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8:49 수정 : 2013.01.10 20:57

<나·들> 구독신청

이광호 <레디앙> 대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한 신사가 이태원에 있는 클럽을 찾았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밴드와 함께 음악을 연주한 무대는 치워졌고, 홀을 오가던 젊은 여인들 역시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때와 다른 풍경은 또 있었다. 미군 병사들과 어울리는 여인들이 이제는 한국 여성들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성들이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클럽이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어떤 보상이 돼주는 것 같았다. 추억이 서린 많은 공간 중에서 남아 있는 건 고맙게도 ‘킹클럽’이 유일했으며, 그로써 충분했다.

 

 가난한 동네의 아이, 악기에 손에 얹다 

 광호씨는 초등학생이던 1965년에 서울 이태원 보광초등학교로 전학했다. 8남매 중에서 결혼한 누나를 제외한 아홉 식구가 고향인 대전을 떠나 이태원 보광동 꼭대기로 옮겨왔다. 광호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해방촌으로 이사해 이태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때 이태원은 외국인들의 거리가 아니었다. 한 집에 예닐곱 가구가 모여 살던 동네에는 이따금 “변소 치워”, “똥 퍼”를 외치는 아저씨들이 다녀갔다. 여러 가족이 함께 사용한 변소에는 아마 나프탈렌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공동수도 앞에는 수백 개의 물지게가 줄을 섰고, 아이들은 자신의 소중한 물통을 지켰다. 광호씨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떡을 팔았으며, 누나들은 품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보탰다. 어린 광호씨는 미군 장교들이 마당에서 잔디 깎는 장면을 보며 도깨비시장 골목을 오르내렸다.

 나중에 가족은 수재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서울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사했지만, 한남동 단국중학교에 다녀야 했던 광호씨는 해방촌에서 하숙을 하며 남산길을 걷곤 했다. DJ 박스가 있는 분식센터에 놀러 다녔고, 양정고등학교에 다닐 땐 가발을 뒤집어쓰고 무교동으로 놀러가곤 했다. ‘석굴암’이란 술집에서는 갑자기 입구가 환하게 밝아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부처의 자애로운 후광이 아니라 카메라와 청소년 선도원들이 들이닥치는 환란의 서막이었다. 함께 놀다가 붙들려 “이런 곳은 처음”이라며 사정하던 여학생은, 알고 보니 “너 또 왔냐?”라는 환영사를 들을 정도로 파출소 단골이었다. 광호씨 역시 하필이면 그날 학교 당직이던 ‘하마’ 선생님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중학교 다닐 적 알게 된 친구들과 죽이 맞은 광호씨는 이런저런 악기를 하나씩 챙겨 들고 만리포에 놀러 가 1주일 동안 지내기도 했다. 함께 노래하고 연주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청소년 ‘날라리’ 밴드는 곧 파라솔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스카우트되었다. 비록 돈 대신 음료수를 품삯으로 받았지만 광호씨와 친구들의 허파에는 슬슬 바람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훗날 유명 연예인이 되는 모씨가 주도하는 이 풋내기 밴드는 ‘리싸이틀’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번에도 광호씨는 형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다.

 

 킹클럽 하우스 밴드가 된 ‘블랙페퍼’ 

 역사적인 ‘리싸이틀’을 계기로 김영기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청량기계공고 밴드부 출신의 기타리스트로서 음악을 제대로 하려는 열의가 있던 그를 찾아가, 5인조 밴드에서 건반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8군 등 이태원 쇼에 밴드를 송출하는 업체에 픽업되어 을지로 계림극장 옆 삼호여관 펜트하우스에서 합숙에 돌입한다. 창문과 벽에는 친환경 방음장치, 즉 쌀가마니를 설치하고 마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생활하면서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밴드의 구성원들은 여관방에서 특식을 개발한다. 밥에 맛소금과 버터, 후춧가루를 넣어 비벼 먹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밴드 ‘블랙페퍼(Black Pepper)’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태원 킹스클럽의 현재 모습.
 이태원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연과 주류를 제공하는 클럽이 여럿 있었다. 주로 미군 장교들이 드나드는 ‘UN클럽’은 점잖은 음악 위주였고, 태평극장 방면에는 사병들이 많이 찾아 센 음악 중심이 된 ‘세븐클럽’을 비롯해 ‘럭키클럽’과 ‘007클럽’ 등이 있었다. 그 중간쯤 성향이 킹클럽이었다. 블랙 페퍼는 당시 꽤 유력한 업자던 ‘백대가리’라는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디션을 통과해 킹클럽의 고정 밴드가 되었다. 이태원에서 유년기를 보낸 소년은 1974년, 이태원 클럽에서 연주하는 악사가 되어 태평극장 옆 한일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수 현인이 즉석에서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장면을 본 적 있지만, 킹클럽은 라이브 밴드가 상주하는 곳이었다. 블랙페퍼의 리더 격인 김영기가 좌변기에 적응하지 못해 여관까지 달려가곤 했지만, 레퍼토리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의 명곡들로 짜였다. 당대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의 ‘Hey Joe’를 비롯해, 제임스 갱의 ‘Walk Away’와 부커 티 앤 더 엠지스의 ‘Time is Tight’, 그리고 칼 더글라스의 ‘Kung Fu Fighting’과 알 그린의 ‘For The Good Times’처럼 당대의 명곡을 망라했다. 영국의 아트록 밴드인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도 포함했다.

 광호씨는 수입 대부분을 건반 악기의 할부를 갚는 데 쓰면서, 하루 네 번 무대에 오르는 강행군 속에서도 밴드의 실력이 나아지고 성장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슬슬 이태원의 분위기에 휩쓸린 다른 멤버들은 밤이면 ‘해밀톤 호텔 나이트’에 가서 놀곤 했다. “불이야!”, “홍수야!” 보컬을 맡고 있던 친구가 이 소리에 놀라 탈출을 감행해 옥상에서 추락할 뻔하고, 바닥을 헤엄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적도 있다. 대마관리법 제정(1976년 4월 7일) 이전의 음악인들 사이에는 대마초가 대수롭잖게 유통되었다. 블랙페퍼의 식단(?)에는 후춧가루뿐만 아니라 대마초도 끼어들었다. 멤버들은 컴컴한 연습실 바닥에 대마초와 술에 취한 채 누워 있는 보컬리스트를 놀려주려고 신문지에 불을 붙이거나 주전자로 물을 부어가며 위급상황이라 소리쳤고, 이런 장난은 꽤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태원 무대의상 판매점
 

 누구에겐 바닥, 누구에겐 출구 

 킹클럽은 스트립쇼가 있는 금요일마다 만원을 이루었다. 광호씨는 댄서들의 춤에 맞춰 연주해주었는데 손님들이 속옷에 돈을 꽂아 넣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한번은 자신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출근해 직원들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보고 서글퍼지기도 했다. 스트립걸로 일하면서 여인숙을 운영하는 누나의 방에는 좋은 오디오와 멋진 침대가 있었는데, 그녀는 광호씨를 동생처럼 대해주었다. 가난한 젊은이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광호씨의 누나들처럼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거나 이태원의 종업원들처럼 살아야 했던 시절이다. 오늘날의 이주노동자들과 이주여성들에게서도 우리를 본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먹고살기 힘들 때 남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나갔고, 여자들은 외국인과 결혼해 이 나라를 떠났다.

 혹자는 ‘이것이 올바른 것이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TV 뉴스 말미의 일기예보에 앞서 전하는 ‘오늘의 증시’ 시황에는 “외국인의 매수·매도세로 인하여…”란 표현이 매번 등장한다. 여기에서 ‘외국인’은 옆집에 사는 톰이나 시카고에서 일하는 샘, 혹은 수염을 기른 제임스나 드레스를 입은 제인이 아니라 초국적 외국계 금융투기 자본을 일컫는다. 매일 뉴스를 통해 외국투기 자본의 움직임을 보고받으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광호씨에게는 ‘미군’이 아니라 친근한 톰이나 샘, 혹은 제임스가 눈앞에 있었다. 어떤 외국인 친구는 광호씨에게 고동색 통굽 신발을 선물했다. 광호씨는 유난히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그 신발을 신고 가발을 쓰고 다녔다. 그는 단지 건반연주자 광호씨의 키가 더 커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블랙페퍼의 역사와 함께한 사람은 이 한량 밴드에 기대를 걸고 열정을 쏟아부은 매니저 ‘도깨비형’이었다. 그의 삶에도 그늘이 있었다. 집에 찾아갔더니 어디에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왔는데, 도깨비형의 동생이 부서진 통기타를 들고 김정호의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작곡을 공부한다는 그에게는 두 다리가 없었다. 그런 동생을 둔 도깨비형은 블랙페퍼에게 중심가로 진출하자며 이스턴 호텔의 오디션을 주선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유명 축구선수였던 이회택이 와 있는 오디션에서 블랙페퍼는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날 도깨비형이 낙담하는 모습을 광호씨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결국 킹클럽에서 밀려난 블랙페퍼는 UN클럽으로 옮겨갔지만 그곳 분위기는 재미가 없었다. 이후에 수원과 영등포 등지를 돌아다녔고, 출연 밴드를 소개하는 사진에 ‘동남아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소개된 ‘리턴 파이브’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물론 광호씨는 그때까지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가발을 쓰고 찾아온 친구들에게 고등학교 퇴학 소식을 전해 들은 광호씨는 블팩페퍼였다가 리턴 파이브가 된 멤버들과 함께 삼류밴드들이 모여드는 무교동까지 가게 되었다. 하마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던 그곳에서 광호씨는 음악 생활을 마감한다. 그의 꿈은 완성되기 전에 과거가 되었다.

이태원 골목 벽화
 

 과거는 현재 속에 살아 있다 

 ‘달리 할 것이 없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한 광호씨는 검정고시연합동문회와 함께 야학에 참여한다. 노동자의 현실과 야학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광호씨는 이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80년 초여름, 당시 군인이던 광호씨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장갑차와 탱크가 버티고 선 강원대 앞에서 보초를 섰다. 공병으로 전방 부대에서 목욕탕을 만들 때는, 그 근처에서 많은 군인이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다. 이런저런 설만 무성할 뿐 역시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광호씨 가슴속에는 답답함과 궁금증이 복수처럼 차올랐고,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사건의 중심에 있되 당사자가 아닌 지켜보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기자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오랜만에 이태원을 찾은 그는 한 라이브클럽에 들어서다가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의 ‘Inside Looking Out’과 대면했다. 블랙페퍼의 레퍼토리였으며, 지금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타임머신이 작동하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술자리에서 김영기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직 음악생활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하지만 통굽 신발을 선물해준 외국인 친구의 소식, 그리고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던 여인숙 누나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도깨비형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의 동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술을 잘 못 마시던 도깨비형이 가끔 흥에 겨워 음악에 몸을 맡기고 막춤을 추던 장면이 떠오를 뿐이다.

 이젠 가발이 필요없는 광호씨가 최근 옛 동네를 찾았다. 변한 것만이 아니라 변하지 않은 것에도 놀라움이 있었다. 낮에는 그토록 찬란한 도심의 사무용 고층빌딩들이 깊은 밤에서 새벽 사이에는 어둠과 침묵에 잠겨 마치 바벨탑처럼 죽은 건물의 무덤이 돼버린다. 하지만 작은 골목에는 저녁마다 삶이 피어오르고 있다. 골목길을 지나는 광호씨 귀에는 작은 주택 안에서 가족들이 즐겁게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태원에는 오래된 사연을 품은 미로 같은 골목이 있다.

글·사진 나도원/음악평론가

이광호 프로필

정말로 기자가 된 광호씨는 진보 언론인의 길을 걷는다. <일요신문 민주일보> 노조위원장을 거쳐 전노협준비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았고, 1988년에는 민주출판언론노동조합협의회 초대 의장을 지냈다. <미디어오늘> 창간에 참여해 편집국장을 지낸 뒤, 민주노총이 발행한 <노동과 세계>의 초대 편집장,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 편집위원장을 맡았다. 현재는 <레디앙>의 대표이사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