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09:23 수정 : 2014.07.03 11:11

닷새간 단벌 양복 차림으로 세월호 참사 보도를 했던 손석희는 후배 기자의 실수에 대신 고개를 숙였다. 진심 어린 보도로 JTBC를 공정방송 자리에 올려놓고도 권한을 누리기보다 책임을 짊어지는 손석희의 리더십은 패션에서도 드러난다. 단정한 셔츠에 깔끔한 재킷처럼 꾸밈없는 진정성은 인간 손석희의 매력이다. 한겨레 강재훈
언젠가 영국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는 이런 말을 했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싶다면 한동안 같은 옷을 매일 입어보라고. 그 한동안은 1년일 수도 있고 한 달일 수도 있고 일주일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건 가장 자기다운 옷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하튼 이제 와 생각해보니 웨스트우드의 그 말은 세월호 참사 이후 ‘기레기’들의 대안으로 급부상한 두 언론인 손석희와 이상호의 옷차림을 두고 한 말 같다.

지난 4월25일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날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끈한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를 맞는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의 민주당 당색을 상징하는 듯한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방송사 기자들이 한-미 두 정상의 만남을 취재하느라 청와대와 서울을 분주히 오가는 사이 JTBC의 손석희 앵커는 전남 진도 팽목항에 내려와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4월26일 팽목항 첫 생방송 때부터 4월29일까지 내내 감색 셔츠에 연한 회색 V넥 니트, 그 위에 입은 짙은 회색 재킷 차림이었던 건. 여하튼 첫날에만 니트를 입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닷새 동안 같은 옷차림이었다. 팽목항에 머물며 뉴스를 진행하는 동안 손석희는 오바마의 방한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담아 세월호 참사 보도에 최선을 다했다.

세월호 참사 보도에서 손석희가 보여준 언론인의 노력, 후배 기자의 실수에 대한 리더로서의 빛나는 사과, 진도 팽목항까지 달려가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생생하게 전하려는 진정성 있는 태도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언론 인터뷰를 꺼리던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들도 JTBC에만큼은 마음을 열었다. (한 실종자 아버지는 스스로 JTBC 중계차를 찾아가 인터뷰 영상을 찍었고, 같은 날과 다음 날 두 명의 단원고 학생 사망자 부모는 JTBC에 아이의 휴대전화 속에 담긴 동영상 파일을 건넸다.) 민간 인양업체 ‘언딘마린인더스트리’의 구조 독점 의혹을 알리는 익명·실명의 제보자들도 잇달아 JTBC를 찾았다. 그 덕분에 JTBC <뉴스9>는 동시간에 방영되는 MBC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을 넘어섰다.

물론 개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닷새 동안의 단벌 양복 차림조차 고도의 연출일 수 있다’고. 나도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동의했다. 하지만 손석희라는 인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 ‘그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차가울 정도로 깨끗하고 단호한 이미지, 진지하고 이성적인 태도, 무엇보다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진행 솜씨로 범국민적 신뢰를 얻은 그이지만 실제 인간 손석희는 그 이미지와는 영 딴판인 사람이라고 한다. ‘절제된 형식주의’를 너무나 싫어해서 클래식 공연장에는 가지 않으며, ‘자신이 상소리를 잘한다는 이유로 깨끗하고 정중한 언변으로 무장된 사람을 인간적으로 믿지 않는다’니 놀랍지 않나?

연출이든 아니든, 신뢰를 입은 손석희

그런가 하면 고등학교 시절 독서실 옆자리에서 처음 만나 대학 때까지 우정을 쌓았다는 디자이너 장광효의 증언에 따르면, 손석희는 “대학 시절 4년 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항상 똑같은 패션을 유지할 만큼 검소함이 몸에 밴 친구였”고 “아나운서로 30년간 재직할 당시에도 거의 단벌에 가까웠”단다. 아마 단벌은 아니었을 거다. 내가 아는 한 MBC 아나운서들은 1년에 한두 번 회사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의상구입비를 받는다. 그런데 MBC 보도국을 대표하는 ‘간판 스타’ 손석희 선배는 ‘옷에 돈 쓰는 걸 싫어해서 원래 가지고 있는 그리 많지도 않은 양복으로 버틴다’는 말을 한 후배 아나운서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이상호의 자연스러운 남성미는 손석희의 절제된 정제미와는 또 다르다. 사파리 재킷과 검은 양복바지, 그리고 운동화라는 독특한 조합은 거침없는 기자 정신과 어울린다. 세월호 참사 취재 현장에서 그는 거의 한 달째 같은 옷차림이었다. 그의 모습은 프로의 섹시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겨레 강재훈
나는 그의 진심이 ‘고도의 전략’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할 수 없다. 1988년 MBC 노조 파업 당시 ‘공정방송 쟁취’가 쓰인 리본을 ‘달고 나갈 용기도 없고 달지 않을 용기도 없’어서 양복 안쪽 와이셔츠에 리본을 달고 뉴스를 진행했던 자신을 회고하며 “양복 속에서 삐죽이 보일 듯 말 듯했던 리본은 내가 기회주의자임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다”고 했던 그가 아닌가? 1992년 MBC 파업 때는 파업 주동자로 몰려 20일간 구치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그때 그 사진이 지금껏 회자되지만 그는 그 상황에 대해서도 “한 일도 없는데 무슨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대접받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는 그만큼 진솔한 사람이다. 그 진솔함 안에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객관화해 즉각적으로 반성하고 만회할 줄 아는 힘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한때 손석희의 선택을 의심스러운, 아니 의심스럽다기보다는 다소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위법과 탈법으로 출범한 보수언론 방송사 JTBC 사장 자리라니…. 손석희 개인의 양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과연 삼성과 <중앙일보>의 영향력 아래서 JTBC 사장 한 사람의 힘으로 ‘건강한 시민사회’ 편에 서는 ‘감시견’으로서의 정론 저널리즘을 실천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해냈다. 대단하지 않은가? 종편 출범 때 TV조선, 채널A와 함께 JTBC 개국을 거세게 반대했던 시민단체들이 이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징계’에 맞서 JTBC의 비판적 공정방송을 응원하는 지원사격에 나서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 손석희가 있다. 권한을 누리고 그 권한으로 ‘책임을 묻는 리더’가 아니라 조직원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고 변화시키지 못한 부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는 진정한 리더’로서 손석희.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그가 보수언론으로 낙인찍힌 매체의 방송사에서 이제는 너무 ‘진보 편향’적인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듣는다는 거다. 그 말은 내게 결국 그가 목표로 했던 지점, 진보·보수 프레임을 초월해 ‘사회 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이상적 공정방송의 비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것도 매우 성공적인 모습으로. 이쯤 되면 손석희를 쫓아내준 친정 MBC에 고맙다고 해야 하나?

MBC 사장이나 보도국장들 눈에 손석희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을까? 국민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는 공정방송 자리를 손석희와 JTBC 보도국에 빼앗긴 거나 다름없으니. “요즘 대한민국 컨트롤타워는 다름 아닌 손석희”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MBC의 한 보도국 기자는 “하루빨리 세월호 국면이 끝나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사파리 재킷에 담긴 신념, 이상호

아무리 그래도 MBC 입장에서 손석희가 이상호 기자만큼 밉지는 않을 터. 이상호 기자가 지난 5월8일 팽목항에서 진행한 <고발뉴스>를 두고 “‘MBC가 언론이기를 포기한 노골적인 왜곡 보도로 박근혜 대통령을 옹위하고 있다’는 허위 사실을 적시해 MBC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던 MBC다. 이에 이상호 기자는 자신의 트위터에 “MBC에 훼손될 명예가 무엇이 남아 있는지 성실하게 짚어드리겠다. 고발기자질 20년, 85번째 소송 흔쾌히 받아드린다”고 밝혔고.

소송에는 이력이 난 이가 이상호 기자다.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의 부패를 폭로했고, 전두환의 비자금을 찾아냈으며, 김대중 정부의 첫 번째 비리 게이트를 밝힌 장본인이었으며,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는 2005년 삼성이 정치권 및 검찰에 뇌물을 전달한 사실을 고발하는 이른바 ‘삼성 X파일’을 보도했던 인물이니까.

하지만 이상호의 기자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났던 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내부 조직을 향할 때였다. 그는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 MBC가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씨 인터뷰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트위터에 알려, 한 달 뒤 해고됐다. 해고 사유는 ‘회사의 명예 실추’와 ‘기자로서의 품위 유지 의무 위반’. 그런데 실직한 가장이 기가 죽기는커녕 얼마나 발랄하고 자신감이 넘치는지 해고되자마자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방금 해고됐습니다. 김재철의 종업원이 아닌 국민의 기자가 되겠습니다. 함께 축하해주실래요?” 감히 닿을 수 없을 듯한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돈키호테 같은 그의 기자 정신에 호감을 갖고 있던 나는 단박에 그 트윗을 보고 반하고 말았다. 반한 나머지 ‘MBC의 종업원’이 아니라 ‘국민 기자’가 되겠다는 그를 응원하기 위해 그가 만든 <고발뉴스>의 정기 회원을 신청했고.

<팩트TV>와 함께 4월19일부터 팽목항에 내려와 ‘세월호 침몰 합동 생중계 취재본부’를 차린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는 닷새가 아니라 거의 한 달째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회색 사파리 재킷에 검정색 양복 바지, 그리고 운동화. 셔츠만 스트라이프에서 검정, 푸른색으로 바뀔 뿐이었다. 그런 차림으로 뇌경색을 앓고 있는 그가 거의 목숨을 걸고 현장을 떠나지 않은 채 밀착 취재하고 있다. 거의 한 달째. 솔직히 내 눈엔 이 남자가 참 섹시해 보인다.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기자 정신이 밴 그의 옷차림이 내게는 손석희 앵커의 의상 못지않게 인상적으로 보인다.

손석희 앵커에 비하면 이상호 스타일은 참 거칠다. 생방송 중에 <연합뉴스> 기자를 향해 욕(“이 개××야, 네가 기자야 개××”라고)도 시원시원 잘하고. 손석희 같은 정제미는 없지만 ‘하찮은 것을 하찮은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남성미가 그에겐 있다. 손석희에 비하면 덜 성공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실패했다고 돈키호테의 실패가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스타일이 다르지만 손석희와 이상호는 누가 뭐라든 자기만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돈키호테 같은 언론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과 권력의 접대에 홀라당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감시견 역할을 하는 두 남자가 있어 우리는 든든하다. 공영방송이 무너진 언론 폐허 속에 비치는 두 줄기 빛처럼….

글 김경 패션지 에디터로 17년을 살았다. 2003년부터 <한겨레21>에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를 연재했고, 칼럼니스트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도 평창에서 살며 생애 첫 번째 소설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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