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9:23 수정 : 2013.11.11 13:42

송씨는 3년 전부터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예순넷의 나이라면 대부분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이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뭐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침 친구가 일자리를 소개해 흔쾌히 수락했다. 그가 일하는 곳은 20년 넘은 오래된 아파트라서 경비실이 1층 엘리베이터 옆에 마련돼 있다. 경비복을 입은 만큼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는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않는다. 경비실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쉬거나 주로 아파트를 순찰한다. ‘도난, 재난, 침략 따위를 염려하여 사고가 나지 않도록 미리 살피고 지키는 일’이라는 ‘경비’의 사전적 정의를 그대로 자신의 일터에서 구현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의 담당 구역은 60가구다. 20평(66m²)형 크기의 아담한 구조라서 신혼부부나 근처에 자식을 둔 독거노인 가구가 많다. 혹여 어르신들에게 급작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잠시도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고 했다. 세상이 하도 험하고 이상스러운 일이 많이 발생하므로 수시로 아파트를 돌며 동정을 살핀다. 또 지팡이를 짚는 어르신들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릴 때 부축해드린다. “비록 내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이 다 내 부모 아니겠느냐”고 송씨는 생각한다.

몸을 쓰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송씨의 이웃 사랑은 곰살맞기도 하다. 택배가 많아진 요즘은 ‘○○호 택배 왔습니다. 경비실에서 찾아가세요. 경비원 백’이라고 써서 매번 엘리베이터 옆에 친히 방을 붙여놓는다. 엄마가 집을 비우며 아이에게 써놓은 쪽지처럼 살가움이 묻어나는 필체다.

매주 화요일, 아파트의 분리수거가 있는 날이면 그는 아예 분리수거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이런 목소리가 잔잔히 들려온다. “사모님, 두고 가시죠. 제가 할게요.” “선생님, 늦으셨을 텐데 어서 출근하세요. 어차피 제가 할 일인걸요.” 출근길에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나오는 직장인이나 기력이 쇠잔해진 어르신에게 다가가 짐을 맞들어준다. 폐지, 피자 상자, 스티로폼, 간장병 등 오물이 잔뜩 묻은 삶의 폐기물이지만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도록 최대한 정중하게 떠안는다.

바람에 독기가 서리는 겨울철이 다가올라치면 송씨는 더욱 바빠진다. 그가 일하는 아파트는 복도식 구조다. 복도에 알루미늄 창틀을 달지 않은 가구는 수도계량기가 동파할 위험이 있다. 11월 즈음부터 못 입는 옷가지와 비닐로 수도계량기를 덮어놓아 동파에 대비해야 하는데, 그는 1층부터 15층까지 돌아보면서 미리 해놓지 않은 집이 있으면 직접 처리해준다. 손수 청테이프와 비닐을 들고 다니며 가가호호 깔끔하고 안전하게 덮어준다. 한두 집도 아니고 우리 집도 아니지만 직접 나서는 이유는 “노인들은 손에 힘이 없어 다부지게 못하고, 맞벌이 부부들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데, 일이 생기기 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눈이 온 날은 계단이며 주차장, 뒷마당 등 아파트 주변에 ‘슥슥’ 하는 빗질 소리가 마치 산사의 목탁 소리처럼 울려퍼진다. 계단에는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어디서 나무판자라도 하나 더 구해 얹어놓는 식이다.

그렇게 3년 세월, 1년이면 절반을 출근하면서 “정을 붙이고 나니 이제 다 가족 같다”며 허허 웃는다. 송씨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지나가는 주민이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웃음으로 답한다. 세 자매가 여기에 살다가 이사를 갔는데 언니는 몇 동에 살고 동생은 어디 살아서 놀러 온 것이라고 소개해주었다. 그의 마음은 60가구 주민들 외에 한 번이라도 살다 간 숱한 이웃들로 북적이는 사랑방이다.

3년의 세월, 가족 같은 백마 탄 아저씨

그의 이웃 사랑은 대형마트 선전 글귀처럼 ‘연중무휴’다. 추석이나 설날에도 예외 없이 1년 내내 주민들의 편이다. 사소하지만 그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편익을 기꺼이 제공한다. 주차장 안쪽의 차가 빠져나갈라치면 어느새 달려와서 겹겹이 주차돼 있는 차를 밀어주고, 장을 보고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들었을 때는 “제가 들어드릴게요”라며 무거운 짐 하나를 빼어 든다. 어둑어둑 밤이 찾아오면 “호루라기가 있나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아파트 주위를 순시한다.

하루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듯싶지만 그가 행하는 것들은 분리수거 돕기, 자동차 밀기, 짐 들어주기 등 지극히 소박해서 티가 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의 호의를 경험한 주민들은 안다. 그가 무작정 많은 일을 하고 무조건 돕기보다 꼭 필요한 일, 꼭 필요한 때에 ‘백마 탄 기사’처럼 어디선가 나타난다는 것을. 그에게 오늘 할 일이 절대 내일로 미뤄지는 경우는 없다. 말 그대로, 주민의 지혜로운 동반자다.

송씨의 일하는 즐거움은 주민들에게 ‘바이러스’처럼 번져간다. 그에게 건강한 파장이 일기 때문인지 주변에 늘 활기가 넘치고 사람이 모이고 웃음이 고인다. 어스름히 해가 질 무렵이면 송씨는 나무 그늘에서 인근 경비원들과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이런저런 사는 얘기도 하지만, 항상 주민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무거운 것을 들어드리고 차도 밀어드리라고 권유합니다.” 그렇게 24시간을 알토란처럼 쓰고 나면 이튿날 새벽 6시다. 집에 가서 한숨 자고 마누라가 챙겨주는 늦은 아침을 먹고는 자전거를 타고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를 한 바퀴 돈다.

송씨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30년째 건재상을 운영하고 있다. 경비를 서지 않는 날이면 건재상에 가서 일을 본다. 몇 년 전부터 큰 인테리어 업체가 생겨서 거래도 없고 벌이가 시원찮아졌기에 명목상 건재상일 뿐, 쉬엄쉬엄 가게를 꾸린다고 했다. 한 가지 일을 하기도 힘든 세상에 웬 ‘투잡’인가 싶지만 그에게 건재상은 쉽게 접을 수 없는 평생의 업이다.

“그동안 어떤 뚜렷한 목표도 없이 무능하게 산 거 같습니다. 안 돌봐줄 사람 돌봐줘서 정작 돌봐줄 사람은 못 돌봐주고….”

보증 잘못 섰다 ‘경매 인생’ 속사정

짧은 한숨을 뱉은 그는 17년 전 삶을 덮치고 간 해일과도 같았던 일을 떠올렸다. 절친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친구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몇십억원 규모의 사업이기에 “만에 하나라도 내 돈은 받을 수 있겠지” 기대하며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일파만파로 불똥이 튀어 송씨의 집까지 팔아야 했다.

“원래 사업을 하다보면 부도도 나고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있지만 보증서에 도장 한 번 찍고 잘못되니까 허탈했죠. 그간 일궈놓은 게 송두리째 날아갔습니다. 법원에서 우리 집이 경매 처리되는 거 보니까 세상 살기 싫어지더라고요.”

송씨는 그 충격으로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3~4년을 시달렸다. 돈은 모으기는 힘들어도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사실, 내가 저지르지 않고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허무와 무기력을 안겨다주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또 어떻게 하루하루 살게 되더라고 그는 말했다. 연신 후렴구처럼 “뭐, 어쩌겠어요”를 반복하는 그는 어떤 고난과 불행도 삭이는 ‘생애화’의 원리를 체득한 듯 보였다. 나중에라도 혹여 친구한테 돈을 받을까 싶어 만나보면 또 측은하여 말도 못 꺼내고 “그냥 침 한번 꼴깍 삼키고 온다”.

송씨가 그 힘겨운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마누라’ 덕분이다. 친구를 만나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그에게 묻는다. “그래 돈은 받아오셨수?” 그러면 송씨가 “집에 쌀도 없길래 쌀 한 말 사주고 왔다”고 답하면 “어이구, 잘했수~”라고 맞장구를 쳐주는 착한 마누라다.

송씨는 1녀2남을 두고 있다. 셋 다 바르게 자랐고 자기 밥벌이를 하고 사는 게 마냥 기특하고 대견스럽다고 한다. 큰딸은 서른일곱 살인데 결혼할 생각은 안 하고 애들 가르치며 학비를 마련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큰아들은 작은 사업체를 운영한다. 둘째아들은 중국어 번역회사를 다닌다고 했다. “둘째아들놈은 성격이 활달한데 어려서도 용돈을 주면 그걸 안 쓰고 모았다가 반장 선거할 때 애들에게 뭘 사 먹이고 뇌물을 주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같은 배에서 나와도 제각각 성향이 다른 게 신기하다며 “애들 어릴 때부터 중학생까지”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꼽았다. 하루가 다르게 생김과 빛깔을 달리하며 커가는 아이들을 보는 기쁨도 컸거니와, 사람들과 어울려 이것저것 일을 도모해 건재상이 번창하니 재미났다.

“아들놈과 소주 한잔이 낙입니다”

“지금도 좋지요. 아들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빠, 소주 한잔하실래요?’ 해서 같이 술 한잔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눕니다. 큰애는 사업을 하니까, 내가 절대 보증은 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죠. 그때 그 일만 아니었으면 그 집을 큰애에게 주는 건데 생각하다가도, 또 땀 흘려 벌어야 자기 것이 되니깐 애들을 위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고요.”

단지 착하게만 살아간다고 다 잘사는 것도 아니고, 아등바등한다고 많은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삶은 자신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고 찾아가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한평생 먼저 살아본 부모로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친구끼리 돈거래는 하지 말 것”이다. 그는 애들에게 용돈 타서 쓰지 않고 짐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며 건강을 지키는 것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다해야겠다고 늘 다짐한다.

“아직 장모님이 살아 계십니다. 아흔이 넘으셨는데 쉬는 날이면 한 번씩 휭하니 가서 뵙고 오지요. 지하철만 타면 가는데 맨몸으로 할 수 있는 효도가 얼마나 쉬워요. 며칠 전에도 갔더니 그 몸을 하셔가지고 회를 떠놓고 3년 된 인삼주를 따주셔서 잘 먹고 왔습니다.”

송씨는 장모님이 앞으로 사셔야 3~4년이고 자신도 10~15년이 남았다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 작정이라고 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의 하나가 공부다. 그는 요즘 건축기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찰떡궁합 아내는 한국방송통신대를 다니고 있다. 송씨는 또 집에서 틈틈이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배우는데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고 들어가긴 해도 나올 줄을 몰라 진땀을 뺀다며 고개를 젓는다. 하루가 또 그렇게 간다.

*송씨는 우리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다. 아저씨를 통해 ‘경비원’도 참 재밌고 좋은 직업이라고 느꼈다. 아니, 직업에 귀천은 없고 삶에 귀천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얼마나 즐겁게 헌신적으로 일하시는지 뵐 때마다 ‘인생수업’이 절로 됐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나보다. 오죽하면 몇 달 전 아저씨가 다른 동으로 발령이 났다가 하루 만에 다시 우리 동으로 복귀하셨겠는가. 우리 동 행동파 할머니 몇 분이 관리소에 가서 항의했다는 얘기를, 늘 나만 보면 교회에 다니라고 말하는 5층 할머니에게 엘리베이터에서 전해들었다.


글 김지영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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