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8:08 수정 : 2014.02.04 10:50

남성성의 화신과도 같은 추성훈이 사랑이 앞에서 ‘딸바보’가 되고 마는 모습은 오늘날 육아가 어른과 아이 사이에 어떤 보편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는 순수 자체로 여겨지면서도 부모를 전승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KBS 제공
빔 벤더스의 역작 <베를린 천사의 시>는 “아이가 아이였을 때 활개치며 걸었다. 바다가 되기를 바랐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어떤 평가도 없었고 아무런 습관도 없었다. (중략) 그리고 언젠가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아닐까?”로 시작된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를 반복하는 이 심오한 ‘헌시’는 “환상적이면서도 또 현실적이다”1. 영화에서 아이들은 유일하게 ‘천사’를 볼 수 있는 존재다.

아이가 태초부터 이처럼 신성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어린이에 대한 특별한 조명이 이뤄진 것은 서구에선 최소한 근대 이후, 국내에선 방정환의 등장을 기점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존재로서 아이에 대한 인류의 ‘애정’은 꽤 오랜 역사를 지닌다. 예컨대, 마태복음은 “너희들이 아이같이 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소박과 진실의 상징, 무정형성의 순수 그 자체로서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은 그래서 언제나 대단히 관용적이다. 세대를 영속하는 존재라는 인류적 본능의 측면이 투영되고, 곧 나의 존재이기도 한 아이들은 단순히 어른의 형상을 축소시켜 존재하는 인류가 아닌 아직 이성을 다 갖지 못해 우리가 보듬어줘야 할 존재로 추앙된다.

아이를 인류의 원천적 기쁨으로 보는 이 태도는, 그러나 매우 역설적인 뒷면을 갖고 있다. 무규정성의 존재인 아이를 규정성의 영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마땅히 훈육과 교화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강렬한 믿음이 그것이다. “아이들의 피부와 살 안쪽에 지난 세월의 역사적 경험을 축적, 전승시켜 일정한 규정성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2은 모든 어른이 안고 있는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놓인 갈등과 불화는 기본적으로 모두 여기서 촉발된다. 아이에겐 보호자이자 강력한 통제자인 ‘부모’가 필요하고, 그것을 보호할 주체로서 ‘가족’ 역시 필수적인 것이 된다. 부모와 가족은 아이를 정상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장치로 인정되고, 그 장치의 총체적 활동을 때에 따라 ‘육아’ 혹은 ‘교육’으로 사회는 재호명한다.

이쯤이 아이에 대한 진지한 관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철학적 사유에 근거해 삶을 꾸려나간다기보다 펄펄 끓는 자본주의의 온도에 맞춰, 시시각각 형상을 달리하는 소비문화의 문법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에 대한 진지하고 철학적인 물음은 그래서 매우 즉자적이고 시각적인 것으로 치환됐고, 철학적 관점에 따라 ‘판단’된다기보다는 당대에 이미지화되는 논리에 따라 ‘선택’된다. 예컨대, 추사랑에 대한 열광처럼 말이다.

추사랑은 최근 대중문화가 호명했던 모든 육아 트렌드를 함축한 채, 우리 앞에 등장했다. ‘딸바보’와 ‘아빠 육아’는 전통적으로 상정되던 부모보다 훨씬 젊고 게다가 미숙하기도 한 변환기적 부모 세대의 등장을 사회가 어느 정도 위로하던 서술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녀 성비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딸바보’는 구악에 대한 가장 통렬한 조롱이자 가뿐히 그것을 넘어선 세대의 힘을 보여주는 ‘구호’였다. ‘아빠 육아’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를 훈육하는 가부장의 권위가 더 이상 ‘엄부’라고 하는 앙상한 전통에 의존할 수 없음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아빠 육아’는 일종의 계급적 필연이자, 사회적 정반합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아빠는 아이 위에 군림하는 대상이 못 되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추사랑은 이 지점에서 완벽에 가까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사랑이는 애정을 갖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순수함을 갖추고 있다. 그 무렵 아이들 중에 그러하지 않은 아이가 없지만, 무정형성(!) 측면에서 사랑이는 남다른 ‘러블리함’을 갖고 있다(그래서 아예 ‘추블리’가 아닌가!). 사랑이의 아빠, 추성훈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아는 ‘남자’다. 이중의 국가 체계 속에서 맨몸으로 버티며, 가장 거친 승부의 세계에서 제 근육의 힘만으로 세월을 헤쳐온 추성훈의 존재감은 모든 남자가 꿈꾸는 뻐근한 이상형 그 자체다. 게다가 그의 아내 야노 시호는 한국으로 치면, 전지현쯤 되는 일본 사회의 연인이었다. (그래서 추성훈이 야노 시호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혐한류가 불기도 했다. 어떤 일본 네티즌들의 심리는 ‘저 우락부락한 재일조선인이 우리의 여신을 빼앗아갔다’는 허탈감이었다.)

그런 그가 ‘딸바보’고 ‘아빠 육아’의 당사자가 됐다는 점은 이 문제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지금 부모 세대의 공통 과제가 됐단 점을 보여준다. 야성적인 힘, 타고난 자유인의 기질을 지닌 이 사내는 48시간 동안 추사랑에게 완전히 갇혀, 고작 사랑이를 체육관 바닥에서 재우며 운동하는 것 정도 외에는 그 어떤 주체적 행위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온전히 사랑이에게 속박당한다. 사랑이는 아주 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대화하다가도 갑자기 울어버리고, 잘 먹다가 변비에 걸려 음식을 별안간 거부하고, 온천을 경험하게 해주고픈 아빠의 마음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 사소하지만 정말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복잡계의 세상에서 추성훈은 모든 아빠가 그러한 것처럼 종종 길을 잃고 갑갑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KBS)의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유별나게 ‘사랑이의 피부와 살 안쪽에 어떤 역사적 경험을 축적, 전승시키는 것’을 육아의 주요한 목적으로 한다. 그가 살아온 세월의 명령일지도 모르는 이 ‘교육’은 그 프로그램이 유일하게 아이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지점이다. 사실상 모든 것을 갖춘 아이들의 잘 다듬어진 가족에서 엄마라는 요소를 일정 시간 동안 배제하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낳는지를 전파하는 그 프로그램에서, 사랑이는 유일하게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질서의 세계를 보여주는 아이다. 아버지가 구축한 규정성의 세계로 진입하도록 사랑이가 길러지는 모습은 단순히 육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예능의 차원을 넘어 우리에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문제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환상적이면서 또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추사랑을 바라보는 심경에는 아이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시각이 놀라울 정도로 모두 함의돼 있다. 다분히 <일밤-아빠! 어디가?>(MBC)를 의식한 이 프로그램은 추사랑을 통해 단순히 순진한 아이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너는 언젠가 내가 될 수 있을까’를 모든 부모를 대신해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1 이상용, ‘영화의 아이들’, <문화과학> 21호.

2 조형근, ‘어린이(기)-순수한 자기를 꿈꾸는 우리들의 초자아’, <문화과학>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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