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5:07 수정 : 2013.10.10 11:49

1. ‘타자’- 번역의 문제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시인 랭보는 ‘나는 타자(他者)이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중반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역시 20세기 중·후반 프랑스 철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타자’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타자’는 모두 같은 ‘타자’일까? 언어와 사상이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듯이, 어학 곧 해당 언어에 대한 문법적 지식이 없는 해당 사유의 정확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상의 용례에 대한 정확한 문법적 해석, 그리고 그 개념과 문장이 말하는 정확한 사상적 맥락에 대한 이해다.

2. 랭보- ‘나는 타자이다’

랭보가 말한 ‘나는 타자이다’의 원어 문장은 1871년 랭보가 보낸 한 편지에서 발견되는데, 그 정확한 원문은 ‘Je est un autre’이다. Je는 1인칭 단수를 의미하는 대명사 ‘나’로 영어의 I에 해당한다. est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프랑스어 etre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으로 영어의 is에 해당한다. est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1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곧 영어의 am이 아닌 is이다. 1인칭이 되려면 이 문장의 동사는 suis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un은 영어의 a에 해당하는 것으로, 프랑스어의 남성형 단수 부정관사이다. 마지막 단어는 문제의 autre인데,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물론 이 문장에선 단수형 부정관사와 함께 사용돼 의심의 여지 없이 타인(他人) 혹은 타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랭보의 문장은 영어로 글자 그대로 직역돼 ‘I is another’로 번역된다. 이는 프랑스어 autre가 다른 ‘사람’, 곧 타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일반’, 곧 타자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의 another가 반드시 다른 사람, 곧 타인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경우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그래서 프랑스어에는 광의의 다른 것 일반이 아닌 오직 다른 사람들, 곧 타인만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가 따로 있는데, autre와 같은 어원을 지닌 autrui가 그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는 타자이다’라는 번역은 ‘옳은’, 혹은 이 용어가 너무 과하면, ‘충분히 섬세한’ 것이었을까? 우선 이 문장의 동사가 3인칭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때의 주어 ‘나’는 (1인칭 주어 ‘나’가 아닌) 3인칭 주어, 곧 ‘나 일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의 기존 번역 ‘나는 타자이다’는 잘못된 번역은 아니지만 그리 섬세한 번역은 아니다. 잘못된 번역이 아닌 까닭은 이를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해도 나의 3인칭적 성격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섬세한 번역은 못 되는 까닭은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의 가능성이 현대 한국어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그 주어가 지닌 3인칭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이 문장은 차라리 ‘나란 타자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문장의 un autre를 ‘나는 타자이다’처럼 타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일까? 이 단어는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 것일까? 타인, 타자, 다른 사람? 우선 한국어 네이버 검색에 올라온 관련 논문을 보면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이 문장을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하고 있으며, 종종 ‘나는 (또 하나의) 다른 존재이다’ 같은 다른 번역도 눈에 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랭보 편에도 이 문장은 ‘私は他者である’, 곧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번역이 un autre를 (한 명의) 타인 같은 식으로 한정하여 특칭하지 않고, 타자와 같은 일반적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프랑스어 autre가 지닌 두 가지 의미, 곧 다른 것, 타자 일반과 다른 사람, 타인이라는 두 의미를 모두 담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3. 사르트르-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이는 희곡 <닫힌 방>의 대사인데, 원어는 ‘L’enfer, c’est les Autres’이다. 이는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 ‘Hell is other people’로,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지옥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있다’(地獄とは他人である)로 나타난다. 영어 번역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아마 ‘지옥은 다른 사람들(타인들)이다’가 될 것이다. 같은 용어가 우리말에서는 타자로, 일어와 영어에서는 타인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문장은 앞서 다룬 랭보 문장과 달리 다양한 우리말 번역이 있다. 이번에도 네이버를 검색해보면, 이 문장은 ‘지옥은 나의 타인이다’ ‘지옥은 타자이다’ 등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원문을 살펴보면, 앞서 랭보의 경우와 달리, 다른 것(들) 일반, 곧 타자(성)라는 의미보다는 일단 복수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단연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보다는 (일어와 영어의 경우처럼)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는 구체적 지칭으로 옮긴 경우가 더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적어도 ‘지옥 그것은 타자들이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이 문장의 타인들을 지칭하는 단어 les Autres는 물론 단수 l’Autre의 복수로서 사르트르 초·중기 사유의 대표작인 1943년의 <존재와 무>(L’Etre et le Neant)에 등장하는 중심 개념들 중 하나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헤겔의 영향을 받아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즉자존재(卽自存在, l’etre-en-soi)와 대자존재(對自存在, l’etre-pour-soi)로 나눈다. 즉자존재는 가위나 지우개 같은 의식이 없는 존재, 곧 사물이다. 대자존재는 의식을 가진 존재, 곧 인간을 지칭한다(여기서 대자(對自)와 타자(他者)에 나타난 자(自)와 자(者)의 구분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대자존재는 나(나인 주체)와 타자(내가 아닌 주체)로 구분되는데, 이때 타자는 나의 ‘대타존재’(對他存在, l’etre-pour-autrui)로 정의된다. 그런데 대타존재의 원어를 보면 타자 일반이 아닌 타인들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하는 l’autrui가 사용되어 있다. 곧 ‘대타존재’의 ‘타’(他)는 타자 일반이 아니라 타인들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대타존재’로 정의되는 존재는 ‘타자’가 아니라 ‘타인들’로 번역되어야 했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사르트르의 사유에 등장하여 현대 한국어에서 일반적으로 ‘타자’로 번역되는 용어는 타자와 타인(들)이라는 두 경우로 구분해 번역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타 혹은 대타존재의 경우처럼, 즉자(卽自)가 아닌 대자(對自)라는 식으로 그 존재의 ‘의식성’이 강조된 경우, 이 용어는 지금처럼 타자로 번역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의식을 가진 내가 아닌 주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타자(他者)라는 용어는 타인(들)로 번역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4. 현대 프랑스 철학- 동일자와 타자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레비나스 등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타자(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타자(他者, l’Autre, the Other)란 ‘동일자(同一者, le Meme, the Same)가 아닌 것’이다. 동일자란 다시 말해 자기와의 동일성(同一性, Identite, Identity)을 유지하는 것, 곧 전통철학의 자기 원인적(causa sui) 실체(實體, Substance)를 의미하고, 인간의 경우 이는 의식 주체(主體, Sujet, Subject)와 일치한다. 그리고 타자란 바로 동일자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타자를 마치 사르트르에게서의 타인처럼 ‘내가 아닌 주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의 타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을 가진 존재(동일자)가 아닌 것’이다. 곧 타자는 (자기) 동일성을 가진 무엇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어떤 것이다. 이렇게 동일자가 아닌 성질을 일컬어 프랑스 철학에서는 타자성(他者性)이라고 부른다. 타자성이란 한마디로 ‘동일성에 기반한 자기 원인적 실체들’, 곧 의식을 가진 주체, 그의 대상이 되는 객체(대상) 및 양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로서의 인식 모두를 부정하는 그 무엇이다. 이 경우의 타자는 의식적 주체 관념 일반의 부정에 기반하여 서 있으므로 나는 물론 타인들도 타자가 아니다. 타자는 의식 혹은 주체에 의하여 인식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같음(동일성)이 아니라 다름(차이, Difference)과 달라짐(차이화, Differenc/tiation)에 기반한 무엇이다.

결국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레비나스 등이 사용하는 타자 개념은 우선 사르트르의 타자 개념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상 정면으로 대립되는 개념이며, 다음으로 랭보의 ‘나는 타자이다’에 등장하는 타자를 (다른 사물 혹은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이질적인 것, 곧 ‘의식적 주체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의 타자성(他者性)으로 새길 때 그 타자와 같은 개념이다.

5. 번역의 층위- 지식 고고학적 지층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펴본 현대 한국어 ‘타자’의 경우처럼, 원어인 프랑스어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용어들이 왜 우리말에서는 같은 하나의 용어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불필요한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역자의 실력 부족 혹은 부주의를 뛰어넘는 근본적 인식 층위의 수정을 요구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오늘날 대한민국 학문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인식론적 효과, 곧 내가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라 명명한 바 있는 지식 고고학적 지층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무수한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프랑스어 autre와 관련된 철학 용어의 번역은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의 인식과 정확히 어떤 관련이 있으며, 더욱이 오늘날 우리의 인식, 철학적 이해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autre는 당시 선진 유럽 문명을 먼저 접한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에 의해 번역된 용어이다. 당시 메이지 지식인들은 이 용어를 앞에 언급된 철학적 의미에서 크게 다른 것, 곧 타자(他者)와 다른 사람, 곧 타인(他人)의 두 의미로 번역했다. 그 이유는 물론 프랑스어의 autre가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autrui는 ‘타인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autre라는 용어를 오늘날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라 부르는 이들, 곧 라캉·푸코·들뢰즈·데리다·레비나스 등이 뜻하는 그러한 의미의 타자(他者) 혹은 타자성(他者性)이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없었는데, 이는 메이지 지식인들이 이 용어를 번역했던 19세기 중·후반에는 이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태어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autre라는 용어의 현대 한국어 번역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의미의 혼탁에 대한 근본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상의 혼탁을 랭보, 사르트르,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라는 세 경우에 맞추어 하나씩 검토해보자.

우선, 랭보의 ‘나는 타자이다’라는 언명은 ‘나는 다른 사람(타인)이다’라는 의미와 ‘이른바 나란 의식적 주체에 의해 온전히 포괄될 수 없는 어떤 타자성이다’라는 의미 모두를 가진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원래 랭보 문장 자체가 이러한 양의적(兩義的) 효과를 내도록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현대 한국어에서 이러한 양의성은 ‘나란 타자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할 문장이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됨으로써 전자의 의미에 의해 후자가 가려지는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된 한국어 문장은 원문의 뉘앙스가 상당 부분 소거된 ‘나는 타인이다’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되고 말 소지가 다분하다. 혹은 랭보의 문장을 타자(성)에 대한 강조로 읽을 수도 있으나, 이는 오직 타자성의 담론이 철학적으로 부각된 이후, 곧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50~60년대 이후에만 가능한 사후적 해석이다. 랭보의 문장은 타자성이 부각되기 이전의 시기라면 ‘나는 다른 무엇, 다른 어떤 존재이다’라는 문학적 혹은 일반적 의미 안에 포괄적으로 뭉뚱그려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러한 설명이 랭보가 이후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유를 선취(先取)한 거라는 관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사르트르의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는 문장은 이제 쉽게 이해된다. 사르트르는 이른바 ‘사르트르 이후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인정하는 것은 오직 의식적 주체가 아닌 다른 사물 혹은 존재로서의 대타적(對他的) 존재, 곧 타자(他者)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세계에는 의식 없는 즉자존재, 곧 대상 사물, (나와 타인들로 구성되는) 의식적 주체들, 그리고 의식과 존재가 일치하는 완전한 존재로 설정되어 있지만 인간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즉대자적 존재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번역을 주의해서 검토해보자. 왜 사르트르의 문장은 타인이 아닌 타자로 번역된 것일까? 사르트르의 문장이 번역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이 문장이 들어 있는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문>이 발표된 1944년 이후, 혹은 그러한 사유의 배경이 된 <존재와 무>가 발간된 1943년 이후의 일일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타자’는 물론 ‘존재와 무’라는 번역 자체가 당시 한국인이 번역한 용어이기보다는 일본인이 이미 번역한 용어를 우리말 음가(音價)로 읽은 것일 확률이 아주 높다. 일본의 경우에도 사르트르의 이 글들이 번역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언어의 사회성’에 의해 일단 어떤 의미로 고정된 단어 혹은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거나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므로, 당시 일본인들 혹은 한국인들은 분명히 이미 존재하는 당시 철학계의 관용어를 사용해 이 용어들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어 les autres에 해당하는 용어는 메이지 시대에 이미 확정된 하나의 의미, 곧 ‘타인들’(혹은 같은 의미를 가진 ‘타자들’)밖에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히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로 번역되었다(한국어에서는 ‘분명히 단복수를 적시하지 않으면, 의미상의 혼동이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단복수의 구분 없이 단수로 적는다). 그리고 이후 1950~60년대가 되자, 이른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프랑스어 autre에 그때까지 프랑스어에서조차 명백히 분절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의미, 곧 ‘타자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오늘 현대 한국어로 프랑스 철학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800년대 후반 일본어로 번역된 프랑스어 autre에 1960년대 이후 나타난 일군의 새로운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전의 프랑스어 혹은 철학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였으므로, 여전히 메이지 시대의 일본 학자들이 만든 용어로 번역한 오늘날 한국의 철학 용어들이 그 새로운 의미를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타자’ 개념은 이전의 단순한 ‘다른 것’ 혹은 ‘다른 사람’이라는 주체 중심의 철학관을 넘어서는 곳에 그 근본 의미가 있는데, 이 경우 일본과 한국 학자들의 선택은 기존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는 것이었다.

6.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이제까지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랭보와 사르트르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세 경우 모두, 현대 한국어에서 나타나는 의미 해독상의 혼동은 타자(他者)라는 용어가 ‘다른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도 ‘타자’라는 용어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던 메이지 시대의 번역 관행을 원어인 프랑스어에서 해당 용어에 상당한 의미 변화가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무반성적으로 따름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적절한 주의와 변용을 거쳤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 부주의한 사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실로 대한민국 학문의 인식 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지층, 곧 지식 고고학적 지층 차원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할 더 깊은 문제의 표면적 드러남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란 ‘대한민국의 학문 담론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 번역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인식론적 효과’를 말하는 것으로, 단적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 번역어가 없었다면 혹은 이러한 번역어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쳤다면, 생겨나지 않거나 적어도 다른 방식의 효과를 불러일으켰을 담론 현상을 지칭한다.

몇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동일한 영어 truth가 일본어에서 학문과 사상의 영역에서는 진리(眞理)로, 일상 및 예술의 경우에는 진실(眞實)로 번역됨으로써(동일한 구분을 따라 번역된 다른 예로는 비판(批判)·비평(批評) 및 근대(近代)·모더니즘 등을 들 수 있다) 원어에는 없던 특이한 효과를 현대 일본어 및 한국어에서 발생시키게 된다. 이 글에서는 단지 타인과 타자라는 두 용어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상의 검토 작업은 주체(主體), 객체(客體), 주관(主觀), 객관(客觀), 절대(絶對), 상대(相對), 철학(哲學), 이성(理性), 사회(社會), 민족(民族), 과학(科學), 예술(藝術), 진선미(眞善美), 자유(自由), 보편성(普遍性), 합리성(合理性), 근대성(近代性) 등 우리의 일상과 학문을 지배하는 글자 그대로 ‘무수한’ 메이지 개념에 대한 개념사적·계보학적 분석의 한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7. 메이지 효과 분석- 새로운 ‘보편학’을 위한 선결 조건

일본이 개발한 이 근대 한자어를 일본에서는 새로운 한자어, 곧 신한어(新漢語)라고 부른다. 신한어는 청일전쟁 및 일제강점 이후 동아시아어(語)에 대량으로 유입되어, 동아시아 전반(어떤 면에서는 ‘동아시아’ 발명의 주체가 이런 담론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사실상 글자 그대로 ‘노가다’판에서 ‘야구’를 거쳐 ‘학문’에 이르는 전면적 수용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뒤이은 미국 중심의 학문 담론과 함께,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물론 학문적 담론의 근본적 인식 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결정적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한어에 대한 분석·검토 작업은 오늘 우리의 인식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메이지 번역어에 대한 개념사적·계보학적 검토 작업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현대 학문의 인식론적 근본 조건을 규정하는 일본 메이지 시기의 신한어를 우리로부터 타자화 내지는 외화시킴으로써 이 용어들에 대한 더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 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용어들을 새롭게 전유·해석하여 우리의 고유한 학문적·일상적 용어를 창출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우리의 새로운 ‘보편학’을 정립할 것인지를 묻는 작업과 다름없다.

글 허경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석학 필리프 라쿠라바르트의 지도를 받아 ‘미셸 푸코와 근대성’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및 철학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했고, <미셸 푸코: 개념의 고고학> <미셸 푸코와 근대성>(이상 그린비),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등을 출간할 예정이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