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7:08 수정 : 2013.10.10 18:21


독일 사상가들에 대해 뛰어난 전기를 써낸 뤼디거 자프란스키가 괴테의 성공적인 삶을 보여주는 매혹적인 책을 내놓았다.

자국이 낳은 대문호에 대한 한 나라의 태도를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사람들이 괴테보다 실러를 더 높게 평가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줄까? 괴테는 당시 독일의 애국주의에서 무엇보다 광기를 보았다. 그리고 독일 지역을 황폐화한 나폴레옹이 에르푸르트에서 괴테를 개인적으로 만나 아첨하고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한 일을 두고 사람들은 괴테를 배신자로 여겼지만, 괴테는 이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무관심했던 괴테는 비스마르크 시대의 아버지 같은 인물로는 걸맞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괴테를 칭송하면서도, 그에 대해 냉정하고 거만하고 완고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중적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지는 못했다.

실러보다 낮게 평가하는 독일인들

나(기자)의 청소년 시절과 1990년대 대학생 시절, 거장 괴테에 대해 생각한 바는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받는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나는 이런 말을 수만 번도 더 들었고, 항상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당연한 듯 찬성을 표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삐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옳다면, 언제 그가 온전하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가? 어느 누구도 진선미에 대한 대문호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괴테와 그의 작품 뒤를 캐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동성애가 잠재해 있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등지고 사는 자여 복되리라/ 친구를 가슴에 안고/ 그와 즐기리- 아하!) 그리고 질풍노도 운동의 동지인 렌츠를 몰락시킨 것을 두고 권력 지상의 기회주의라고 괴테를 비난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것을 행하는 것이 무질서를 참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권위에 대항하는 괴테가 얼마나 자주 이 문장을 말하고 다녔을까!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독일 지성사의 거장이다. 그가 쓴 전기들은 항상 생생하고 우아했다. 그가 주제로 삼은 인물들의 지적인 면모를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독일이 낳은 사상가나 문호들에 대한 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현재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연이어 성공했다. 에른스트 테어도어 빌헬름 호프만의 전기부터 쇼펜하우어·하이데거·니체의 전기를 내놓았고, 점점 괴테에 접근해갔다. 그는 실러 전기를 썼고 얼마 전 괴테와 실러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펴냈다.

그리고 드디어 자프란스키는 괴테의 전기를 내놓았다. 이 전기는 괴테를 새롭게 치장해서 보여주지도 않고 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통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괴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으며 그의 가면을 벗기지도, 그의 병적인 증상을 진단하지도 않는다. 이 전기에는 요즘 전기에 전형적으로 쓰이는 표현, 특히 ‘양면적’이라든지 ‘파괴된’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혹은 이것이 서양의 최근 경향일까? 해체의 시기 이후 우리는 성공적인 삶의 단일성에 열광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런 단일성을 괴테만큼 강하고 충실하게 보여주는 이는 없다.

1968년 이후 사람들은 괴테의 정치적인 야망과 혁명에 반대하는 성향과 그의 진화적인 세계관을 비난했다. (괴테는 스스로를 ‘화성론자’(火成論者)의 반대인 ‘수성론자’(水成論者)라고 생각했다. 그는 땅이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바다에서 일어난 점진적 발전으로 천천히 형성됐다고 믿었다.) 짧게 말하면, 괴테를 복고 성향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이러한 면면을 자프란스키는 오히려 괴테의 뛰어난 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점은 괴테의 뛰어난 현실감각에 대한 증거가 된다. 괴테는 실재하는 현상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사상을 결점 없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재와 상관없는 순전한 도덕주의와 전형적인 허풍선이가 돼가는 작가들을 그는 혐오했다.

‘혁명에 반대’ 비판받는 괴테

괴테는 관습의 사슬을 끊었던 진정한 천재이자 신의 은총을 받은 자였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야망과 혁명에 반대하는 성향은 반감을 낳았다.
괴테는 메피스토펠레스같이 명철하게 “행위자는 양심이 없다. 관찰자 외에는 누구도 양심이 없다”라고 썼다. 하지만 괴테는 단순한 관찰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활동’(Tatigkeit)이다. 활동하고 참여하는 것은 그에게도 익숙했던 우울증에 대한 치유제였다. 하지만 그는 불쾌함과 위축됨 정도는 용납했고, 세계에 대한 부정도 끝까지 밀고 간 것은 아니었다. “너의 복 받은 두 눈이여/ 이제까지 너희가 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진정으로 아름다웠노라”라고 <파우스트> 2부의 망루지기는 말했다.

자프란스키의 최신작인 괴테 전기는 독자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자프란스키가 괴테를 바라보는 시각에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게 하는 수작이다. 자프란스키는 괴테가 한동안 침대 옆 탁자에 단도를 놓아두었다고 썼다. 괴테가 자살 충동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그가 자살한 청년에 대한 소설인 <베르테르>를 쓰기 전이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삶에 대한 염증을 글을 통해 성공적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후일 괴테는 이 ‘병’에 대해 이야기했고, 자프란스키가 지적했듯이, 병의 원인은 바깥세계가 아니라 주체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괴테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 우울증은 유행처럼 문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고, 사람들은 햄릿이 가진 감정에 스스로를 던져넣는 일이 흔했다. 괴테는 이것에 반대했다고 자프란스키는 쓰고 있다. 자프란스키는 “우울은 인식기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음울한 철학가와 미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우울은 경멸스럽지만 사실인 삶의 본성에 대해 알려준다. 다른 말로 하면 우울증은 당연한 일이다. 이 생각들에 대해 괴테는 말년에 동의하지 않았다. 삶에 우울증을 용납하지 않았다”라고 썼다.

크세니엔(풍자시)에서 괴테는 “당신은 잘 이겨낼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괴테는 사는 동안 방대한 관심사와 활동과 공직자로서의 생활을 하나로 묶어나갔다. 일찍이 <괴츠 폰 베를리힝겐>에서부터 그는 스타 시인이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국의 각료가 되었고, 소공국의 재정뿐 아니라 광산까지 감독했다. 광산을 맡은 일은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과도 부합했다. 암석, 특히 화강암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인간 신체 구조를 조사했고, 구름에 대해 연구했으며, 뉴턴에 의해 기초가 만들어진 색채론에 반대되는 견해를 견지했다. 그에게는 불쾌한 일이었겠지만 학계는 그 견해에 크게 동조하지 않았다.

‘삶이라는 예술작품’ 세계에 대한 긍정

다양한 일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대단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괴테를 최후의 만능인으로 남게 했다. 그리고 그의 만능인으로서 모습은 세계에 대한 긍정과도 관련 있다. 우리는 괴테의 작품만 보고 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도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는 세상과 폭넓은 관계를 맺었다. 자프란스키가 그의 전기에 ‘삶이라는 예술작품’이라고 부제를 단 것은 옳은 일이었다. 괴테의 성장과 위기와 전환점, 그리고 그가 추구한 아름다움과 지혜를 자프란스키는 우아하고 매혹적이면서도 상세하게 묘사했다. 영국 출신의 독문학자 니컬러스 보일의 아직 완간되지 않은 괴테 전기(현재 3권까지 출판됐다)도 생생하지만, 단 1권으로 괴테를 온전하게 보여주는 자프란스키의 책은 실로 완벽하다.

젊은 괴테는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어떤 모임에서든 중심에 있었고 친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괴테에게 창작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그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독일 서정시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름슈타트까지 오는 도보여행에서 폭풍과 맞서야 했다. 이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떠올랐다. “게니우스와 함께하는 이라면/ 비에도 폭풍우에도/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리/ 게니우스와 함께하는 이라면/ 먹구름이 끼어도/ 우박이 내려도/ 하늘을 나는 종달새처럼/ 그에 대해 노래하리/ 게니우스와 함께하는 이라면.” 그는 자신의 게니우스( 고대 로마에서는 ‘수호신’을 의미. 현재는 ‘창조적 정신’이나 ‘천재’를 뜻함)를 믿을 수 있었다. 현재의 우리도 그가 질풍노도 시기에 썼던 이 시에 쉽게 사로잡힌다. 시를 읽으면 우리도 순식간에 비와 폭풍에 시달리면서도 명랑하게 길을 가게 된다.

괴테는 관습의 사슬을 끊었던 진정한 천재이며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자였다. 1775년 카를 아우구스트 공(公)이 괴테를 바이마르로 불러들였을 때, 괴테는 그 부름을 따랐다. 바이마르에서 새파랗게 젊은 공작과 지낸 첫해에 괴테는 아직 거칠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맡은 직책들 때문에 새로운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생활양식에 대해 그의 청년 시절 친구들은 너무 격식을 중시하고 부자유스럽다고 지적했다. 괴테는 삶의 폭을 넓히고 싶어 했고 새로운 경험을 목말라했다. 또한 그는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무엇보다 ‘시’라는 공상의 세계에서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했다.

대문호를 사랑하게 만드는 전기

괴테는 삶이라는 예술작품을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것뿐 아니라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통해 완성해갔다. 괴테가 바이마르에서 바이마르 정부에 완전히 편입된 것처럼 보이는 9년을 보낸 뒤 ‘건조하고 딱딱한’ 삶에서 오는 해악이 커지자, 밤중에 레몬나무에 꽃향기가 가득한 나라로 도망쳤다. 드디어 이탈리아로 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갈망했던 이 나라가 어떤 행운을(단지 에로틱한 행운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선사했는지, 어떻게 그가 삶의 위기를 재탄생으로 변화시켰는지, 어떻게 그가 대문호로서 새롭게 자신을 정립했는지, 어떻게 남쪽의 햇볕이 북쪽의 우울증을 몰아냈는지, 이러한 모든 것이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삶을 즐기는 괴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독자가 다시 괴테와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글 이요마 만골트 Ijoma Mangold <차이트> 문화부 기자

번역 이상익 위원

ⓒ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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