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4 15:09 수정 : 2013.04.09 14:08

或問子西 (子)曰 彼哉 彼哉

혹문자서 (자)왈 피재 피재

어떤 사람이 자서의 사람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아, 그 사람, 그 사람…. -‘헌문’편 10장

일러스트 김대중

1. 봉황새야, 봉황새야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난 속에서도 의연히 ‘군자고궁’(君子固窮)의 참뜻을 설파한 공자는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초나라 변경 지대에 이르렀다. 멀리 성문 위로 초나라 깃발이 보이자 제자와 짐꾼들 사이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도(초나라 서울)에 들어서면 초나라 왕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우리 선생님을 맞이할 테니 고생 끝 행복 시작이겠구나!”

모처럼 공자 일행에게 웃음꽃이 만발했다.

당시 초나라는 북방의 진(晋)나라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강국이었다. 공자는 애초 진나라로 가려 했으나 진나라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것이다. 이처럼 공자가 강대국을 상대로 유세하려 한 것은, 자신의 정치사상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소국인 조국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겪은 정치적 좌절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자로는 그때마다 탁자를 치며 울분을 토했다.

“이럴 바엔 중앙 무대로 직행합시다! 거기엔 훨씬 뛰어난 임금과 대부들이 우리를 제대로 평가해줄 겁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말은 안 했지만 자로의 주장에 공감했다. 특히 초나라 소왕(昭王)은 헌신적 군왕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자를 존경하고 있다지 않은가.

공자 일행이 저마다 부푼 기대감에 젖어 발걸음도 가볍게 초나라 국경도시를 지나갈 때였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얼굴은 숯을 칠한 듯 검은 사내가 조용히 공자의 수레에 접근했다. 그는 수레를 따라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거리의 소음 때문에 노랫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았지만, 쇠똥받이 삼태기를 들고 수레 옆을 걷던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공자가 고개를 내밀고 수레를 모는 자공에게 물었다.

“사야,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 어디서 나를 부르는 것 같구나.”

자공이 공자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우리를 따르며 노래를 합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지나간 일은 그렇다쳐도, 다가올 일은 충분히 알 만하지 않은가.

그만두시게! 그만두시게!

지금 정치에 뛰어드는 건 위험천만이라네.

(鳳兮 鳳兮 何德之衰. 往者 不可諫, 來者 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 殆而)

 

노랫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공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 친구는!’

공자가 급히 수레에서 내려서며 외쳤다.

“유야, 사야, 저분을 모셔오너라! 내 그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사내는 공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내가 모습 을 감추자 공자가 길게 탄식했다.

“초나라에 올 때 내심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오늘 그가 떠났으니 다시 는 볼 수 없겠구나.” (이상 ‘미자’편 5장)

“선생님, 아는 사람입니까?”

자로가 물었으나, 공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공자와 함께해온 자로는 짚이 는 데가 있었다. ‘아마 육통(陸通)일 것이다.’

눈치 빠른 자공이 자로에게 물었다.

“아까 그 미친 사람을 아십니까? 선생님더러 쇠덕 운운하다니 몹시 불경합니다.”

육통이라면 초나라 조정과 등진 채 광인 행세를 하며 숨어 산다는 은사(隱士)이다. 언젠 가 선생님이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자가 일곱 있다”(‘헌문’편 40장)고 하셨는데, 그중 한 사 람이 육통 아니던가? 오늘 선생님의 태도를 보니 육통과 아는 사이가 틀림없다. 그런데 그는 굳이 여기까지 와서 왜 야유만 하고 가버린 것일까?

자로는 느닷없는 육통의 출몰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보시게 자공, 이제부터 수레는 내가 몰 테니 그대는 먼저 영도로 들어가 초나라 조정에 무슨 일이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게. 지금은 전쟁 중이니 매사 신중하게 살펴가며 선생님 을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자공을 태운 말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남쪽으로 내달릴 즈음, 운명은 엇갈린 채 달리고 있었다. 초나라 소왕이 전선으로 가는 군대와 함께 비밀리에 영도를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때는 공자가 63살인 서기전 489년, 전선의 백골이 시든 풀에 덮이기 시작하는 늦가 을 무렵이었다.

2. 일모도원(日暮途遠)

초나라 소왕은 오나라가 초나라의 위성국 진(陳)나라를 침공하자 원군을 보내면서 자신 도 최전방 군사도시인 성보로 갔다. 소왕은 왜 왕성을 비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출 전해야 했을까? 소왕에게 오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초나라 망 명객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 영도를 함락시킬 때 초나라 임금이 바로 소왕이었다.

소왕의 아버지 평왕은 역사에 두 가지 오점을 남겼다. 하나는 아들의 비로 맞이한 외국 여 인(진(秦)나라 사람으로 소왕을 낳았다)을 자신이 가로채 후비로 삼은 것이고, 또 하나는 간신 의 참소를 믿고 충신 오사와 그의 아들 오상을 무고하게 죽인 일이다. 이때 오사의 작은아들 오운이 복수를 맹세하며 달아났으니, 그가 희대의 전략가 오자서이다.

합려의 재상이 된 오자서는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와 오나라 군대를 천하무적의 강군으로 조련하여 망명 19년 만인 서기전 506년(공자가 46살 때였다) 초나라로 쳐들어간다. 소왕은 오나라의 침공에 수도를 빼앗기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 고, 그의 아버지 무덤은 오자서가 파헤쳐서 시체에 채찍질을 300번이나 했다. 그 후 오자서는 죽마고우 신포서(申包胥)가 자신의 행위를 비판하자 사과의 뜻을 전하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사기> ‘오자서열 전’)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로써 소왕과 오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되었다.  

3. 자서, 공자를 저지하다

국경도시에서 초광접여(楚狂接輿·육통)를 만난 뒤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공자 일행 앞 에 영도로 먼저 떠난 자공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자로가 놀라 물었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사형, 영도까지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왕이 영도를 떠나 전방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래? 어디로 갔다고 하던가?”

“제가 알아본 바로는 성보라고 합니다.”

“성보라? 차라리 잘 됐다. 성보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이다.”

“그런데 그게….”

자공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도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초나라 재상 자서(子西)가 선생님의 초왕 회견을 취소시켰다 고 합니다.”

“무엇이?” 자로는 땅을 쳤다.

“자서 그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선생님을 음해했단 말인가?”

자서는 소왕의 이복형이자 초나라의 영윤(재상)이다. 애국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 고, 오랜 정치 경륜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명재상 소리를 듣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자기 임금을 공자와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자공이 전한 말은 이러했다.

공자가 초나라로 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공자를 제후의 예로 맞이할 결심을 했다. 자공이 들은 바로는 소왕이 초나라 서사(書社) 땅 700리를 공자에게 봉 해 다스리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서가 이 소식을 듣자 지방 순시까지 중단하고 부랴 부랴 영도로 돌아왔다. 자서는 왕실의 맏형이자 재상으로서 오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 초나 라를 부흥시키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재 등용 기준은 오로지 부 국강병이었다.

‘공구, 자네의 그 인의(仁義)란 우리에게 사치나 다름없네. 미안하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 한 것은 오자서 같은 책사와 손무 같은 병법가라오.’

자서는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어린 동생이자 군주인 소왕을 앉혀놓고 물었다.

“전하께서 사신으로 삼아 다른 제후에게 보낼 만한 사람으로 자공만 한 사람이 있습니 까?”

“없습니다.”

“전하를 보필할 신하로 안회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수감으로 자로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관감으로 재여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서가 일어나 소왕 앞에 엎드려 말한다.

“전하! 우리 초나라 조상께서 나라를 여실 때 국토가 50리에 불과했습니다. 주나라 문왕 과 무왕이 중원을 차지할 때도 그 출발은 사방 100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삼황오제의 치국 방법과 주공과 소공(주나라 창업공신 형제) 의 사업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런 공자에게 700리나 되는 땅을 하사하여 현명한 제자들 과 함께 다스리도록 한다면 인심이 어디로 흐르겠습니까? 장차 전하께서는 조상이 물려 주신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이상 <사기> ‘공자세가’)

소왕은 형의 말을 듣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뜩이나 오나라에 눌려 자기 대에서 사직을 잃을까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 소왕 은 자서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비록 공구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조상이 물려준 종묘사직과 바꿀 수는 없지…. 아, 과인이 어리석어 잠룡(潛龍)에게 날개를 달아줄 뻔했구나….’  

4. 이것이 운명이라면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공자는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

소왕이 비록 나를 존경한다고 하지만 지금 그가 처한 정치 현실은 참으로 엄혹하기만 하 다. 자서의 행위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 이 내가 초나라 왕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공자는 분연히 일어나 수레에 올랐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는 초왕을 만나야 한다. 전쟁에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백성 들의 고달픈 삶을 보라. 나, 공구는 밝은 덕으로 정치를 아름답게 밝혀 고단한 인민들을 더 높 은 선(善)의 세상으로 이끌고자 한다.(<대학> 경문에서 차용) 비록 그곳이 화살이 빗발치는 전 쟁터라 해도 나, 공구는 한순간도 인(仁)을 이루는 길을 포기할 수가 없구나!(‘이인’편 5장)

“가자! 성보로. 유야, 사야, 어서 성보로 가자꾸나!”

공자 일행이 다시 행로를 바꿔 성보로 향하던 중 또 다른 급보가 전해졌다. 한번 엇갈린 운 명은 갈라진 강물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초소왕이 성보 진중에서 급사한 것이다. 군왕으 로서 웅지를 지녔으나, 시운을 만나지 못한 슬픈 운명의 임금이었다. 그의 기개 어린 최후가 초 나라에 전해지자 수많은 백성이 그의 죽음을 애달파했다.

진중에서 소왕의 병이 깊어지자 태사가 “황하의 신이 저주하니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 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소왕이 웃으며 거절했다. 신하들이 나서서 거듭하여 권하자 소왕이 말 했다. “나는 초나라의 군주다. 내가 빌 곳이 있다면 우리 초나라의 강산이지, 중국의 강산(황하 는 초나라가 아니라 주나라에 속한 강이라는 뜻이다)이 아니다. 내가 비록 부덕하나, 남의 나 라 귀신에게까지 죄 지은 바 없다.”

훗날 공자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소왕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초소왕이 대도(大道)를 알았으니 그가 나라를 잃지 않음은 실로 당연하다.(<좌전> 노애 공 6년 )

소왕은 임종에 앞서 자서에게 전위하려 했다. 그러나 자서는 소왕의 어린 아들(혜왕)을 옹 립한 뒤 비밀리에 영도로 철군해 무사히 소왕의 장례를 치렀다. 소왕의 부음을 노상에서 들은 공자는 수레를 멈추고 영도를 향해 예를 갖춘 뒤 탄식했다.

지난번에는 북방의 황하를 건너지 못하더니(진나라로 가려다 못 간 것을 말한다) 이번엔 남방의 평원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이란 말인가….

5. 초광접여가 노래를 부른 뜻은

공자 일행은 채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초나라 국경도시를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수행자들 은 새삼 초광접여의 노래가 떠올랐다.

그 미친 자가 부른 노래의 뜻을 이제야 짐작하겠구나….

초광접여, 즉 육통은 소왕의 등극을 반대한 가문 또는 파벌에 속했거나, 아니면 자서가 집 권할 때 반대 세력에 속한 인물이 아닐까 추정된다. 집권 세력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일급 지식 인이던 육통은 문둥병 환자처럼 꾸며 타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방식으로 일신을 보존했 다. 그것은 자신을 탄압하는 조정에 대한 야유의 한 방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 이생이 훗날 여러 경로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공자는 35~37살 무렵 망명지 제나 라 수도 임치 아니면, 46살 때 주례(周禮)를 배우러 갔다가 노자(老子)를 만나게 된 주나라 도 읍지 낙양에서 육통을 알게 된 것 같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여 혼란스런 천하를 구하 는 도(道)에 관해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고, 때로는 울분에 젖어 통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육통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초광접여라는 은사의 별칭으로 공자 앞에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일만 세상에 전해질 뿐이다.

따라서 육통에 대한 내 추론은 어디까지나 한 구경꾼의 상상에 불과하다. 다만 ‘초광접여 의 노래’만큼은 단순한 은자의 풍자가 아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그가 풍자 이상의 실제적 그 무엇을 공자에게 암시하려 했다고 믿는다.

여보게 중니, 예전의 총기를 잃었는가? 진(晋)나라의 대부 두명독과 순화의 죽음(공자는 이 두 사람의 피살 소식을 듣고 진나라행을 포기했다)을 보고도 모르겠나? 지금 초나라에 가 면 도를 펴기는커녕, 뼛속까지 군국주의자이자 맹목적 왕당파인 자서에게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네. 중니, 그대는 이미 세상과 서로 어긋나 뜻이 맞지 않거늘, 다시 수레를 몰아 무엇 을 구하려 하는가?(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도연명의 <귀거래혜사>에서 차용) 그대는 하 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본령인 교육에 전념하시게. 천하에 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 이 지금 자네가 실천해야 할 천명일세. 내가 아는 한 그 사업은 중니, 자네 같은 봉황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네.  

6. 자서 그 사람, 그 사람

그 후 공자는 위나라에서 5년 여를 더 침잠한 뒤 6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국 노나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공자와 초소왕의 만남을 가로막은 자서는 공교롭게도 공자가 죽은 해(서기전 479년)에 같이 죽었다.

자서의 죽음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원한의 굴레였다. 오자서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초소 왕의 아버지요, 소왕의 아버지를 죽인(시체를 욕보인) 이는 오자서이다. 오자서는 자기가 도운 왕의 아들(부차)에 의해 자살을 강요당한 뒤 시체가 강물에 던져졌고, 소왕은 복수의 일념 속 에 살다 진중에서 죽었다. 아버지(초평왕)에게 여자를 빼앗기고 쫓겨나 죽은 태자(소왕의 이복 형)의 아들은 아버지의 한을 풀려다 이를 반대한 숙부 자서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자 서는 두 번이나 왕위를 마다하고 공자의 인의마저 사양하며 조국의 부흥을 도모하다가 조카의 손에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했음에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 다. 이들에게도 천명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까?

일흔셋 노경의 공자는 봄볕이 짙어갈수록 종종 가뭇없는 상념에 빠질 때가 많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문병을 하던 차에 문득 자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낮고 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서, 그 사람, 그 사람 말인가….

 

陸通避世 子西憂國 夫子懷仁

後聞於曾子 君子不思出其位  

육통은 세상을 피했고, 자서는 나라를 근심했고, 선생님은 인을 추구하셨다.

훗날 증자에게 들었다. 군자는 다만 자기 직분에 헌신하는 자이다. (‘헌문’편 28장)

글 이인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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