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2 11:54 수정 : 2013.09.03 16:38

실리콘밸리의 강자들은 이제 ‘테크놀로지 혁명의 아이콘’ 이상의 존재로 군림하려 한다. 지적 토론에 참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힘쓴다. 아마존닷컴 창업자가 <워싱턴포스트>를 매입하는 것 역시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한 예다.

<워싱턴포스트>가 인터넷 기업가 제프 베조스에게 팔린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음에도 시중의 모든 신문은 벌써 ‘역사의 한 휴지기’, ‘시대의 전환기’, ‘기원’ 같은 표현을 쓰면서 마치 역사책 같은 어조로 대서특필하고 나섰다. “베조스는 인터넷에서 나타난 구원자다. 그는 비단 <워싱턴포스트>뿐 아니라 전 신문계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고 이 일에 나선 것이다”면서 모두 환호성을 올렸다.

<워싱턴포스트> 직원들은 ‘그레이엄 일가 <워싱턴포스트> 포스트 매각’이라는 머리기사를 단 신문을 한 부씩 챙겨놓기에 바빴다. 이 날짜 <워싱턴포스트>는 지금까지의 어느 호와는 다른 그야말로 역사적인 한 부가 되었다. 보통 때 같으면 오전 내내 빼곡히 차 있을 회사 건물 내 신문함이 이날은 오전 9시 완전히 비었다.

독일 언론인의 반응도 미국 동료의 놀라움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독일 최대 미디어 그룹 <슈프링거>가 국제적으로 별 지명도 없는 인쇄 매체들을 어쨌거나 10억 유로 가까운 돈을 받고 매각한 것이 불과 2주 전 일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세계적으로 탐사 저널리즘의 상징이던 한 신문사가 겨우 2억5천만 달러(약 1억9천만 유로)라는 말도 안 되는 액수에 팔려버린 것이다. 세계적으로 도서 시장이라는 인쇄 매체 업종의 혁명(또는 파괴)를 상징하는 한 기업에 말이다.

아마존닷컴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를 매입함으로써 미국 워싱턴 보수 정치의 장으로 진입하는 ‘귀빈용 입장권’을 얻었다.
실리콘밸리에 부는 정치 바람

<워싱턴포스트> 인수 발표가 나온 지 나흘째 되는 날에도, 논란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기자와 신문사들은 그들의 특기인 맴맴 돌기만 할 뿐 정작 의문점인 ‘베조스는 이 거래에서 과연 무엇을 얻을까’를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실정이다.

얼마 전부터 실리콘밸리를 주도하는 몇몇 인재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한 가지 변화가 눈에 띈다. 재산이 엄청 많고 성공에 길들여진, 그리고 다른 어떤 경제 지도자보다 유력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점차 정치 무대로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실리콘밸리에서 세상을 변화시킨 이들의 모토는 ‘무엇하러 워싱턴의 일에 관여한단 말인가? 결국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데’였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지도자 격인 몇몇 인물은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이 키를 잡고 있는 디지털 혁명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계산을 통해 표시될 수 있다는 믿음, 곧 ‘전폭적 투명성’이라는 그들의 철학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려면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돌연 정치 사업과 정치 논쟁에 재미를 붙이게 된 실리콘밸리의 인재로는 페이스북 창설자 마크 주커버그와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 야후 최고경영자(CEO) 머리사 메이어,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 등 그야말로 실리콘밸리에서 경제력과 기술을 상징하는 이들이다.

베조스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비록 그의 집은 실리콘밸리에서 1300km 떨어진 곳에 있지만 말이다. 그의 비전은 단순히 기업적 비전이 아니다. 고객에게 모든 상품을 언제 어디서든 제공할 수 있다는 절대 조달 이념, 그에게 그 외 사항은 모두 이 목표에 포함되는 부수 사항이다. 이것은 규제에서 자유로운 상업을 목표로 하는 사실상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베조스는 꾸준히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가고 있다. 범세계적 온라인 상점의 지배자로 군림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 외에도 우주 개발 프로젝트라든지 양자 컴퓨터 연구를 비롯한 수많은 혁신적 기획에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적인 일이 아마존닷컴의 발목을 자주 잡는다. ‘아마존닷컴이 부가세 특혜를 받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문제제기하는가 하면, ‘전자책(E-Book)의 정가제 모델’이 비난을 받으니 말이다.  

껌값에 산 베조스… ‘구세주’라 칭하는 WP

실리콘밸리 투자가 켈빈 하르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운데는 학창 시절에 정치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사람들이 많다”고 귀띔해준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 지난 몇 년 동안 성공사례를 어느 누구보다 많이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첫 번째 정보기술(IT) 회사를 매각한 이래 하르츠는 늘 신생기업에 일찌감치 투자했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은 기업들은 예외없이 전 지구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르츠는 “실리콘밸리에서 정치는 오랫동안 콧대 높은 관료주의적 절차로 간주돼왔다”고 한다. 따라서 정치가보다 테크놀로지 산업의 기업가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게 훨씬 많다는 생각이 과거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두뇌들에게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워싱턴에서 더욱 많이 힘을 행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어떤 메커니즘이 통하는지 별로 아는 바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은 자명하다고 한다.

“테크놀로지 세계에서 끊임없이 기술 혁신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부를 대하는 데도 이제 혁신적 출발점이 새롭게 발견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신문사를 그 신문의 명성까지 곁들여서 매입한 것은 바로 그런 시도 중 하나다. 비록 혁신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대신 비교적 돈이 적게 드는 시도인 건 사실이다.

신문사 인수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다. 2007년만 해도 <시카코트리뷴>과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속한 트리뷴 그룹은 82억 달러라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같은 해 독일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의 매각을 두고 여전히 2억1천만 유로가 호가되었다. 현재 <워싱턴포스트> 가격보다 확연히 큰 액수다.

그럼에도 <워싱터포스트> 쪽에서는 ‘구원자’ 베조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다. 자기들로서는 회사의 아이콘을 팔았다는 중대한 사건이 합병 당사자인 상대방 회사에게는 단순히 첨부 메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베조스가 이 신문을 구원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불과할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 마틴 배런은 지난 주 이 점과 관련해 사내 직원들의 질문을 받고 “나는 베조스의 새롭고 위대한 아이디어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새 소유주와 아직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음에도 “베조스는 우리 신문에서 나름대로 거대한 기업적 기회를 보기 때문에 우리에게 투자하는 것”이라며 무척 낙관적으로 의견을 표명했다.

그는 또 “베조스는 비단 도서 시장뿐 아니라 전체 도매상까지 완전히 뒤집어놓은 사람 아닙니까?” 하면서 “그 변화야말로 혁명이었다”고 단언한다. 그런 기업가가 2억5천만 달러나 되는 돈을 낼 때에는 그저 장난감이나 사려는 건 분명 아니라는 논리다.

슈미트·주커버그… 디지털 엘리트들의 야심

베조스가 장난감을 산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저 수단을 산 것이라면? 디지털 업계에서는 아마존닷컴 창립자 이전에도 이미 디지털 혁명을 단순히 경제적·사회적으로만 추진해가는 데 만족하지 않는 인물이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제 기술 변혁에 이어 지적 변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도 여전히 정치적 논쟁을 담는 재래의 수단, 곧 종이 인쇄물으로 기꺼이 시도된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다.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는 지난봄 구글맨인 제어드 코언과 공저로 <새로운 디지털 시대>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무엇보다 구글 처지에서 본 ‘미래 일정의 정치적 숙고’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페이스북의 2인자 셰릴 샌드버그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여성 정치와 노동 세계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슈미트 작품은 특히 독자에게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디지털업계의 엘리트들에게 왜 필수적인지 분명해진다. 슈미트가 앞으로 몇 해 안에 일어날 것으로 보는 변화는, 비단 경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 문제를 다시 검토하게 할 것이다. 앞으로 기계만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인간과 기계의 공동 성장이 점차 우리의 큰 관심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새롭게 무언가를 형상화하려는 열망이 가세한다.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인재들의 선두에는 주커버그와 메이어가 있다. 이들은 두 달여 전에 정치활동 모임인 ‘FWD.us(Forward US)’를 결성했다. 이 모임이 표방하는 공식 목표는 새로운 이민 정책과 학교 교육 개선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동시에 정치적 영향력이 어떻게 조직돼 가는지 이모저모 시험해보는 실험실이기도 하다. 주커버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 <워싱턴포스트>를 이용했다. 그는 ‘미국은 이민자들이 모여 건설한 나라인데 아주 묘한 이민정책을 갖고 있다’고 썼다. ‘외국 학생들을 미국에서 공부하라고 불러들일 때는 언제고, 그들 중 다수를 다시 미국에서 쫓아내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온라인 아이콘인 그는 사람들의 논쟁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주커버그의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의회는 새 이민법안을 상정했다.

이 경험은 테크닉계의 선구자들에게 이제 포괄적인 공식 일정을 잡을 때가 되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은 이전의 인터넷 경제 세대 때와 근본적으로 방향을 달리하는 변화다. 이전 세대인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등은 대부분 정치 무대를 멀리하는 일관성을 오랫동안 고수해왔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애플사의 한 톱 매니저는 “최고 품질의 상품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 의무지만, 미국이 갖고 있는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자제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

그것이 미국 워싱턴이 되었건 벨기에 브뤼셀이 되었건, 세계 권력의 중심지를 바라보는 대다수 기술 엘리트들의 시선에는 아직 무관심과 경멸이 섞인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파티나 모임에선 걸핏하면 관료들 손에서 정치계가 얼마나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는지 흉본다. ‘무능력’은 이런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낱말이다.

그런데 이 엘리트들이 새로운 야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저 느려 터진 정치 세계도 실리콘밸리의 변화 템포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걸 보여주자는 것이다.

사실 디지털 엘리트들이 비정치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그들은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은 것뿐이다. 행동과는 정반대로 이 엘리트들은 철저하게 관념적이다. 관념적 태도는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테크닉 현장은 오늘날까지 유토피아적 환상이란 특성이 있다. 극도의 개인주의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 페이스북 탄생 초기의 투자자이자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인 피터 틸이 대표적 예다- 이 그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개선할 것인지, 달리 말해 자기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 틸은 슈미트와 공개적으로 토론하기를 즐긴다. 인터넷-‘테크닉 엘리트들’(테키즈·Techis)은 단순히 어떤 사업 모델을 만드는 전문가로 머무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들은 전문가인 동시에 컴퓨터 기술을 인류 발전의 최고 단계, 즉 다른 수단을 사용한 인간 진화의 단계로 보면서 미래에 대한 믿음을 나누는 소수의 집단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깨닫게 되었다. 자기 세계관을 항구적으로 관철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관이 지적 토론과 정치적 토론의 장에서 진리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커버그, 베조스, 슈미트의 기술 전도관은 기술에 애착을 가진 전체주의 성향으로 차츰차츰 변화해간 것이다.

페이스북 사람들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인간을 더욱 가깝게 연결시켜주고, 그렇게 긴밀해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구글에는 과학 기술은 본래 선한 것이며, 인간을 계속 발전시킬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이 세상 모든 문제에는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앱·App)이 존재한다’는 모토를 자유롭게 적용한 듯한 입장이 실리콘밸리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문제 풀 수 있는 앱이 존재한다’

이런 사고방식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제프 베조스 같은 인물이 <워싱턴포스트>를 매입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워싱턴의 보수적 정치의 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귀빈용 입장권’이 되어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실리콘밸리의 주도자들은 되도록 자신의 일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오래전부터 논의하는 공개 토론에 참여해서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는 것을 피해왔다. 예를 들면 이런 주제 말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아직도 개인 생활이란 게 있을까’, ‘환경이 점차 기술화되면 노동시장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기계가 갈수록 권력을 많이 차지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권을 지켜야 할까?’

베조스와 실리콘밸리가 이제 정치에 강력하게 참여하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하게 느낄 것이다. 첫째, 정치적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 둘째, 정치계와 국가는 지금껏 아무런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셋째, 적어도 베조스는 개인으로서 아무 방해를 받는 일 없이 논쟁의 핵심으로 들어갈 것이다.

글 마르쿠스 브라우크 Markus Brauck

얀 프리이트만 Jan Friedmann 토마스 슐츠 Thomas Schulz

번역 장현숙 위원

ⓒ Der Spi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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