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3 12:29 수정 : 2014.01.07 10:52

사우스웨이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릴 적부터 정말 2013년이 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벌써 2014년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새롭고 낯선 연도에 충분히 익숙해지기도 전에 2014년은 지나가버릴 것이다. 연도뿐인가. 이제는 해마다 자신의 나이를 고쳐서 말하는 일이 지겨워진 사람도 꽤 있을 법하다.

음악에 경계는 없다, 그러나

‘아소토유니온’을 거쳐 ‘윈디시티’에서 레게와 펑크솔(Funk-soul)의 실력자로 인정받은 김반장 역시 그러할 것이다. 겉모습이 어리게 보인 탓에 이태원에서 힙합 패션과 문화의 유통 장소였던 ‘다코너’의 주인장에게 반말을 듣자, “겉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대꾸했던 청년 말이다(이태원 연대기 4- 힙합 문화의 요람 다코너와 틴틴형, <나·들> 2013년 2월호). 그는 훗날 프랑스 낭트에서 건너온 아티스트 프랑수아 리알랑과 함께 다국적 프로젝트 ‘아이 앤 아이(I And I) 장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게 된 김반장도 지금쯤은 다코너가 2013년 어느 날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굳이 이태원이 아니라고 해도 음악동네 이곳저곳은 국적을 넘나드는 교류가 잦은 편이다. 아무래도 한국의 음악인들은 여러 조건 덕분에 일본 음악인들과 교류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이상은이다. 일본 음악인들과의 협력에 의해 이상은은 존중받는 싱어송라이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고,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하지무 다케다를 들 수 있다. 장기간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는 새드레전드(Sad Legend)의 나마 역시 자신의 밴드를 재개하기 전 일본인 뮤지션들과 함께한 적이 있다. 방송 인터뷰에 따르면, 함께 술을 마시다가 독도 문제로 싸우고 해산하는 사태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자그마한 클럽들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순회하다보면 한국에 체류하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가는 외국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말 그대로 인디펜던트 밴드인 ‘코즈모3’를 이끄는 로버트 오라스 주니어처럼 무명이지만 남다른 감성을 싸들고 온 외국인 뮤지션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육중한 보이스와 역동적인 연주, 격렬함과 아름다움이 장중한 조화를 이루는 감동적인 헤비사운드의 밴드 ‘테러마이트’(Terrormight)의 드럼 연주자도 크리스티안 클렘이라는 벽안의 청년이다. 이들 모두가 음악동네의 일원이지만,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는 그들을 끌어안을 준비를 해놓지 못했다.

한국을 터전 삼아 활동하던 많은 외국 국적의 음악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을 떠나야 했다. 브라질 출신의 발치뇨 아나스타치우와 함께 ‘두 번째 달’에서 활동하며 아이리시 감성을 바탕 삼아 좋은 음악을 들려줬을 뿐만 아니라, 한대수의 음반에까지 노래를 실었던 싱어송라이터 린다 컬린도 아일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참신한 록밴드인 ‘썩스터프’를 비롯해 여러 펑크 밴드에서 연주한 미국인 기타리스트 폴 브리키도 그런 예다.

불법체류자로 추방당한 음악

물론 한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된 경우는 예외다. 드럼과 비브라폰 등을 다루는 타악기 연주자 크리스 바가는 미국 네브래스카를 떠나 한국에 정착했고, 십수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재즈 음악인들과 작업했을 뿐만 아니라 ‘레이니선’ 같은 록밴드에서 연주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대학에서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다.

2009년 10월, 한 외국 음악인이 연행돼 보름 만에 강제 추방됐다. 보도에 따르면,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에 앞선 조처이자, 정부 비판적 집회에 참여하고 다양한 인권·문화 운동에 나선 탓에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네팔에서 태어났으나 18년을 한국에서 보낸 미누이다. 그는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에서 노래하는 음악인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팀을 결성해 한국에서 음반을 내고 한국에서 공연을 해온 밴드였다. 길을 가다 무작정 찾아간 화장실의 손잡이가 잠겨 있어도 거부당한 기분이 들어 괜히 원망스럽기 마련인데, 하물며 공식적인 활동을 10년이나 해오고도 자신이 단속(Crackdown) 대상일 뿐인 현실에 대해서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때 한국은 그들을 ‘철거’했다.

다른 편에선 어떠할까. 간혹 우리는 ‘올바른 역사와 가치관’을 위해서 외부의 흔적을 지우려고 해왔다. 누군가 서울 중심부에 일제와 미군의 잔재를 둘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직설하면, 용산의 미군기지다. 그런데 그곳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 있고, 군사 목적만이 아니라 주거·교육용으로 지어진 미국식 건축물이 즐비하다. 과연 ‘공원’을 만들기 위해서 이것들을 모두 철거해야 할까?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전에 한 번쯤 주저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 온 영국 남자가 이태원의 클럽에서 한국 여자를 만나 사귀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주위에 흔한 이야기다. 그러더니 1년 남짓 뒤, 둘은 결혼한다. 여기까지라면 흔치는 않으나 특별하다고까지 말하기엔 다소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음악인이다보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계를 넘나든 두 남녀, 사우스웨이

영국 남자와 한국 여자로 구성된 ‘사우스웨이’(South-way)는, 스스로 말하길, 뉴웨이브 일렉트로 록밴드다. 그들은 1980년대의 뉴웨이브와 포스트펑크로부터, 21세기에 과거의 유산과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며 새롭게 탄생하는 록음악의 선상에 걸쳐 있다. 폭넓은 경험을 통해 색다른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우스웨이는 처음에는 1인 밴드였다.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부터 음악 작업을 시작한 숀 제이슨은 1990년 미국으로 이민해 방방곡곡에서 공연하며 경험을 쌓았다.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숀은 2002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스튜디오를 만들어놓고 녹음 엔지니어로서도 일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우스웨이의 첫 번째 음반 (2004)과 두 번째 음반 (2007)을 만들어 미국에서 발표했다. 사우스웨이가 또 다른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를 서울이 제공했다. 2007년 한국에 온 숀은 특별한 느낌을 받아 장기간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여행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훗날 세 번째 음반 까지 완성하게 된다.

2008년 서울에서 맞은 크리스마스이브는 특별했다.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숀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던 시은을 만났고, 그들은 곧 2인조 밴드로 거듭나 여러 뮤직 페스티벌과 클럽에서 함께 공연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태원을 비롯해 서울 곳곳의 거리에서 공연하는 버스커로 남다른 활동도 시도했다. 사우스웨이로 하나가 된 숀과 시은은 미국으로 가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뉴올리언스 등을 돌며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2010년 2월에는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뉴올리언스와 서울을 거쳐간 사우스웨이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의 웨어하우스에 음악작업실을 만들고 새로운 곡들을 담아 EP (2013)를 완성했다. 자유로이 지구 곳곳을 누비며 음악의 길을 개척해온 사우스웨이는 영국에서 공연 활동을 하다가 두 남녀로 처음 작업한 음반 를 녹음했다. 그리고 2013년 서울로 돌아와 제법 큰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에 출연하고, EBS의 음악 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에도 출연했다. 독특한 이력과 인연을 지닌 사우스웨이는 여행이 만들어낸 ‘뉴웨이브’ 록밴드이며, 경계를 넘어 담 자체를 무화시킨 음악인들이다.

“하나의 나무에서 나온 나뭇가지들”

요즘은 워낙 정보가 몰리다보니 보지도 않고 봤다는 착각이 드는 영화도 많아졌다. 원래의 책은 읽지 않은 채 어떤 특수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비판한 책을 읽고서 원저를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런 식으로 오해받은 책과 저자가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적기도 힘들다. 군사독재 시절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와 사회주의가 틀렸다고 가르쳤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마르크스의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어느 계간지에 실린 애덤 스미스와 <국부론>에 대한 글에 직접 인용된 문구들을 읽다가 감동에 겨워 버스 차창 밖을 한참이나 내다보았다. 원저와 후대의 비평서들을 모두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면, 후대의 비평서 여러 권을 읽을 시간에 원저 한 권을 읽는 편이 낫다고 확신한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선입견의 문제다. 통속적인 선입견뿐만 아니라 올바르다고 여기기에 갖게 된 선입견까지 포함한다. 다른 하나는 경험의 방식이다. 직접경험은 간접경험에 비해 빈도가 낮을 수밖에 없고, 또한 직접경험이 간접경험보다 반드시 심도와 감도가 낫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직접소통의 창구가 유지되고 넓어진다는 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갯벌은 모래와 진흙의 구성비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되고, 서식생물의 종류도 달라진다. 모래와 진흙이 적당히 섞여 엽낭게들이 만들어놓은, 작고 동글동글한 흙덩이들과 다양한 해안생물들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흙-꽃이 만발한 해변을 걷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드물 것이다. ‘아이 앤 아이 장단’의 작품 중 제목부터 의미 있는 미니음반이 있다. (2008)다. 이 음반 안에 있는 문장 하나를 지금까지 써온 말들을 위해 인용한다면, 제법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내심 뿌듯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나무에서 나온 나뭇가지 같은 존재들이다.”

글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이다. <결국, 음악> 등의 책을 썼으며, 지난해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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