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9:19 수정 : 2014.01.07 10:43

구리실 농장의 김종옥·서순덕 부부(왼쪽). 2013년 김종옥의 농장은 다시 살아 있었다(오른쪽).
감농사만 짓는 ‘감 전업농’ 김종옥. 1958년생이니 이른바 ‘오팔년 개띠’, 쉰여섯이다. 나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이자 전남 구례군 농민회 회장님이자 나에게 처음으로 꿩만두를 맛보게 해준 형님이자 여러 가지로….

한 사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 김종옥은 ‘김종옥의 손’이다. 김종옥의 손을 본 사람들은, 그의 이력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손을 두고 ‘농부의 손’이라는 전형성을 부여한다. 그만큼 그의 손은 크고 거칠고 무엇보다 듬직하다. 그의 손이 흙이고 그의 손이 땅이다. ‘디스 이즈 농부 손’이다.

유기농업기능사 자격번호-07404150211G. 그는 이른바 ‘탑푸루트’다. 그게 뭔가? 농촌진흥청에서 추진하는 탑푸루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사과·배·포도·감귤·단감을 크기·당도·색도·안전성 등 최고 품질 기준에 도달한 과실로 경작하는 농부를 뜻한다. 한마디로 감농사 잘 짓는, 최상품의 감을 키우고 판매하는 농부란 소리다. 그는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에서 나고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했다.

뼈 빠지게 빚 갚다 다 날린 30대

“일 시킬라꼬 나만 공부를 안 시켰지.”

“형이 공부 좋아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4남2녀 중 위로 형님과 누님 한 분씩이 있다.

“한 번도 구례 밖에서 사신 적 없어요?”

“군대 가기 전에 딱 한 번 객지 생활을 했제. 자동차 정비하고 이런저런 장사.”

군대에 갔다와서 스물네 살부터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다. 시작은 역시 논농사. 이앙기 작업을 구례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다. 1천 마지기 이상을 했다. 물론 임대농이었다.

“우리 집 논은 스무 마지기도 안 되었어. 시골 농사가 다 그래. 기계화 영농단이라고 있어. 팔팔영농단이라고 했제.”

그 손의 이력은 그렇게 시작된 모양이다. 빚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빚은 점점 늘어났다. 액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가 아니라 1년에 3천만원은 할부금과 이자로 나갔다. 식구 중 한 사람이 교통사고를 냈다. 피해자는 노인이었다. 두 번 수술하고 14일 만에 사망했다. 병원비와 보상금이 당시 돈으로 1700만원 나갔다. 더 벌어야 했다. 거의 죽도록. 전북 남원까지 가서 콤바인으로 수확을 했다. 기계가 부족한 시절이었으니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서 몸으로 돈을 벌었다. 수매를 700~800가마씩 했다. 임대농을 하면 한 마지기에 쌀 한 가마니를 받았다. 수매를 700~800가마니씩 했다면 그가 얼마나 노동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보통 구례의 개별 농가 수매란 것은 100가마니 이하다.

“땅 한 평에 4천~5천원 할 때 사고가 나니까… 연체 이자가 14~17% 정도였단께. 최고로 막 21%까지 오른 적도 있어. 농협 먹여살렸지.”

김종옥 부부가 빚과 씨름한 것은 1989년부터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남들 하는 일은 다 했다. 부부는 쇠꼴을 베어 소를 먹였다. 19마리까지 그렇게 먹였다. 사료비 아낀다고. 통상 감당할 수 있는 노동량이 아니다. 어느 대통령 동생이 외국산 쇠고기와 살아 있는 외국 소를 들여온 시기가 그때였다.

“전경환이 때문에 폭삭 망했어. 250만원씩 하던 소끔(값)이 35만원까지 내려가고.”

“열심히 살았어요.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잤어요.”

아무리 일을 해도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부는 농약을 챙겨서 산으로 갔다.

“시간이 지나니까 컵 바닥이 녹아서 빠져불더라고…. 그라고 일하고 살았제. 징그라워.”

종이컵이 아니라 플라스틱컵이었다.

내 복에… ‘언 감’ 바라보며 언감생심

그의 감농장은 현재 3곳으로 펼쳐져 있다. 메인은 ‘구리실 농장’이다. 1991년에 구입했다. 물론 빚으로. 어떤 늙은 농부가 3천 평만 과수원을 가지고 있으면 ‘요 짓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다고 말했다. ‘요 짓’ 하기 싫었던 김종옥은 농장 터를 구입했다. 그 어른이 권유한 것은 배였다. 김종옥은 감나무를 심었다. 처음에는 그냥 방치했다. 그가 감농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97년부터다. 1996년쯤에 경상도로 견학을 갔다. 감 명장의 농장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가 아내 서순덕에게 말했다.

“갈치 뼈다구 모양으로 감이 났더라.”

평생을 시골에서 살았는데 감이 그렇게 탐스럽고 잘 정리된 상태로 열린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사람의 노력이란다. 그렇게 나무를 키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방치돼 있는 구리실 농장의 나무에 부목을 대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나자 나무가 곧게 펴졌다. 4천 평 땅에서 2천만원의 수입이 났다.

농장의 깊숙한 곳은 멧돼지들의 놀이터다. 김종옥 농사의 키워드는 풀이다. 풀을 뽑지 않고 키우고 순차적으로 베어서 땅으로 되돌린다. 처음 구리실 농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풀이 왜 이렇게 많아요?’라고 묻는다. 2000년 들어 농장이 자리를 잡았다. 연간 4천만원 매출이 소원이었다. 2003년부터 소득이 오르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8천만원이 되고 그라고 최고로 1억2천만원까지 오르더라고.”

빚잔치는 2009년에 끝이 났다. 2009년 구리실 농장을 농지은행에 팔았다. 지금은 지가의 1%를 내고 임대농을 하고 있다. 결국 그는 부부의 피땀이 배어 있는 땅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빚을 청산하는 전략을 택했다. 10년 뒤에 재구매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빚 감옥에서 탈출하는 일이 더 갈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상사마을에 새로이 터를 마련해 집을 지었다. 좋은 조건의 새로운 빚으로.

“그건 얼마 돼도 안 혀. 이전 것에 비하믄.”

“왜 상사마을로 왔어요? 평생 광의면에 살던 사람이.”

“내가 곁방살이를 좀 오래했어.”

2009년에 일단 빚잔치를 끝내고 부부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었다.

2010년 10월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이른 서리가 내렸다. 막 본격적으로 수확을 시작하고 있었다. 첫 서리는 영하 2.5℃ 이하에서 3시간 이상 계속 내렸다. 감은 영하 2.2℃ 이하에서 얼기 시작한다. 일주일 동안 서리는 세 번 내렸다. 첫 서리에 감잎이 죽었다. 열매를 보호할 잎이 사라지고 열매는 맨몸으로 서리와 추위를 맞이했다. 부분적으로 얼었다. 이렇게 된 감은 제품으로 출하할 수 없다. 먹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하자가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 공판장에서 이런 감을 받아주지 않는다. 공판장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농민의 대부분은 직거래 통로가 없다. 결국 팔 수 없다. 빚 터널을 막 벗어나서 이제 ‘돈 한번 만져보자’고 작정한 2010년 가을, 김종옥은 팔 수 있는 감이 없었다. 답답하고 화가 나서 물었다.

“그러면 예상하고 미리 감을 따면 되지 않나요?”

서리가 내린 시점부터 2주일 정도가 제품의 등급을 결정할 ‘결정적인 때’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농부는 자신의 노력이 가능하면 최상의 상태에서 열매로 맺기를 원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2010년은 개화 시기가 늦어지면서 성장도 예년보다 늦었고 수확 시기도 늦어졌다. 그래서 피해는 더 심각했다. 그는 출하일을 11월2일부터 4일 사이로 예정하고 있었다.

“재해보험은?”

“….”

“왜 안 들었소?”

“하루 차이로….”

해마다 들었던 재해보험을 그때는 하필 들지 않았다. 일이 터지려면 인간사는 꼭 이런다. 일한다고 정신이 없어 뒤늦게 서류를 챙겨서 갔을 때는 마감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산이 동생, 내 복이 딱 이 소주잔만큼이다. 넘치기 전에 베풀어야 하는데…, 고생하다가 이제 좀 되겠다 싶으면 이런 일이 생겨불고 또 힘들어지고….”

작년에 애를 많이 낳았으니 올해는…

그래서 지리산닷컴(www.jirisan.com)에서 ‘김종옥의 손을 팝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언 감’ 판매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통상 제품이 되지 않는 감을 10kg들이 1천 상자를 팔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4일이 지났고 우리는 주문을 종료해야 했다. 1400상자.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작은 기적이었다. 그때 김종옥의 손을 잡아준 사람들은 760분이었다. 작은 기적이 이룬 돈은 산술적으로 1400만원이었지만 그 돈은 한 농부가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의지를 가동하게 만든 촉매제였다. 고백하건대, 나는 당시 김종옥·서순덕 부부가 다시 농약병을 들고 산으로 올라갈까봐 겁이 났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2011년 7월, 지리산닷컴 회원들이 모인 오프라인 행사에 김종옥·서순덕 부부가 초대돼서 인사를 했다. 서순덕 형수는 눈물을 훔쳤고, 김종옥 형은 그리 말했다.

“그때 정말 안 좋은 생각도 했는데….”

그로부터 2년이 또 흘렀다. 2013년 가을, 지금 김종옥의 감농장은 순항 중이다. 그러나 농민회 회장님은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다. 풍년은 풍년이라 가격이 내리고 흉년은 수확량이 적어 수입이 준다. 2012년의 태풍이 아니었다면 감 가격은 엄청나게 내렸을 것이다. 몇 년 만에 본 풍년 상황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흉년이 예정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년에 애를 아주 많이 낳았으니까 금년에는 힘들다?”

“그라제. 작년에 나무들이 보대껴논게… 금년에는 모두 다마(알)가 작아. 경남도.”

“서리를 조심하면 현재로서는 큰일은 없겠네요.”

“일단 예보상으로는 이른 추위가 온다네. 흉년은 흉년인디 감은 좋아, 구례는. 작년보다 한 20프로 줄 꺼이그마. 그래도 당도가 높아. 안 익은 감도 시방 먹을 만하단께.”

“아직도 날이 이리 더운데요. 뭔 문제 없을까요?”

“더우면 색이 빨리 나. 글고 요즘은 일교차가 커도 일정하지가 않아서 힘들어. 나무들이 혼란스러운 것이제.”

“그나저나 금년에 부채는 어떠요? 히.”

“빚이야 없을 수는 없제. 그래도 뭐 부담스러운 거는 인자 없어. 봄에 기계 넌 거….”

“아, 그 순 따기 할 때 몰고 댕기던 거? 얼만데요?”

“1850만원.”

“그게? 뭐 그리 비싸!”

“원래 농기계는 비싸. 국산이고 외국산이고. 우리는 필요하고 업자들 먹여살리고.”

그렇구나. 기계가 비싸도 일손이 사라져가는 농부들은 기계를 사야 한다. 그리고 보탠 말씀이 좀 우스웠다.

“시골 살 만해. 도시보다 돈 쓸 일도 없고.”

땅 일구는 사람 위한 나라는 없다

우연이건 필연이건 사랑이 충만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아이는 그 사랑에 비례하는 투자와 노력을 보장받고 종교화된 사회적 관례에 따른 경로를 좇아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또는 힘있는 자리에 위치한다. 그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그들은 무수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그 과정에서 ‘우월한 인력’으로 검증받고 인정받았다. 사회적으로 우월함은 곧 바름이었다. 각론에서, 대화에서 그들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세련됐다. 그렇게 바르고 우수한 인력들이 세상을 엉망으로 경영한다. 내가 아는 한 농부는 1989년부터 2009년까지 빚을 갚는 데 거의 모든 노동력을 투자했다. 그는 ‘우월한 인력’으로 분류될 만한 영역에 단 한 번도 속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지금은 살 만하다고 말했고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만인을 위한 세상은 없다. 아직 내 생각은 그러하다. 그리고 화가 난다.

그는 땅에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라 땅을 일구는 사람이다. 그것이 땅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바름’이다. 세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못난 것들’이 그렇게 자리를 잡고 서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글·사진 권산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해 웹디자인과 인쇄물 디자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부업으로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7년 전 전남 구례군으로 이사했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디자인 일을 한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아버지의 집> <맨땅에 펀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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