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6:53 수정 : 2013.09.02 13:51

1. 편집장께

얼마 전 고마운 제안을 해주셨지요. 과분한 제안임에도 시원스런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 다. 마음을 써줘서 감사하고 그 마음에 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여간해 서 집 밖에 나서지 않는 건 고독에 대한 고상한 취향 때문이 아닙니다. 예전에 알던 사람과 만 날 때 일어나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사소하기 짝이 없는, 순전히 제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설명하기 구구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대 강 짐작은 하실 줄 압니다.

지난주에는 수감생활을 함께한 병역거부자에게 전화했습니다. 이번 원고를 준비하면서 또렷하지 않은 세부사항이 있어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당시 상황과 배경을 설명하다 문득 그와 내게는 감옥의 위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에겐 해 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고 징역살이는 까마득한 시절이었습니다. 출소 이후 그에겐 여러 사건과 더불어 겹겹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마치 엊그제 있은 일처럼 생생히 묘사하던 나 자신 이 터무니없고 멋쩍었습니다. 애초의 목적은 접어두고 제 기억도 아득한 것처럼 얼버무리다 통 화를 마쳤습니다.

이처럼 출소 이후 병역거부자들의 생활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통화한 친구처럼 수 감생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내는 건강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생계를 꾸리는 데 급급 해서 과거를 살필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징역 산 경험을 양분 삼아 왕성하게 활동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한심한 축에 속합니다만, 지금 생활이 세상을 등지려는 자폐적 성 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 믿고 싶습니다.

2. 개인적 치유의 글쓰기

책꽂이에 있던 책을 빼내 뒤적이다 이런 믿음의 실마리처럼 보이는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되던 첫날 밤 저는 메모지 대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지음)의 여백에 ‘이 경험이 일시적 체험이 아니라 깊숙한 흔적으로 남기를 바랍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나·들> 첫 번째 원고에 쓴 것처럼 저는 과거를 세세히 짚어봐야만 현재를 살 수 있는 인간인 것 같습니 다. <나·들> 지면이 소중한 것은 수감 후유증에 매몰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할 기회가 됐기 때 문입니다. 혼자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감옥의 몽상’은 과거의 일에 관한 순수한 기록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과거에 대해 냉정한 관찰자의 입장을 취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시점이 가능했다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런 시점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편도 아닙니다. 저는 ‘객 관성’보다 ‘진실성’을 지향합니다. 제가 과거를 돌아볼 때는 당시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묻어놓 은 기억과 함께 눌러놓은 감정도 살려야 합니다. 혼란스런 경험을 글자로 옮기고, 문장을 배열 하고, 글을 한 편 완성하면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정돈이 일어납니다. 이때 과거는 현재와 교차하면서 새롭게 발견되고 다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자기와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현재의 자기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동안 저는 몸이 고장난 줄로만 알았습니다. 밥을 먹거나 외출을 하는 일상적인 일 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제 몸은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방구석에 웅크려 있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몸이 수감 중에 새겨진 자국과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애쓴 것인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이 차단됐고, 덕분에 감옥에 대해 계속 느끼고 곱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아를 재구 성하면서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갖기 바랐습니다. 일종의 ‘치유’를 개인적 목표로 삼은 것 같습니다.

3. ‘익명의 집단’ 독자와의 마주침

이 지면에 할당된 것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애초 알지 못했던 몇 가지 점에 대 해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점들을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의미심장해서 구상한 원고를 작성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 몇몇 사람의 반응을 대하면서 이 글에 과거 자기와의 만남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른바 매체의 기능과 독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면서 붙들었던 글쓰기는 사실 다른 사람을 향해 말을 건네는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독자에 대한 상이 없었고 막연하게 이해와 공감을 보내줄 사람을 상상한 게 고작이 었습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반응할 독자는 세상에 없습 니다. 글쓰기를 통해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에 연루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즉 저자로서의 숙명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제게 개인적 치유의 방편으로써의 글쓰기와 공적인 지면에서 대중과의 만남은 상충되는 것 처럼 보입니다. 독자라는 익명의 집단이 저를 보호해주는 안전한 공동체일 수 없다는 사실은 저 를 자꾸 글쓰기에서 도망치게 합니다. 원래 <나·들> 9월호 원고 소재로 ‘감옥에서의 원하지 않는 신체접촉’에 대해 다루려고 했습니다. 그 경험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어떤 표현이 필요한지 아 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드러내려면 약간의 결심과 용기가 필요한 경험임은 틀림없습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현민 자존심이 강하고 자존감은 낮은 사람, 거기서 자의식이 생긴다. 자의식이 한낱 자의식에 그치지 않고, 머무른 자리를 통해 내면성을 갖추기 바란다. 그 내면성에 대한 고찰이 사회에 대한 공부가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병역을 거부해 1년4개월간 옥살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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