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8:28 수정 : 2013.01.08 18:28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경제 때문에 도덕을 희생시킨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여전히 따져보아야 한다. 그 관심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인문학이 단지 유행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어떤 문화적 취향이나 어설픈 지성적 현학성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것이 논술 시험을 더욱 잘 볼 수 있는 발판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스티브 잡스가 강조했던 말을 그대로 좇아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흔적의 징후가 농후하게 발견된다. 그래서 이익과 이윤의 창출이 그 존재 이유라고 말하는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인문학 읽기를 강요한다.

인문학 속에 철학은 언제나 한자리를 차지한다. ‘철학자’라는 필자 이름을 달고 혹은 ‘철학’이라는 명칭을 갖고 신문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글은 내가 보기에는 전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도용한 사기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글들에는 철학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논증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적어도 어떤 이론적·지성적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논증을 통해서 한다. “나는 그가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그는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야.” 이렇게 주장이 있고, 그 주장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논증이다. 철학적 사유나 인문학적 사유가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 요소 중의 하나가 이런 논증의 설득력을 따지는 것이다. 이 논증은 진정한 지도자는 도덕적이라는 전제를, 이유를,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참인가? 다시 그 전제가 참이라는 논거는 무엇인가? 내가 읽은 신문에 실린 철학 글들은 이런 논증적 사유, 우리가 당연하게 간주하는 그 사유의 설득력과 정당성을 추구하는 작업의 흔적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 글의 주장이 문학적 수사와 개인적 체험을 통해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영건 서강대 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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