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4:33 수정 : 2014.03.30 14:08

나의 살아 있는 영웅이며 스타일 아이콘인 패티 스미스를 네 번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두 번 인터뷰했고 두 번 공연장에서 만났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거의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앤 드뮐미스터 풍의 재킷에 거침없이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닳아빠진 워커. 그런 그녀가 내게는 마돈나보다 더 찬란해 보였다. 나의 마돈나, 패티 스미스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10년 전이었다. 에이즈로 죽은 전설적인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찍은 패티 스미스의 데뷔 앨범 <호시스>(Horses)의 표지 사진을 봤다. 비쩍 마르고 중성적인 느낌의 젊은 여자가 하얀 셔츠 위에 타이를 길게 늘어뜨리고 검정색 재킷을 프랭크 시나트라 스타일로 어깨에 걸친 채 무심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1920년대 프랑스 파리 사교계에 나타난 남장 여자 콜레트처럼 굉장히 초현실적으로 쿨해 보이면서도 시인 장 주네처럼 어딘지 진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뿐 아니라 아주 사소한, 하찮은 디테일들이 나를 끌어당겼다. 예컨대 잘려나간 소매 끝자락, 재킷 라펠에 붙어 있는 말 모양의 장식핀, 오른쪽 팔목에 차고 있는 실 소재의 팔찌 같은 것들…. 그 하찮은 것들을 발견한 나의 눈이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느껴지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한 ‘푼크툼’(Punctum)과 ‘스투디움’(Studium)을 체험한 거다. 우연히 마주친 사진 한 장에 매혹되는 막연하고 분별없는 흥미, 호감…. 나도 모르게 그걸 발견한 내 취향에 은근히 자부심마저 느끼는….

그 사진 한 장은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본인 입으로 감탄했듯이 ‘기적’이었다. 그 사진 한 장으로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사진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고, 패티 스미스의 음악을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조차 패티 스미스에게 열광하는 현상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특히 패션계 사람들이 그랬다. 새로운 스타일 아이콘으로서 ‘패티 스미스’를 발견한 패션계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화이트 셔츠에 대충 걸친 타이 룩’에 고무되고 영감받아 재해석하는 일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가장 최근의 폴 스미스까지.)

펑크록 가수와 뉴욕의 전위예술가

라틴어로 스투디움은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무엇에 대한 느닷없는 전념, 누군가에 대한 분별없는 호의나 취향 같은 거다. 패티 스미스는 내게 처음 그런 대상이었다. 구경꾼으로서 다소 기쁨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 대해 차차 많은 걸 알아갔다.

패티 스미스는 주로 라펠에 배지나 장식핀을 달고 왼쪽 옷단과 포켓 사이엔 작은 얼룩이 진 싱글 브레스트 블랙 슈트 재킷을 입는다. 머리는 방금 감은 듯 출렁이지만 나풀거리면서 제멋대로 논다. 하지만 스트레이트로 머리카락을 펴거나 컬을 마는 일은 결코 없다. 스타일리스트들이 ‘제품’이라 부르는 것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머리는 출연자 대기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선 블랙으로 빛나고, 무대 조명을 받으면 옅은 브라운으로 휘날리면서 그레이 줄무늬도, 핏빛 후광도 생긴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무대에 서서 침을 뱉는다. “좆까! 보노, 난 네 누이도 연인도 아냐!”(록밴드 U2의 보노가 패티 스미스를 ‘우리의 누이이자 연인’이라고 칭송하자 그녀가 했던 말.)

그녀는 처음부터 달랐다. 미국 뉴욕 언더그라운드 전위예술가의 일원으로 시를 쓰던 패티 스미스가 1975년 처음 낸 앨범 <호시스>는 뉴욕 펑크, 아니 펑크록 전체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역대 최고의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한 놀라운 데뷔작이었다. 펑크적인 폭발성과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성이 절묘하게 결합된 그녀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신선할 만큼 새롭고 깊이가 있다. 그것은 남성이 주도하는 록음악 세계에서 기존 음악적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고, 또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예술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그녀의 음악은 랭보의 시정에 로큰롤을 뒤섞은 것과 같았는데 그건 그녀 자신이 예술 형태의 바운더리를 밀쳐낸 아서 랭보나 잭슨 폴록, 윌리엄 S. 버로 같은 몽상가들에게 영향받았기 때문이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패티 스미스는 그 자신도 로커보다 아방가르드 아티스트에 가깝다고 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한. 오죽하면 프랑스 문화장관이 랭보를 언급하며 뉴욕 출신의 패티 스미스에게 예술문학훈장을 주었을까.

또한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찍은 초기 이미지들이 암시하듯, 패티는 진정한 거리의 시인이 아닌 모습들로 자신을 파는 데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의 스타일을 추적하며 일이나 삶에서 활기를 찾는 일도 즐길 줄 알던 여자였지만, 진정한 거리의 시인으로서 자신의 비전과 신념을 타협하지 않았고 자기만의 독특한 음악을 만들면서 다른 외톨이와 사회 부적합자들을 긍정적으로 자극했다.

찢어진 청바지, 빈티지 재킷, 닳아빠진 워커

그런 그녀가 2009년 여름 ‘지산 록페스티벌’에 왔다.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빗질하지 않은 것 같은 헝클어진 장발로, 군데군데 얼룩이 진 낡은 청바지에 검은색 빈티지 슈트 재킷을 아무렇게나 걸친 차림으로, 고무 슬리퍼를 끌고, 기타를 무기처럼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2시간 뒤에 있을 한국에서의 첫 공연을 앞두고. 느긋한 듯, 초조한 듯, 아니 어쩌면 수줍은 듯 청바지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넣고, 자기 앞의 기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기자라기보다 자신의 추종자에 가까운 서너 명의 인터뷰어들을 앞에 두고.

“미국 같은 경우 부시 행정부는 법을 통해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연막을 쳤죠. 게다가 미디어는 정부의 잘못됨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우리를 철저히 배신하고 실망시켰고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듣지 못하고 진정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으며 진정한 권력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미디어 때문이에요.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 돼요. 우리가 계속 이렇게 암울하고 무기력할 때가 아니라, 우리만의 새로운 반체제 문화를 만들어나감은 물론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시대엔 음악이나 미술, 그리고 미디어 세계에 더 이상 저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1960년대와 같은 반체제 문화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졌다. 오로지 멍 때리며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와 오타쿠같이 세분하게 개별화된 개인의 문화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패티 스미스는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음악으로, 시로 이 타락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1970년대 패티 스미스의 무대는 온몸을 비틀며 스테이지를 장악하는, 결코 리허설될 수 없는, 자유롭게 폭발하는 젊음 그 자체였다. 종종 침을 뱉고, 주먹을 하늘로 찌르며 관객을 광기에 빠지게 했다. “저는 항상 무대 위에서 내가 얼마나 공격적으로 될 수 있는지에 놀라웠어요. 왜냐면 평소의 저는 대부분 매우 차분한 상태거든요. 하지만 내 안의 이 감정들, 세상에 넘쳐나는 불평등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상당한 분노를 일으켰어요. 그래서 나에게 공연은 항상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였어요.” 그렇다면 60살이 넘은 패티 스미스의 무대는 어떨까? 지산 록페스티벌 마지막 날에 있었던 패티 스미스의 공연을 보며 나는 비록 그녀가 나이를 먹었고, 몸이 그전처럼 날렵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렬해졌다고 느꼈다. 관중은 모두 미쳐 날뛰었고 나는 그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뒤에 이어진 오아시스의 공연이 시들하게 느껴질 정도로.

2013년 2월, 최초로 여는 한국에서의 단독 공연을 앞두고 두 번째 만났을 때도 그녀는 거의 같은 차림이었다. 1967년 돈 한 푼 없이 뉴욕에 입성해 브렌타노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면서도 영화배우처럼 다양한 룩을 실험하던 그녀였다. 안나 카리나의 ‘국외자’ 스타일부터 밀짚모자와 푸른색 물방울 무늬의 롱드레스로 연출한 일명 ‘에덴의 동쪽’ 차림, 심지어 줄무늬 셔츠와 빨간 스카프로 연출한 이브 몽탕의 ‘공포의 보수’ 룩까지. 가난한 처지에도 얼마나 스타일 감각이 탁월했던지 뮤지션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전에 패션쇼 무대에 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옷차림에 전혀 무신경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게 흥미로웠다.

‘껍데기는 가라’ 똑같은 차림 자신만의 모습

“(젊은 날) 나의 연인 로버트와 나는 신용카드도 없었고, (웃음) 돈도 없었고, 휴대전화도 없었고, 아이패드도 없었고, 텔레비전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리에게는 몇 권의 책이 있었고, 옷 몇 벌, 그리고 미술용품이 있었죠. 우리는 우리의 작품과 그것에 대한 열정으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정의하려고 했죠. 그런데 현재 우리 문화는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이 가진 물질적인 것들, 가장 최신의 휴대전화, 가장 최신의 맥, 가장 최신의 헤어스타일, 그리고 그들의 생김새로 정의하게끔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다 기업과 사업의 음모 같은 거죠. 그들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있거나, 이렇게 생겨야지만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길 원해요. 하지만 이건 다 헛소리(Bullshit!)에 지나지 않아요.”

헛소리 맞다. 패티 스미스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나는 새 옷 사는 일을 완전히 멈췄다. 젊은 날 없는 돈에 눈부시게 하얀 셔츠에 보들레르식 나비넥타이까지 하고 랭보의 무덤을 방문했던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집에서든 밖에서든, 무대 위에서든 아래서든, 거의 똑같은 차림으로 젊은이들이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그녀를 훨씬 더 사랑한다.

글 김경 패션지 에디터로 17년을 살았다. 2003년부터 <한겨레21>에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를 연재했고, 칼럼니스트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도 평창에서 살며 생애 첫 번째 소설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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