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7:54 수정 : 2014.02.04 10:49

1. 등태산소천하(登泰山小天下)

서기전 517년 겨울. 공자는 자로와 안로, 염경 등 붕우들과 태산에 올랐다. 공자의 나이 35살이었으니 붕우들은 20대 중·후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눈발을 헤치고 태산을 오르며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공자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자문자답하듯 자로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일까?”

“발밑의 낭떠러지부터 피하는 거지요.”

“그런 다음엔?”

“길을 찾았으면 열심히 닦아야죠, 히히.”

“그다음은?”

“소인은 떨어진 금덩이를 찾겠습니다만, 대인이라면 품은 뜻을 펼쳐야죠.”

“뜻이란 무엇일까?”

“뜻이야 품은 사람의 크기만큼 다르겠지요.”

“나, 구(丘)는 나의 뜻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자로가 공자를 멈춰 세우고 되물었다.

“언젠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의 가슴에 새긴 뜻은 빼앗을 수 없다(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자한’편 25장)고. 하물며 선생님이겠습니까?”

태산의 정상은 자로의 시원한 말처럼 청명했다. 겨울 태산이 이렇게 맑기는 드문 일이었다. 눈 덮인 산릉이 하늘로 이어지고 다시 바다로 뻗어나갈 듯 사방천지가 온통 맑고 푸르렀다. 태산은 중원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중국 5악(五嶽) 중 동악에 해당하며, 요순 시절부터 신성한 산으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공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만큼 태산을 좋아했다. 정상에 선 공자가 감개무량한 듯 외친다.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구나!”(登泰山而小天下. -<맹자> ‘진심’편 상)

붕우들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넓은 게 아니고요?”

공자가 대답한다.

“배움을 찾아 떠돌던 시절 몽산(蒙山·노나라 동쪽에 있는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높은 산꼭대기에서 사방을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문득 노나라가 비좁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태산에 올라보니, 그때처럼 천하가 작게만 느껴지는구나.”

누군가가 공자의 말을 거들었다.

“웅지를 지니면 대관(大觀)한다고 들었습니다.”

하늘을 향한 공자의 시선이 아득한 창공을 꿰뚫고 있었다. “대관이라….”

2. 천하대관(天下大觀)

‘생각해보면 우리 노나라는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주공의 후예로서 정통 문화국이라는 자부심이 크지만, 대부들이 천자의 예를 범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진(晉)나라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자립하기 어려운 처지이고, 대내적으로는 삼환이 임금을 제치고 나라의 주인 행세를 한 지 오래다. 이제는 아예 임금마저 망명해 군주가 없는 이적(夷狄)의 나라나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도가 없기는 천하열국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늘 전쟁 중이거나, 하루가 멀다 하고 폭정과 하극상의 변란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천자국이라는 주나라 왕실조차 추악한 왕위 다툼이 벌써 수년째이니, 천하 백성들의 고통을 일러 무엇하랴….’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한 것이 열다섯 살(吾十有五而志于學. -‘위정’편 4장)이니, 그때를 기점으로 공자가 인지한 당시 정세를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15살 계씨가 노나라 국가 조세수입과 병권의 절반을 차지하다.

18살 진(陳)나라에서 공자들이 태자를 죽이고, 임금이 자살하는 난리가 일어나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진나라가 초나라에 망하다.

21살 초영왕이 채나라 임금과 수행원 70명을 몰살시키고 채나라를 멸망시키다.

22살 계씨의 가신 남괴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명분으로 삼환 타도 운동에 나서다.

23살 북방의 강자 진(晉)나라가 남방의 강자 초나라를 의식해 갑차 4천 승(전차 4천 승은 말 1만6천 필, 귀족 군사 4만 명과 각종 청동제 병장기류, 노역 종사자 12만~29만 명의 대병력이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열병식을 거행하다.

25살 제나라가 서나라를 정벌하다.

27살 남방의 패권을 놓고 오나라와 초나라의 쟁패전이 본격화되다.

30살 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다. 정나라의 대정치가 자산(子産)이 죽다.

31살 송나라에서 임금과 귀족 사이에 내란(화씨의 난)이 벌어지다.

32살 주나라 왕실에서 왕위를 놓고 내전이 벌어지다.

34살 제후국인 진(晉)나라가 주나라 왕위 결정권을 쥐게 되다.

35살 노나라 소공이 계씨를 몰아내려다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하다.

자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 세상이 온통 뜨거운 가마솥 속 같군요.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염경이 말한다. “최근의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니 사형(師兄)께서 어지러운 곡부를 떠나 두루 세상을 살펴볼 이유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안로가 말한다. “우리 노나라는 임금이 추방되고, 그나마 나라의 중심을 잡아주던 숙손소자마저 죽었습니다. 이제 누가 계씨를 제어하겠습니까? 주공의 고제(古制)를 받드는 자로서 지금 계씨를 따르면 명분을 잃고, 거부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학단의 대표로서 사형이 당분간이라도 곡부를 벗어나 있어야 할 절박한 이유입니다.”

3. 현실적 이유들

곡부의 나이 많은 장로들 가운데는 공자가 망명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로 숙손소자의 죽음을 꼽는 이가 적지 않았다. 숙손소자는 숙손씨의 수장이자 노나라 재상으로서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소공의 복위가 실패로 돌아가자 단식투쟁을 벌이다 죽고 말았다.

숙손소자는 노나라 재상이던 숙손목자의 이름 없는 서자였는데, 아버지가 불의의 죽임을 당한 뒤 가문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이다. 숙손목자에게는 기이한 인연으로 얻은 수우라는 서자가 있었다. 목자의 편애를 받은 수우는 겉보기와 달리 음흉하고 야심이 컸다. 그는 목자와 적자 아들 사이를 이간시켜 아들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늙은 아버지가 이 음모를 눈치채자 아버지까지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수우는 세력이 없는 서자 하나를 꼭두각시로 삼아 가문의 수장 자리를 잇게 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숙손소자이다. 그러나 허수아비인 줄 알았던 소자는 수장이 되자 자신을 옹립한 수우부터 처단했다.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운 죄, 부자·형제를 이간질해 집안 질서를 무너뜨린 죄,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가문의 영지를 남에게 떼어준 죄 등이 수우의 죄상이었다.

이 사건은 공자가 14살 때 벌어진 일인데, 훗날 공자는 숙손소자의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

“숙손소자가 자기를 세워준 수우의 공로에 얽매이지 않고 그를 처단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위정자는 사사로운 공을 보상하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을 징벌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숙손소자가 이와 같았다.”(<좌전> 노소공 4년)

사사로운 은혜에 휘둘리지 않고 대의를 좇아 명분을 바로 세운 숙손소자의 행위를 높이 산 평가이다. 공자의 이같은 평가는 아마 숙손소자의 부음을 들은 뒤 공자가 그의 생애를 돌아보며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공익 우선의 합리주의자로서 조정 안팎의 신망이 높았던 재상의 자살은 공자가 더 이상 곡부 조정에 출사할 미련과 근거의 싹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임금이 없더라도 소자와 같은 인물이 살아 있는 한, 조정에 출사하여 임금 복위라는 명분을 추구할 수도 있으련만, 그마저도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어서 염경이 말한다.

“주나라 왕실의 내분으로 많은 낙양 사람들이 피란처를 찾아 떠나고 있습니다. 그중 중원에서 멀리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다 물산이 풍부하여 화려한 문화가 발달한 제나라가 가장 좋은 피란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때 제나라로 가서 활동한다면 높은 수준의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재사들과 폭넓게 교유할 수 있습니다. 사형의 능력에 약간의 운만 보태진다면 여러 나라에 출사하여 경륜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맥과 경험은 장차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 우리 학단의 발전은 물론 조정의 정치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형이 제나라로 가야 할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사실 주왕실의 왕위 다툼은 주공을 사표로 삼는 공자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공자 32살 때 낙양에서 주경왕이 죽은 후 서장자인 조와 적자 세력 간에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주나라가 동천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추태였다. 적자 계승을 주장하는 귀족들이 서장자 조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새 왕을 옹립하자, 조가 장례식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주나라는 이후 서장자파인 동왕과 적자파인 서왕 세력으로 갈려 3년째 엎치락뒤치락 난타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내전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직후인 서기전 516년에 진나라의 무력 지원을 받은 적자파의 승리로 끝났다.)

왕실의 내전 소식은 주경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통해 노나라에도 곧 알려졌으며, 이후 내전의 동향은 곡부 지식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특히 내전이 장기화하여 낙양의 고급 지식인들이 전란을 피해 대거 이웃 진나라와 제나라 등지로 피란을 떠나면서 중원의 귀족 문화가 주변 나라들로 더욱 전파되었다. 특히 당시 중국 최대 상업도시였던 제나라 수도 임치는 전문지식과 기능을 가진 문화집단에는 최적의 피란처였다. 임치는 오늘날의 미국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로서 높은 신분과 재력을 겸비한 문화 후원자들이 즐비했다. 주나라 왕실의 악사들이 중국 여러 나라로 흩어진 사실(‘미자’편 9장)이나 공자가 제나라에서 주나라 음악을 듣고 석 달간 고기 맛을 잃었던 것(‘술이’편 13장)도 이런 역사적 사건의 편린이었다. 공자와 붕우들은 그들이 제나라로 가면 이런 일급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고, 제후국은 물론 나중에 주왕실에도 출사할 기회가 있을 것이란 계산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4. 자산의 후계자

공자의 망명을 추동한 명분 중에는 공자 자신의 내적 동기도 있었다. 자산(子産)이란 당대 제일의 정치가에 대한 공자의 흠모였다. 장소백이 공자에게는 정치적 야심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지만, 사실 그 정반대였다. 35살 공자의 가슴속에는 커다란 야망이 자라고 있었다. 그 야망의 뿌리가 바로 자산이었다. 소국 정(鄭)나라의 한미한 대부 가문 출신인 자산의 성공 스토리야말로 보잘것없는 하급 사족 출신인 자신이 지향해야 할 인생의 좌표였다.

공자는 자산의 서거 소식을 듣고 자산의 정치에 대해 이런 총평을 남겼다.

“훌륭하다! 정치가 관대하면 백성들이 태만해지니 태만하면 엄한 정치로 죄를 살펴 바로잡고, 정치가 엄격하면 백성들이 괴로우니 괴로움이 발생하면 관대한 정치를 베풀었다. 관대로써 엄격을 조절하고 엄격으로써 관대를 조절하였으니 정치가 이로 인해 화평했다. <시경>에 ‘백성들 또한 노고가 많으니 원컨대 조금 편안케 해주기를, 나라에 은혜를 베풀어 온 세상을 편안하게 하기를’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관대한 정치를 펼 것을 말한 것이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를 따르지 말고 양심 없는 사람을 조심하며, 포학한 자와 무법자들을 막으라’고 하였으니, 이는 엄격한 정치를 펴서 잘못을 바로잡기를 말한 것이다. ‘멀리 있는 백성은 다독이고 가까이 있는 백성은 친애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라’고 하였으니, 이는 화합으로 천하를 평정할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시경>에 이르기를, ‘너무 조이지도 말고 너무 느슨하게도 않으며, 너무 강하지도 않고 너무 부드럽지도 않게 하여 정치를 너그럽게 펴니 모든 복이 모여든다’고 하였으니, 이는 화합의 극치를 말한 것이다.”

이는 고금을 떠나 현실정치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일 것이니, 공자가 얼마나 자산을 높이 평가했는지 엿볼 수 있다. 또 그 사람됨에 대해서도 “자산은 네 가지 군자의 도를 갖추었다. 그 행실이 공손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백성에게 은혜롭고 공정하다”(‘공야장’편 15장)고 극찬하고 있다.

공자에게 자산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합리적 이성주의와 민본주의적 정치철학을, 현실정치 측면에서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겸용에 대한 영감을 일깨운 정신적 스승이었다. 자산의 성공 스토리는 공자에게 정치에 대한 강렬한 선망과 시대 정신을 불어넣었다.

당시 전 중국에 명성을 떨친 자산은 공자가 여덟 살 때 재상이 되어 서른 살 때 죽었다. 삼십은 공자가 학문적으로 자립(三十而立)하였다고 말한 때이다. 자산의 서거 소식은 아마도 이듬해쯤 곡부에 알려졌을 것이다. 시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은 아무래도 별개의 일 같지가 않다. 공자의 이립 선언은 ‘제2의 자산 탄생’ 선언이었는지 모른다. 공자가 자산의 죽음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자산은 고인(古人)의 유풍(遺風)이 있는 인애(仁愛)한 사람”(이상 <좌전> 노소공 20년)이라고 하였다는데,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5. 공자, 망명을 결심하다

공자는 태산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최종적으로 망명을 결심했다.

‘나, 공구는 최소한의 계급적 기반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스무 살 전후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세습 신분도 재산도 없다. 일반적으로 보면 권모술수에 의지하는 게 현실적인 환경이었으나, 나는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만약 개인적인 출세만이 목표였다면, 애초부터 가업을 이어 무인의 길을 가거나 유력한 세도가의 가신으로 들어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미래가 불투명한 직업인 예교 전문가, 고달프고 큰 수입도 안 되는 교사의 길을 택했다. 나름대로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는 뜻이다. 무엇이 원대한가? 교육을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 군자를 길러 그들과 더불어 ‘수기안인’(修己安人)의 시대적 요청을 정치를 통해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관료로서 입신하려는 나의 가장 큰 딜레마는 내가 노나라 사람이라는 데 있다. 노나라는 누대에 걸쳐 참주의 통치 아래 있다. 정치에 참여하여 이상을 이루고 싶으나, 참주의 가신이 되는 길 외엔 정치에 기여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나, 공구의 꿈은 참주의 가신 따위에 있지 않다. 허울뿐인 조정의 벼슬은 더더욱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나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주공의 시대와 같은 이상적인 군주정의 실현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군주정 자체가 되거나.’

바야흐로 대격동의 시대, 지금은 무엇을 준비할 때인가?

공자는 삼십이립 이래 자신의 시대적 책무를 직감해왔다. 그럴수록 세상의 움직임을, 변화의 기미를 통찰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일찍이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는 느낌을 가진 때가 있었다.(孔子 登東山而小魯. -<맹자> ‘진심’편 상)

다시 태산에 올라보니, 진정한 군자의 뜻이 어찌 천하보다 작기만 하랴!

두려움을 떨치고 세계로 나가보자.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깨달아 돌아오자.

군자의 뜻이 천하를 덮을 만하다면 어찌 우리 노나라가 동쪽의 주나라가 될 수 없겠으며, 노나라의 군자 가운데 주공의 뒤를 이을 이가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6. 태산에 울려퍼진 웃음소리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자로가 물었다.

“나도 데려가주시는 거지요?”

“자네가 함께해준다면 내가 고맙지.”

“이 중유 말고 누가 선생님의 경호대장이겠습니까? 하하.”

“외국 생활은 고달플 것이다. 괜찮겠는가?”

“걱정 마십시오. 선생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이인’편 25장), 덕 있는 자에겐 반드시 그 이웃이 있다, 아닙니까?”

“그래, 그곳에도 우리와 뜻을 같이할 붕우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선생님이 계신다면 어디든, 누구든 상관없어요.”

자로가 일행 앞으로 나섰다.

“조국을 떠나기 전에 함께 읊어봅시다! 선생님의 멋진 말씀을!”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자더라도(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으니(樂亦在其中矣)

의롭지 못하면서 부귀함이란(不義而富且貴)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도다(於我如浮雲) -‘술이’편 15장

젊은이들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태산에 울려퍼졌다.

우하하, 우하하하….

글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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