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6 23:58 수정 : 2013.05.07 10:52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예의를 좋아한다면 멋진 사람이 아닌가. -‘학이’편 15장

일러스트 김대중
1. 자공의 재발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른바 ‘진채지액’에서 있었던 사건을 한 가지 더 소개하겠다. 두 제자에 관한 짧은 일화이다.

앞에서 나는 공자 일행이 기아(飢餓)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공의 수완 덕분이라고 말했다. 자공은 이때 “군자는 원래 궁한 사람이다”라는 공자의 말에 얼굴색이 바뀔 정도로 실망했다.(<사기> ‘공자세가’) 그러나 자공은 대단히 영민한 사람이다. 그는 그 의혹의 순간에 오히려 시공을 초월하는 공자 사상의 불멸성을 직감했다. “하나의 도로 모두를 꿰뚫을 뿐이다”(‘위령공’편 2장)는 공자의 단호한 일성을 들을 때, 마치 진리의 한 끝을 본 듯 빛나던 자공의 두 눈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로가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안연이 소년처럼 스승의 품으로 달려가는 동안, 의혹의 미로에서 빠져나온 자공의 뇌리에는 무슨 생각이 피어나고 있었을까? 언제나 웃는 얼굴로 짐꾼들을 독려하던 자공을 볼 때마다 나는 종종 그런 상상의 진리화(眞理花)를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공자 일행이 명아주풀죽을 먹으며 버티고 있을 때 자공이 어디선가 식량을 구해왔는데, 그가 어떻게 쌀을 구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나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하부(李荷夫·짐꾼인 나를 부르는 호칭), 그게 그리 궁금한가?”

“그럼요.”

그러자 자공은 씩 웃으며 이렇게 한마디하곤 그만이었다.

“성읍 문지기가 어수룩해 보이더군.”

자공이 지니고 있던 패물로 식량을 마련해온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자공 자신에게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본래 위나라 사람으로 뒤늦게 공문(孔門)에 들어온 자공은 노나라 출신 선후배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 때 일이다. 자공은 공문에 들어와서 보니 자신의 재주와 학문이 다른 노나라 출신 제자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젊은 혈기의 자공은 여러 문도 앞에서 자랑 삼아 공자에게 말했다.

“저는 남이 나에게 가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저도 남에게 가하지 않으려 합니다!”(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의기양양한 자공의 큰소리에 돌아온 공자의 답변은 냉정했다.

“사(賜)야, 그것은 아직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공야장’편 11장)

공자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자공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일부러 차갑게 대꾸한 것이지만, 스승에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싶던 자공이 이 말씀을 듣고 내심 얼마나 실망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이처럼 공문의 ‘굴러 온 돌’ 자공이 모두가 가장 어려울 때 결정적 한 방을 터뜨리고도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자, 다른 제자들은 물론이고 공자도 자공의 인품을 ‘재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 자공 역시 이 일로 나름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공자와 자공은 다양한 주제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문답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이인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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