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4:30 수정 : 2014.01.06 16:12

신대철씨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를 위한 공연을 준비하며 “나도 음악하는 비정규직 음악 노동자다”라고 연대를 표시했다. 사진은 기타 대선배인 최이철씨(왼쪽)·한상원씨(가운데)와 공연하는 모습.
그가 고개를 들었다.

콜텍문화재단이 주최한 ‘G6 콘서트’에서는 고개를 떨구고 기타만 치던 그였다. 공연의 주체가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해고한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계약을 해버린 상황이었다. 그는 공연 뒤 “힘든 공연이었다”고 고백했다. 해고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으리라. 속죄의 마음으로 해고노동자를 위한 공연 ‘기타 레전드, 기타 노동자를 만나다’를 기획했다. 마음에 쌓였던 천근의 빚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인 기타 연주로 갚고 싶었다.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씨, ‘한상원밴드’의 한상원씨 등 ‘G6 콘서트’에 참가했던 대선배들도 동참의 뜻을 밝혔다. 300여 명이 가득 찬 공연장에서 ‘기타는 자유다’ ‘기타는 저항이다’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현실은 온전한 자유가 아니다. 기타 노동자들에게 기타는 자유가 아닌 억압이고 구속이며 해고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노동자들을 지켜주는 ‘작은 날개’1이고 싶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에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마냥 “행복하다”고 했다. 한국 록의 전설적인 밴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씨가 기타로 속죄를 하는 순간이었다.

그를 공연 일주일 전 자신이 대표로 있는 ‘에코브리드’ 지하 연습실(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만났다. 그는 기타와 자유, 기타와 노동자, 노동자와 저항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나도 음악하는 비정규직 음악 노동자다.”

-얼마 전 경사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기타 제조 업체 펜더사에서 시그니처 기타를 증정받았는데, 한국인 최초로 받은 아버지 신중현씨(2009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일렉트릭 기타 중 최고 제조 업체인 펜더사에서 인정받아 영광입니다. 아마도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서 김목경씨와 김도균씨 그리고 저에게 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실력을 인정해서 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 아버지와 제가 받은 기타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아버지가 받은 기타는 트리뷰트(헌정) 개념입니다. 완전 등급이 다르죠.

-아버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음악 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이나 무게감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데뷔 때부터 항상 들었던 말이고 듣기 싫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는 ‘신중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정말 부담스러웠으니까요. 아버지의 그늘이라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컸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음악적 딜레마이기도 했죠. 아버지를 뮤지션으로 존경하지만 그 영향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거대한 우상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되죠. ‘신중현의 아들이라면 이런 음악을 해야지’ 하는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하하. 요즘은 그 자체가 나의 운명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요.

-신중현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음악을 했을까요.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네요.

-혹시 아버지가 기타를 치라고 강요하진 않았나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다보니 동경을 했습니다. 10살 때던가 11살 때던가, 처음 기타를 쳤는데 제가 먼저 아버지에게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활동정지2를 당하셨을 때였습니다. 매일 집에 계셔서 기타를 배울 수 있었죠. 만약 그때 그 사건이 없었고 아버지가 정상적인 활동을 했다면 얼굴 보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박정희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하하.

-기타 이외에 잘하는 것이 있다면.

=없어요.

-유전적인 면으로 본다면 어릴 때부터 음악 천재였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천재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쉽게 음악을 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빨리 음악을 알았던 것이 도움은 됐죠.

한국에서 뮤지션은 지금도 배고픔의 대명사다. 밴드를 하고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음반·음원 수익에만 기대서는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없다. 한류가 전세계적인 열풍이지만 그 과실을 따먹는 사람은 몇몇 아이돌과 제작사 등 극히 일부분이다. 선배 뮤지션으로서 신대철씨가 아쉬워하는 지점도 거기에 있다. 한국에서 음원 수익은 연주가·작곡자보다 유통사가 더 많이 가져가는 구조다. 대다수 뮤지션들은 음악만으로 ‘새가 되어가리’3라고 노래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뮤지션들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뮤지션들이 숨쉴 수 있게 ‘날 깨워줘’4라고 말하는 듯했다. 비판의 영역은 음악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이슈로 확장한다. 그는 요즘 ‘페이스북’ 놀이에 빠졌다.

-요즘 TV에 자주 나가셨습니다. 계기가 있는지.

=<톱밴드>(KBS)는 밴드들이 주인공입니다. 후배들이 재능을 보여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하게 됐죠. <일밤-나는 가수다>(MBC·이하 <나가수>)는 처음엔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요. ‘선수’들이 나가서 대결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우스웠거든요. 담당 PD가 직접 오셔서 전략적으로 신예 밴드인 ‘국카스텐’과 라이벌 관계를 만들면 밴드 부흥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제안해서 승낙했습니다. 그래서 멤버를 급조했어요. 김바다·남궁연씨에게 전화해서 무턱대고 같이 하자고. 하하하.

-<톱밴드>와 <나가수>의 출현이 개인적으로 미친 영향이 있었나요.

=시나위가 다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나가수>를 하다보니 ‘음악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사실 너무 오랫동안 ‘재야’에 있었습니다. 2006년 9집을 낸 뒤 7년 동안이죠. 뮤지션들은 음반이나 작곡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다시 음악계로 돌아왔는데 요즘 그쪽은 어떤가요.

=전체적으로 음악 하는 사람들이 돈 벌 수 없는 구조입니다. 밴드는 말하면 입 아프고…. 뮤지션들도 생활인이고 경제인인데 음악 해서는 돈을 못 벌더라고요(다 그런 것은 아니고). 뮤지션들에게 돌아가는 음원 수익이나 저작권료가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음원 유통사 등 일부에게 혜택이 돌아가게끔 돼 있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 음악을 하고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음악이 풍요로워지는데 음악 하는 사람들은 항상 배고파요. 외국에 나가보면 한류 때문인지 모두가 아이돌만 있는 줄 압니다. 밴드 한다고 하면 ‘한국에도 록밴드가 있느냐’며 놀라워해요.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도 우리 곡을 듣고 놀랐습니다. 자찬 같지만 ‘미국 밴드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영업용 멘트였나. 하하하.

-페이스북 마니아가 됐습니다.

=하다보니까 견고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졌습니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에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며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발언도 많이 하시던데요.

=교학사 역사 교과서 문제, 탈핵 관련 책 추천 등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올렸는데 언론에서 인용해 쓰면서 화제가 되더군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요즘 사실 자제하고 있어요. 지금 발언이 너무 나가면 ‘신대철은 정치적이구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 같아서요. 내가 이런 말을 할 입장도 아니고…. 조용필 저작권, ‘사랑과 평화’ 상표권 같은 경우에는 내 글이 다른 사람에겐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좀 부담이 됐죠.

자제하고 있다는 신대철씨의 ‘페북질’은 여전히 활발하다. 얼마 전 철도노동자를 우회적으로 지지하며 “코레일 사장님 가슴에 피멍 드셨나요? 그게 아니라면 안녕히 가세요”라는 멘트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참회의 공연’을 한 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발언에 노동 의제를 더한 듯하다.

복직을 위해 7년째 기나긴 싸움을 하고 있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시나위의 노래로 비유하자면 ‘매 맞는 아이’5다. 사 쪽은 길들이려 하고 노동탄압에 무감각해지라고 강요한다. 대법원마저 2심의 ‘부당해고’ 판결에 대해 ‘심리가 미진했다’며 파기환송해 ‘겨울비’6가 내리게 했다. 그들에게 행복한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 미국의 유명 록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가 연대의 뜻을 밝히고 한국의 기타리스트 신대철씨가 참회의 공연을 하는 등 ‘뮤지션 응원군’이 늘었는데도 해고노동자들의 겨울은 아직도 칼바람 앞에 무방비 상태다.

-콜텍문화재단이 주최한 ‘G6 콘서트’에 참가했다가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일단 해고노동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콜텍이 콜트악기와 같은 회사인지 몰랐습니다. 콜트악기가 노동자 해고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콜텍과 콜트악기가 같은 회사라는 걸 알고 난감했죠. 페북에 공연 포스터를 올리고 난 뒤 뭇매도 맞았고요. 뮤지션들은 보통 악기회사들과 엔도저7를 맺습니다. 그런데 콜트는 국내 아티스트는 무시하고 주로 해외 아티스트와 엔도저를 맺었죠. 솔직히 콜트(사 쪽)를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에게 약속을 하나 하셨던데.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했습니다. ‘G6 콘서트’로 상처받은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을 위해 공연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를 위한 공연입니다.

-어떻게 공연하게 됐나요.

=우리 쪽에서 ‘문화연대’로 연락을 했습니다. 상처받은 분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죠.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해서 공연이 성사됐습니다. ‘G6 콘서트’에 참가했던 김목경·최이철·한상원 선배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흔쾌히 동의해주셨어요. ‘당신들 직업이 기타리스트인데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문제를 모를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질 줄 압니다. 하지만 모든 사회문제를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공연 뒤에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할 계획인가요.

=일단 재판이 진행 중인데 우리가 끝까지 동참한다고 해서 어떤 영향이 있는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해고노동자 분들과 뜻을 같이한다는 생각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해고노동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음악하는 연주 노동자입니다. 더군다나 비정규직이고 계약직이죠. (해고노동자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조명을 받고 TV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대단한 권력이 나올 것 같지만 똑같은 노동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식을 같이하고 있고 같은 편이죠.

-뮤지션들이 대체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높은가요.

=솔직히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뮤지션들이 대중적 인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을’의 입장이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면 꼭 보복이 들어옵니다. 대중음악계가 시대를 노래하는 것이 참 어려운 세상이죠. 물론 옛날에는 더했지만 지금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연예인들을 한 방에 보내버리지 않습니까. 물리적인 것은 없지만 스캔들을 만들어 생명줄을 죄어버리는 방식이죠. 그래서 음악에다 은유적 메시지를 담습니다. 신곡에도 그런 메시지를 담은 노래가 있어요. (약간 비굴해 보이기는 하지만) 뮤지션은 음악으로 말하는 것이 때론 가장 큰 저항의 방식이니까요.

신대철씨는 서울고 2학년 때 영국의 록밴드 ‘레드 제플린’ 같은 위대한 밴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학내 밴드인 ‘센세이션’을 결성했다. 하지만 밴드 구성원 중 악기를 배운 사람이 거의 없어 좌절했다고 한다. 드럼 친 지 석 달 된 친구가 그중 실력이 가장 나은 멤버였다고 회상한다. 그때 그는 제대로 된 음악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시나위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1986년 1집 앨범을 낸 뒤 해체·재결성의 부침을 겪으며 27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시나위는 무수히 많은 뮤지션들을 배출했다. 임재범·김종서·서태지·김바다·손성훈·김민기·진찬규…. 그들은 시나위에서 ‘크게 라디오를 켜고’8 다 함께 노래하고 연주하며 음악의 기지개를 켠 뒤 자신들의 음악을 하기 위해 떠나갔다.

-이상적인 밴드는 어떤 밴드인가요.

=클래시컬한 밴드라고 생각해요. 외국의 경우처럼 멤버 교체 없이 늙어서도 함께할 수 있는 밴드죠. 시나위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어요. 앨범을 낼 때마다 보컬이 바뀐 이유도 너무 어렸을 때 밴드를 시작해서 그런 것 같아요. 경험도 없고 조정해줄 사람도 없었어요. 시나위가 초대박이 나서 ‘너 나가면 굶잖아’ 하는 정도가 아닌 이상 붙잡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뮤지션 중 특히 밴드 하는 사람들은 배고프잖아요.

-시나위가 해체·재결성을 반복하는 등 부침을 겪은 것에 경제적 여건이 크게 작용했나요.

=솔직히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소속 기획사가 없다보니(1990년대 이후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인디적인 성격이었죠. 웃기는 게 옛날엔 계약서도 없이 많이 계약을 했어요. 앨범을 만든 레코드사는 정산은 안 해주면서 되레 큰소리를 쳤죠. ‘너희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돈 벌면 되지 않느냐’고. 명색이 록밴드인데 나이트클럽에 가서 디스코를 하라니. 하하.

-지금의 시나위는 어떤가요.

=‘개방형 밴드’입니다. 하하하. 고정 멤버 없는 밴드.

-고정 멤버 없는 록밴드라니, 생각이 바뀐 건가요.

=고정 멤버가 정설인데,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실험적인 구상이라고 말해두고 싶습니다. 사실 멤버 교체가 잦았는데 그걸 장점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최근 음악계 화두도 개인주의잖아요. 음악 툴이 발달하다보니 밴드 스타일로 곡을 만드는 게 많지 않습니다. 모두 컴퓨터로 작업하지. 저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파일을 받고 툴 속에서 공유하는 거죠. 요즘 음악 환경 자체가 예전과 달라졌는데 이를 수용하면 장점이 될 수 있겠다는 거죠. 지금 저하고 베이스, 보컬 등 3명만 정규 멤버처럼 홍보하는데 음악 환경을 간소화했다고 해야 하나요.

-그럼 앞으로 세션이 많아지겠습니다.

=분야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레이션도 할 생각입니다. 음악을 즐기는 측면에서, 자유로운 발상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솔직히 전에는 음악을 도 닦는 기분으로 했습니다. 비유가 맞을지 모르지만 독립투사의 사명감처럼 등 떠밀려 한 경우도 많았죠.

-콜라보레이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십시오.

=‘시나위는 반듯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많이 받았습니다. 록의 정통성 자체를 인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다른 시도도 해보고 싶어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말은 욕이나 다름없죠. 나도 삐뚤어지고 싶은데. 하하. ‘예전이랑 많이 바뀌었네’라는 말이 칭찬인 것 같아요. 록을 뛰어넘어 새로운 음악적 문법들도 적극 수용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폐쇄적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장르음악을 하다보면 폐쇄적인 뮤지션이 됩니다. 지금은 탈장르 시대잖아요. 옛날에는 장르 간 벽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은 좋은데 실생활에서도 그런 행동이 똑같이 나타났죠. 서로 무시하고….

-최근 음악적 행보를 보면 의외로 열려 있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정통성보다 열린 음악을 하자는 것은 언제부터 생각했나요.

=새 앨범을 낼 때마다 항상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창의력의 끝을 보여주려 매번 노력했죠. 음악은 창작인데 카테고리 안에 갇혀 있으면 스스로 한계점을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벽을 허물기 위해 연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시나위와 신대철의 미래는 ‘희망가’9인가요.

=최근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와 선이 닿아서 채널이 열렸습니다. 해외 뮤지션들과 콜라보레이션 형식으로 음반이든 공연이든 할 것 같아요. 이러한 작업이 글로벌한 발매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음악은 전세계 공통언어입니다. 전세계가 공유하는 음악을 만들면 좋겠어요.

인터뷰 서정민 <한겨레>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

정리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 시나위 9집 타이틀곡.

2 박정희 정권 때인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자 신중현씨의 노래 <미인> <나는 너를 사랑해> 등 11곡이 방송 금지된다. 그 뒤 그는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4년간 활동정지를 당했다. 1979년 해금되기까지 모든 음반·공연 활동이 금지됐다.

3 2집 타이틀곡.

4 8집 타이틀곡.

5 5집 <매 맞는 아이> 타이틀곡.

6 4집 타이틀곡.

7 Endorsers. 제조사와 전문가가 맺는 파트너십. 음악계에서는 뮤지션들이 악기를 제공받고 악기에 대해 보증하는 것을 말한다. 마케팅 방법으로 자주 쓰인다.

8 1집 타이틀곡.

9 7집 타이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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