 향한 행진을 시도한다. 물론 유가족들의 행진은 새벽 4시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고, 정오가 될 때까지도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날 오전,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 중에 이 사건에 관해 매우 충격적인 말 한마디를 던진다. 그는 “지금 청와대 앞에 유가족분들이 와 계시는데, 순수 유가족분들 요청을 듣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나가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입장이 정리됐다”고 말했다. “순수 유가족이 무슨 뜻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유가족이 아닌 분들은 청와대가 말씀을 듣는 대상이 되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말”이라며 “실종자 가족들이야 진도 팽목항에 계실 테니까 여기 계실 가능성이 적을 테니”라고 덧붙였다.

그의 발언은 청와대 앞에서 농성 중인 이들이 유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또는 유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엔 유가족이 아닌 ‘불순분자’ ‘시위꾼’들이 섞여서 정치적 선동을 하고 있다는 청와대의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순수 유가족’에서 ‘순수’라는 단어의 진의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청와대가 유가족들에게 상상하고 기대하는 이미지가 불순한 시위꾼들에게 선동당하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 즉 국가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슬퍼하고 분노하는 ‘미개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 유가족들은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설령 청와대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그것이 야당이나 다른 진보정치 세력과 연관돼선 안 되며, 결코 폭력적인 방식을 취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겠다.

역시 대변인의 발언은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한 것임이 곧 밝혀진다. 밤을 새워가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던 유가족들을 청와대 앞에 그대로 세워놓고 대통령은 “세월호 문제로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있다”면서 마치 자신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있는 가족들을 겨냥한 듯 “사회불안과 분열을 야기시키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 전반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날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회분열 세력’이 비판 여론을 조장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결국 ‘유언비어’와 ‘정치적 선동’이 모든 국민을 불안에 떨도록 만들어 소비심리 위축과 경기 악화로 이어질 수 있으니 경제를 위해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로 인해 초래된 경제 불안의 책임을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는 그렇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분노와 애도가 박근혜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는 정치적 사건으로 전화돼선 안 된다는 우익세력들의 강박을 실제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너희들도 가만히 있으라!”

현 정부가 갖고 있는 ‘순수 유가족’에 대한 강박은 경찰의 불법 사찰에서도 잘 드러난다. 침몰 사고 당일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전남 진도체육관, 경기도 안산 단원고와 합동분향소 등 희생자 가족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정보경찰이 투입돼 가족들의 동향을 사찰하고, 사전 동의도 없이 몰래 미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희생자 가족들이 “구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대책본부 발표 내용도 거짓”이라며 “청와대로 가서 박 대통령을 직접 만나자”고 행진을 시도했던 4월19일 전부터 이미 경찰은 가족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가족들을 미행하고 감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가족들이 대통령과 정권에 책임을 묻는 정치적 행동에 나서게 되는 걸 막기 위함일 것이다. 이는 넓게는 지배 엘리트와 권력 당국이 재난이 불러온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또는 그런 변화가 혼란과 파괴로 이어져 끝내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공포에서 비롯된 다소 우발적인 ‘엘리트 패닉’1 현상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국가기관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 아래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정당성의 항구적인 취약함을 은폐하고 그 권력 기반을 안보와 치안의 논리로 보수하려는 ‘공안통치’를 일삼아왔다는 점에서 그리 우발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처럼 정부의 재난관리 및 구조작업의 총체적인 실패로 빚어진 대형 참사를 두고 희생자 가족들이 정부를 향해 분노하며 그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책임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유가족들의 범위를 넘어 시민사회적 차원에서 정권 퇴진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정부·여당과 우익세력은 집단적 히스테리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 거부반응의 이면에는 사망자와 실종자를 포괄하는 세월호 참사의 모든 희생자 가족들을 분노도 저항도 없이 오직 슬픔을 자기들 안으로만 삭이는 특정한 ‘유가족’의 이미지로 전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를 결코 정치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 슬퍼하고 절망하되, 비판하지도 분노하지도 말라는 것. 비판하더라도 합법적이고 이성적인 범위 안에서만 하고, 분노하더라도 비정치적·비폭력적인 방식으로만 하라는 것.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무기력하고 창백한 얼굴을 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죽은 가족들처럼 그냥 그 자리에 “너희들도 가만히 있으라”는 것. 그렇기에 ‘순수 유가족’에 대한 강박적인 전형화는 세월호 참사의 정치적 이슈화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시에, 만일 그렇게 했는데도 애도의 정치화가 계속된다면 언제든지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희생자 가족들에게까지 붙일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진상 규명과 구조 활동에 관한 가족들의 요구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치며 ‘노란 리본’을 달고 촛불집회를 열었을 때 여당 일각이나 우익 진영에서는 시민들이 가족들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곧이어 촛불집회에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아예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가족들에 대한 위로마저 철회하고 가족과 시민들을 싸잡아서 불순세력이라 모함하는 극단적인 언사를 내뱉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라!”

희생자 가족들에게 전형화된 유가족의 이미지를 강요하는 태도는 희생자 가족들을 차별적으로 분류하는 동시에 그들을 추상적인 범주의 단일한 집단으로 묶어내 시민사회로부터 고립화·주변화하는 전략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을 ‘단원고 학생·교사’와 ‘일반인·승무원’으로 다시 분류하고 차별하는 정부의 행위는 희생자 가족들을 한 종류의 특정한 집단으로 범주화하려는 강박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5월16일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던 자리에 단원고 학생이 아닌 일반인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또한 세월호 참사 추모공원에 안치될 대상자는 단원고 학생과 교사로 한정됐다. 정부가 안산에 마련한 합동분향소에 일반인 희생자들은 처음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울러 정부는 단원고에 의료·금융·심리치료 지원팀 등을 배치한 반면, 일반인 희생자 가족에게는 그런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단지 장례비용 몇십만원씩을 지원하는 것에 그쳤다.

대통령 역시 아직 주검조차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이 남아 있는데도 대국민 담화에서 향후 실종자 수색에 대한 어떤 계획도 언급하지 않았고, 실종자 가족과 사망자 가족을 모두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해버린 뒤, 그들에게 단원고 학생들의 가족으로 범주화된 ‘유가족’의 이미지를 덧씌워버렸다. 나이·성(性)·직업·계층·출신·국적 등 개별적인 차이와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개인을 ‘세월호 희생자’라는 추상적 범주의 단일한 대중으로 묶는 논리가 작동 중이다.

일반인 희생자 가족들이 거듭 항의하자 정부 관계자는 “학생들은 교육 연장선에서 참사를 당한 희생자이지만, 일반인과 승무원은 교육 목적이 아닌 생계나 여가 목적으로 탑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정부의 희생자 분류 및 차별 행위는 모종의 특성(단원고)을 공유하는 특정한 범주의 ‘희생자들’(단원고 학생 및 교사)을 다른 많은 ‘구체적 희생자들’로부터 분리해 특권화함으로써, 세월호 참사를 수학여행 중이던 고등학생들의 희생이라는 전형적 관점에 고착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아르바이트 노동자와 일반인·승무원과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자녀에 이르는 그 수많은 승객들의 개인적 차이를 모두 지워버리고 (‘단원고 학생들’로 대표/재현되는) ‘세월호 희생자’라는 추상적 범주의 단일한 덩어리에 뭉쳐버림으로써, 모든 희생자들이 갖는 무수한 차이의 개별성·특이성을 탈각시키고 종국에는 희생자 가족들의 집단적 행동을 제어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특정 범주의 사람들만이 희생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 나아가 초국적 자본의 흐름을 따라 남한 땅으로 흘러들어온 다양한 얼굴의 이방인들이 세월호 안에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은폐될 때, 세월호 참사를 통해 국가와 자본주의라고 하는 총체적인 체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다. 다양한 희생자들이 갖는 각각의 개별적 특이성을 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도 앞바다를 우리 모두가 처한 보편적인 조건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실재적’ 민낯과 대면하는 장소로 재전유할 수 있다.

나아가 단 하나의 속성을 공유하는 특수한 집단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범주화하는 것은 시민들에게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을 시민사회의 다양한 개인적 상호작용의 연결망으로부터 단절시켜 ‘유가족’이라는 특수한 범주, 어떤 예외적이고 접촉 불가능한 대재앙의 표본, 즉 ‘재현 불가능한 사건의 담지자들’이라는 추상화·신비화된 타자들로 받아들이게 할 소지가 있다. 세월호 참사가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고’(accident)로 인식되면서, 일각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마치 비이성적·비정치적이며 이해 불가능한, 오직 경의 어린 침묵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는 어떤 신비한 대상으로 승격시키려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이때 세월호 참사는 역설적으로 그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을 우리 모두로부터 집단적으로 구별하는 일종의 정체성이나 본성 같은 것으로 기능하게 되고, 그 결과 유가족들은 이제 우리가 일상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오직 ‘세월호’라는 특별한 이름 안에서만 접촉 가능한 대상으로 변형된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현실의 개별적인 이웃들이 아닌 일종의 추상물, 추상적 범주로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은 한국 사회의 일상적 삶의 지평으로부터 점차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세월호 참사 같은 대재난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은 기존의 공고하던 사회질서를 교란시키고 지배권력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저항세력으로 돌변할 위험성이 다분한 존재다. 따라서 지배권력은 재난이 남긴 가장 일차적인 증인이라 할 수 있는 희생자 가족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그들을 전형화·범주화·추상화하는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

이런 전략이 성공을 거둘 때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시민들의 일상적 태도가 중립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일상적 태도의 중립화란 시민들과 희생자 가족들 간의 사회적 근접성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희생자 가족들을 탈정치적으로 전형화하거나 하나의 특수한 집단으로 범주화하려는 국가의 전략은 가족들과 시민들 간의 사회적 근접성을 점차 없애버리고, 무관심 가운데 거리두기를 유도함으로써 끝내는 가족들을 정치적·사회적 삶 바깥의 예외적 장소에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 유예은양의 아버지이자 유가족 대변인인 유경근씨가 한 추모 미사에서 “잊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것도 바로 그런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사회적 근접성을 상실함으로써 타자화된 존재들이 사회 전반으로부터 연대와 지지를 필요로 하는 재난의 희생자 집단일 경우 도덕적 책임성 문제는 정치적 책임성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바우만의 말을 빌리면, 모든 도덕적 행위의 기초적 요소가 되는 도덕적 책임성은 타자와 주체 사이의 근접성으로부터 발생한다. “근접성은 책임성을 의미하며 책임성은 근접성이다.”2 따라서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들 간의 근접성이 상실되고 거리두기가 확대되면 도덕적 관계가 붕괴되고 고통당하는 타자를 향한 도덕적 책임성 역시 사라진다. 홀로코스트 같은 거대한 집단적 인종학살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 간에 도덕적 책임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되는 과정이 선행됐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태고의 도덕적 충동들의 영향을 중립화하는, 살인기계를 그런 충동이 발생하고 적용되는 영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그런 충동을 그러한 과업에 대해 주변적인 또는 전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조건에서만 수행될 수 있었다.”3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거리가 사회적으로 생산됐을 때, 독일인에게 유대인이 도덕적 충동에 의해 영향받는 상호작용 영역에서 사라졌을 때, 그래서 도덕적 책임성이 발휘돼야 할 ‘이웃들’이기를 멈추고 비인격화된 타자로 추상화됐을 때, 홀로코스트가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희생자 가족들을 시민들과 결합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들을 사회적으로 분리시켜 고립된 분향소 안에만 가둬두려는 박근혜 정부의 기획은 도덕적 책임성이 시민사회 안에서 작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바우만에 따르면, 도덕적 능력의 존재에 책임 있는 요인들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영역, 즉 ‘타자들과 함께 있는’ 사회적 근접성의 맥락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사회적인 것’은 타자의 근접성과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성을 원형으로 하는 상호주관적 관계의 기본 구조이자, ‘공존’ 내지는 ‘타자와 함께 있음’의 맥락으로 이해되는 인간 주체의 존재론적 양식으로서 인간세계의 ‘불변의 실존적 영역’을 상징한다.4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 진도 앞바다에서 그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국가의 모델, 즉 시민의 안전 일체를 책임지는 국가에 대한 환상과 믿음은 철저하게 붕괴돼버렸다. 그것이 우리에게 닥친 첫 번째 재난이었다면 이제 두 번째 재난이 닥쳐오고 있다. 재난 이후의 재난, 참사 이후의 참사는 바로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적·도덕적 책임성 자체를 소멸시켜버리려는 어떤 반동적 흐름의 출몰이라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그날, 곧 ‘4월16일’ 이후 지금 한국에서는 ‘사회적인 것’의 작동을 둘러싼 새로운 적대의 전선이 구축되고 있다. 바우만이라면 그런 갈등을 사회의 법과 도덕의 법 사이의 갈등, 또는 전체 사회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갈등이라고 불렀을 텐데, 한쪽에서는 ‘사회적인 것’의 활성화를 억압하려는 반동적 흐름이 국가권력과 우익세력이 준동하는 담론과 실천의 공간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 도덕적 책임성을 발휘하려는 운동이 나타나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부터 다양한 조직 및 결사체들의 대자보와 시국선언, 신학생들의 단식농성, 전국 각처에서 열리는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 그리고 추모예배와 추모미사를 통한 종교적 애도, 합동분향소로 이어지는 추모의 발길들에 이르기까지, 애도 행위의 방식과 애도하는 주체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책임성에 의해 매어져 있는 타자와의 관계에 도덕적으로 충실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을 활성화한다는 점에선 일치하는 하나의 큰 흐름이다.

희생자 및 그 가족들과 시민들 간의 사회적 거리를 확대하려는 권력의 기획에 맞서 사회적 근접성을 확보하려는 도덕적 저항의 운동이 현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그것이 이미 부재하는 것으로 드러나버린 ‘국가’를 재현/대의하는 기표를 다시 찾으려는 기획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야권의 일각에서는 노무현 또는 문재인 정부였으면 구조 활동에 성공했을 것이라거나, 그들이 대통령이었으면 세월호 참사 같은 재난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이 유포되고 있다. 단적으로 김영삼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이른바 1987년 이후 역대 모든 정권이 공공부문의 민영화, 안전 부문의 외주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정책적으로 일관해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퇴행적 환상에 불과하다. 이미 비어 있는, 이미 부재하는 것으로 드러난, 이미 가능성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린 국가의 자리에 다른 어떤 주권자를 내세워 그 결핍을 가릴 것인지를 두고 보수와 진보가 무의미한 공방을 벌이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은 세월호를 ‘(국민을 지켜주는) 국가’라는 환상체계의 어떤 불가능성, 일종의 ‘실재’(the real)를 표시하는 기표로 사유하면서, 그러한 실재를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의 형태를 발명하기 위해 분투해야 할 때다. 그 분투 과정에 ‘사회적인 것’의 활성화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함을 재차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현 정세에서 ‘사회적인 것’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탈정치적으로 전형화하고 비인격적이며 추상적인 타자로 범주화하려는 외부의 방해와 내부의 유혹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시민사회의 주체적인 반성과 노력을 통해서만 그 동력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 덧붙여 그러한 반성과 노력은 우리가 희생자 가족들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도덕적 충동을 잃지 않을 때만 가능함을 잊지 말자.

바다 깊은 곳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 수많은 희생자들의 목소리, 끝내 우리에게 언어로 전달되지 못했지만 세계의 어딘가를 지금도 여전히 떠돌고 있을 그 목소리, 그 비명과 울부짖음은 이제 남겨진 가족들의 목소리와 합쳐져 우리가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밖에 없으며, 보려고 하지 않으려 해도 볼 수밖에 없는 타자”5로서 우리 앞에 출현하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다가 허망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고,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말하고 있지만 이제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를 가족들만큼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들리지 않아도 가족들은 그 목소리에 담기고자 했던 마지막 외침을 똑똑히 알고 있다. 가족들은 청와대를 향해 행진할 때마다 그 말을 죽은 이들을 대신해 외쳤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희생자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들어야만 했던 “가만히 있으라”는 그 권위적인 명령이 지금 여기 남겨진 가족들을 향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더 크고 더 권위적인 목소리로 울려퍼지면서 가족들의 외침을 점점 압도해가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가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라!” 고통과 울분 속에서 지쳐가는 희생자 가족들의 외침만으론 나날이 더 거세지는 저 권위적인 명령을 쉽게 뚫어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족들 곁에서 함께 외쳐야 한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멀리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우리 입으로 그 외침이 울려퍼지는 모든 곳이 바로 세월호 참사에 관한 가장 도덕적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애도가 수행되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한 애도의 장소야말로 도덕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 도래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1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

2 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정일준 옮김, 새물결, 307쪽, 2013.

3 같은 책, 313쪽.

4 같은 책, 299~306쪽 참조.

5 복도훈, ‘목소리가 사라지는 곳으로 문학이 가야 한다’, <눈먼 자의 초상>, 문학동네, 581쪽, 2010.

글 정용택 신학연구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공저로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등이 있고, 공역서로 <21세기 민중신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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