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1:52 수정 : 2014.03.02 14:22

어린 시절의 나는 고아가 되기를 갈망하던 이상한 아이였다. <빨간 머리 앤> 때문이었다. 고아원에서 잘못 보내긴 했지만 여하튼 앤은 마차를 타고 꽃이 만발한 사과나무 터널을 지나 초록 지붕 집에 도착했다. 그다음 특유의 터무니없는 공상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스러운 수다로 무뚝뚝해 보이지만 은근 온정 많은 매슈 아저씨와 마닐라 아주머니를 구워삶았다. 그러곤 기어이 그 집 다락방을 차지했다. 그게 세상 무엇보다 부러웠다. 나는 왜 앤처럼 고아로 태어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까 하고 한탄할 정도로. 그럼 누군가의 양녀가 되어 다락방이나 하녀방이라도 좋으니 내 방을 가질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정우성이 내 얘기를 듣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쟤가 신는 나이키 신발이 신고 싶다, 쟤는 도시락 반찬이 저런데, 쟤는 용돈이 얼만데…, 뭐 이런 욕심이 있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거예요.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건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이 있었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얘기 같았다. 슬프게도 요즘은 아이들이 이상적인 소비자가 되는 것 말고는 아무 야망이 없는 것 같다. 노스페이스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들이 요즘은 ‘캐몽’을 원한다는 뉴스를 보고 정말 좀 슬펐다. 100만원, 혹은 200만원, 심지어 300만원이 넘는 초고가 패딩 브랜드 ‘캐나다구스’와 ‘몽클레르’를 입어야만 비로소 자부심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콤플렉스 없고 스타 의식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 ‘캐나다구스’나 ‘몽클레르’를 입어야만 현실 속 자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우성은 다르다. 그는 추리닝을 입고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순간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다.씨네21 오계옥
세 번째 만났을 때였나? 한번은 내가 당신은 콤플렉스나 패배감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고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없는 것 같아요.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을 빨리 판단하는 것 같아요. 가질 수 없는 것을 내가 가져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면 노력을 하는 편이죠. 하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누구든 기억할 만한 지침 아닌가? 학교가 취향에 맞지 않아서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이지만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만큼이나 머리가 비상한 남자구나 싶었다. 그게 바로 러셀이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말한 핵심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옷을 통해 ‘현실 속의 자기가 아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의복이 마치 배역이라도 되는 듯 멋있는 옷을 입고 무비 스타 흉내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우성은 무비 스타가 되기 전의 자기 모습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누릴 수 없지만 배우가 되기 전, 자유로웠던 시절의 감각을. ‘띠리링’ 하는 지하철 소리, 버스에서 들려오던 <광화문 연가> 같은 유행가 소리, 거리의 만두가게에서 피어오르는 뜨끈한 김이랑 그 앞을 지나가던 동복 코트를 입은 여학생들, 그 설렘. “가끔씩 서문여고 앞 햄버거 가게나 압구정동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던 시절이 너무 그리워 아주 센치(?)해지기도 해요. (…) 지금도 내가 스타라고 생각될 때는 사람들이 스타라고 말해줄 때뿐이에요. 내 주변 사람들은 알 거예요. 내가 얼마나 일상적인 인간인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일상을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는지.”

세 번째 정우성을 만난 것은 그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멜로영화를 들고 나타났을 때다. 건축사의 꿈을 꾸고 있는 목수 철수와 알츠하이머병에 의해 기억이 지워져가는 여자 수진의 사랑 이야기. 그때 우리는 지우고 싶지 않은 기억과 지나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불쑥 청개구리같이 물었다. “하지만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요? 누구에게나?” 그런데 날아오는 그의 답변이 사뭇 철학적이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많은 사람은 자기를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성냥개비 탑이라고 생각해봐요. 지우고 싶은 성냥개비를 밑에서 자꾸만 빼내면 결국 그 탑은 무너지잖아요.” 놀랐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자존감에. 자신의 실수나 패배조차 긍정할 수 있는 그 드높은 자존감 말이다.

‘순빵’ 뜻조차 모를 만큼 순수한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참혹했던 순간일지도 모를 패배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됐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우성을 만났을 때다. 때는 바야흐로 화보 촬영도 인터뷰도 하기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막말로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은 대중의 기대를 한껏 실망시키며 썰렁한 평판 속에서 막을 내렸고, 정우성은 난생처음으로 스캔들 혹은 열애설의 주인공이 되어 호사가들의 도마 위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아테나>와 함께 추락을 맛본 상대 여배우 이지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열애설 이전에 잡혀 있던 약속이라는 이유로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얼마간 어색했고 또 조심스러워했다.

이윽고 와인을 한 잔 마시며 인터뷰하는 자리에 이르러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서로 딴짓을 했다. 두 사람 다 “요새 성생활은 어떠냐?”고 물을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나이(청춘의 치기를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나이, 마흔)가 된 것이다. 핵심으로 곧장 들어가기가 왠지 미안했고 또 부담스러웠다. 그 때문에 나는 지난밤 본 영화 <검우강호>에 대한 감상평을 짤막하게 얘기하는 걸로 말문을 열었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를 보면서 저랑 남편이랑 똑같이 ‘정우성은 역시 순빵이 어울려’ 하며 좋아했다니까요.” 이런 식으로 괜히 너스레를 떨며….

그러자 정우성이 내게 진지하게 되물었다. ‘순빵’이 뭐냐고. ‘순수한, 조금은 얼빵해 보일 정도로 순진한 매력’이라고 답해주며 난 그게 정우성이 본능적으로 지키고 싶어 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가치처럼 느껴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맞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킨다’라는 의미가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약속을 지키고, 사랑을 지키고, 내 사람을 지키고, 내 이상을 지키고…. 근데 자꾸 그런 것들이 퇴색되잖아요. 자꾸 미루고 타협하다보면 우리가 가져야 할 본연의 가치는 뭐가 남는 거죠?”

정우성은 그때 약간 화가 나 있었다. 이지아와의 교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그에게 보이는 반응들에 대해서. “열애설을 인정했더니 그다음에는 주변에서 말이 많더라고요.” 어떤 말들이 나왔을지 뻔하다. ‘왜 하필 이지아냐?’ ‘과거가 미심쩍다’…. 나도 들은 그 민망한 얘기들을 몇몇 사람이 그에게 전했던 모양이다. 우정 어린 충고랍시고.

“그러니까 상대와 나를 한 여자와 남자로 보지 않고, 어떤 레벨을 놓고 차이를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레벨로 판단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상대성을 두고? 가치를 매기면서? 맞는 상대네, 안 맞는 상대네, 얘기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워낙 물질적 가치 평가에 익숙하다보니 그런 것일 텐데, 저도 그걸 알면서도 ‘그럼 순수는 어디 간 거예요? 만날 사랑 타령 하면서, 어?’ 하고 되묻게 돼요. 만날 사랑 노래에 젖으면서, 고전 멜로 드라마, 러브 스토리에만 있는 건가요? 사랑은…. 자각되어 있는 사랑은 다 던져버리는 건데 다들 실제로는 물질적 가치 평가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보면, 있는 사람들끼리 더 그런 것 같고. 서로 ‘쟤 뭐 갖고 있니? 난 뭐 갖고 있지?’ 이러면서….”

‘순빵’ 정우성은 사랑에 대해서도 순진할 정도로 이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한구석 진실 아닌 것이 없다. 심지어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안타깝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이렇게 쉽게 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훨씬 더 많은 연인들이 지상에서 더 근사한 사랑을 했을 텐데….’

정우성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노예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죽도록 고생해서 찍은 영화(예를 들면 <무사>나 <중천>)가 관객의 외면을 받을 때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고, 그래서 기자가 “중심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을 때도 의연하게 “언제 내가 중심이었던 적이 있느냐”고 되묻던 그다. 비교당하는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그의 이름이 세 번째로 뜨는 것에 대한 불편함에 대해서 물으면 “크레디트에 누구 이름이 먼저 오르냐가 대체 왜 중요하냐?”는 말로 자기 중심을 잃지 않았다. 대중의 기대 심리, 언론의 불편한 수작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배포가 있었고 ‘나에게는 내 일이 있을 뿐이고 내 중심이 있을 뿐이다’라는 논리로 매번 유연하게 대처해왔다.

추리닝 입어도 비속함이 없는 남자

하지만 이지아와의 열애가 너무도 황당한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는 어땠을까? 말할 수 없이 참담했을 거다. 하지만 잘 극복했을 거라고 믿는다. 정우성이 했던 이 말대로라면. “때로는 ‘내가 너무 어리석구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냥, 곧이곧대로 사람을 믿었을 때. 그럼 아픔이 오잖아요. 그렇다고 사람을 믿는 걸 포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고. 제가 아직도 누군가가 하는 얘기를 100% 믿거든요. 누군가 나를 속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튼 저는 계속 믿게 돼요.”

그런 그를 두고 순진한 스타일이구나, 할 수 있다. 사실이다. 그는 순진하게도 여전히 ‘순수’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남자고, 동시에 ‘세상엔 휴머니티가 필요하다’고 한결같이 믿어온 영화인이다. 그래서 영화 <감시자들> 같은 악역이 안 어울리기도 하고. 아니, 정확히 안 어울린 건 아니고 그 악인이 선한 주인공 손에 죽을 때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죽일 건 없잖아? 이 멍청이들아~.”

그런 그가 지금은 <신의 한 수>라는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한다. 신의 한 수, 정우성에게 꼭 어울리는 말이다. 어떤 옷을 입든 비속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심지어 추리닝을 입고 퍼질러 앉아서 쌀을 씻는 ‘똥개’를 연기하는 순간에도 멋있어 보이던 남자. 무엇보다 그에겐 본질적으로 아직 순진무구함을 완전히 잃지 않은 성인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순수하고 건강한 내면의 불꽃 같은 게 남아 있다. 그래서 나이 마흔이 됐든, 오십이 됐든, 혹여 더 이상 가망 없어 보이는 칠십이나 팔십이 됐다 하더라도 ‘신의 한 수’가 여전히 그의 심장 속에 내재돼 있을 것 같다. 너무 거창한가? 뭐 그래도 할 수 없다. 난 자칭 ‘정우성 빠’니까.

글 김경 패션지 에디터로 17년을 살았다. 2003년부터 <한겨레21>에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를 연재했고, 칼럼니스트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도 평창에서 살며 생애 첫 번째 소설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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