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7 09:56 수정 : 2013.08.07 18:01

딱 10년의 시간 차다. MBC TV <우리들의 천국>(1990년 10월 26일~1994년 4월 8일)과 <논스톱>(2000년 5월 15일~2005년 10월 21일) 사이에는 10년의 세 월이 존재한다. <우리들의 천국>을 보며 대학생이 되길 꿈꾸던 나는 <논스톱>이 시작하던 해에 대학에 들어갔고, <논스톱> 시리즈가 채 끝나기 전 학교를 그만 뒀다. 돌이켜 보면 1990년과 2000년 사이에는 가히 시대적 격변이라고 불러도 좋을 어떤 것들이 함축적으로 녹아 있다.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만 적어보더라도, 1988년 서울올림픽 이 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호황의 거품이 국제통화기금(IMF)이란 수챗구멍으로 완전히 빠져나가고 신자유주의라는 국제적 조류에 휩쓸려버렸다. 1990년대 중 반 한꺼번에 폭발한 문화적 현상과 사건은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소비로 흡수돼 욕망으로 전도됐다. 아시아 최초라던 평화적 정권 교체 역시 10년여 만에 일본 사회의 자민당 1당 지배 체제마냥 급속한 ‘우경화’의 길을 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1990년대 대학생을 그린 <우리들의 천국>이 ‘대학생들의 꿈과 낭만, 그리고 사랑을 그린 드라마’를 표방했다면, 2000년대 대학생을 묘사한 <논스톱>은 ‘오늘은 누가 어떤 사고로 뒤통수칠지 너무 궁금해지는 에피소드’로 넘어왔다.

차인표는 풍요의 1990년에서 출발한 우리들의 욕망이 어떤 변곡점을 지나 지금 어디에 도착했는지 보여주는 반전의 기표다.SBS 제공
두서없는 얘기를 꺼낸 이유는 차인표 때문이다. 뜬금없게도 차인표가 <우 리들의 천국>과 <논스톱> 사이의 시대적 격변을 설명하는 기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차인표의 필모그래피와 <우리들의 천국>은 전혀 상관없고, 그의 연기가 시트콤과 조응한 것은 최근이다. 하지만 그는 어떤 꿈이었고, 새로 운 세상에 대한 동경이었으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던져 진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의 차인표는 풍요의 1990년에서 출발한 우리들의 욕망 이 어떤 변곡점을 지나 어떻게 전개돼오다가 결국 어디에 도착해 있는지 설명해 주는 ‘터미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차인표는 1990년과 2000년의 거의 중간 무렵인 1994년 여름, 벼락같이 등 장했다. 생경하단 표현도 낯설 정도였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폭발적이었다. 예컨 대 차인표는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몸’을 그 자체로 소비시키는 데 성공한 첫 번째 남성 주체였다. 차인표 이전의 남성들은 잘생긴 얼굴만으로 충분했고, 몸에 대한 소비는 어디까지나 남성 시각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하지만 차인표에 이르러 한국 사회는 비로소 남자의 몸을 근육 두께로 직접 소비하는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차인표의 가슴팍은 그래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만큼 전복적이었다.

그는 유학생이었다. 대한민국 연예계가 아직은 로스앤젤레스(LA)의 지배 를 받기 이전에 그는 홀연히 바다 건너의 향취를 풍겼다. 여전히 충무로 다방의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스타가 발굴되고, PD가 연출자의 뺨을 때려도 기꺼이 위계로 받아들이던 시절에 차인표는 대한민국 연예계의 가장 이질적 존재였다. 말하자면 차인표는 우리 세대가 처음 알게 된 유학생이었고, <우리들의 천국>으 로 겨우 대학을 캠퍼스로 인식한 이들의 동경을 바다 건너로 확장한 안내자였 다. 차인표가 갈라진 가슴팍을 열어젖히고 능수능란하게 할리데이비슨을 몰며 손가락을 흔들어대던 1994년 여름은 이후 꽤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흔든 ‘컬처 쇼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후 차인표의 커리어가 어떻게 전개돼왔는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정점의 순간 차인표는 군대에 입대해 군복을 입고 당대의 히로인이자 파트너이던 배우 신애라와 결혼한 장면은 떠오른다. 그리고 몇 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분노의 양치질’ 짤방도 생각난다. 물론 그가 <왕초>나 <그대 그리고 나> <불꽃> 같은 작품을 한 것도 떠오르지만, 찾아보니 그것도 이미 십수 년 전 작업들이다. 20년 가까이 톱스타의 지위를 누려온 차인표지만 그는 여전히 데뷔작을 대표작으로 갖는, 그리고 그 ‘후광’으로 여전히 존재 규정이 가능한 독특한 이름이다. 그의 독특한 존재 양식은 얼핏 그 또래인 386세대가 사회적으로 호명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386세대는 1980년대 어느 순간의 폭발력으로 명명됐고, 그 ‘후광’으로 여전히 존재가 설명되는 독특한 집단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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