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7 10:52 수정 : 2013.08.07 22:56

‘당신도 그 일을 해낼 수 있어요’라고 영화관, 광고, 유튜브 같은 매체에서 매일 새 영웅을 판매한다. 그런데 위대하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거짓 영웅들의 퍼레이드에 분개하는 이가 있다. 차이트가 그의 말을 들어봤다.

나는 이야기를 겁낸다. 1990년대 초반인 것 같다. 그때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느즈막한 오후, 나는 엘베강가에 앉아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에는 친구 한 명과 내가 꿈에 그리던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그 내용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기억 나는 건 그녀가 그다음에 한 말이다. “너희도 이야기를 좀 해봐. 얼른 생각나는 대로 말이야.”

무언가 목이 꽉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친구 녀석이 신나게 단어들을 엮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그중 어느 한 단어도 이해할 수 없다. 곧 녀석의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내 차례가 된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면 나는 입을 다물고 있겠지. 단 한 음절도 내 입을 통해 발음되지 않을 것이다. 내 앞에서 서서히 흐르는 엘베강을 바라본다. 변함없이 회색을 드리운 하늘 아래 길게 누운 황토색, 독일 함부르크의 엘베강.

내 아버지 역시 결코 말씀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마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가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침묵 속에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동시에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주기도 했다. 물론 나보다는 아버지의 고통이 훨씬 컸을 것이다.

내가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에 막 입학했을 때다. 한 여선생님이 내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겨우 두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놓았을까,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곧이어 눈물이 흐르더니 도무지 그치지 않았다. 

예수·싯다르타·길가메시 등 영웅 이야기는 작가는 모두 다르지만 놀랄 만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자료

예수·석가모니·길가메시의 유사한 영웅담

정말이지 나는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이야기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미 실패자다. 비단 나처럼 직업이 기자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현대의 방송광고는 우리에게 상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과 휴대전화, 사람과 자동차, 사람과 맥주의 종류 이런 식으로 말이다. 바이어스도르프(대기업을 예로 들기 위해 이 회사를 임의로 선택해보았다) 같은 화장품 기업은 매번 나름의 이야기를 담은 새로운 크림과 로션의 공식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또 한편으로는 직원들의 이야기, 직원들의 경험을 다룬 뉴스 레터, 영화, 웹 캐스트 같은 것도 제작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큰 의미에서 바이어스도르프 스토리의 일부인 것이다.

선거전략 전문가들은 특정 정치가를 선전할 때 유권자의 머릿속에 그 사람에 관한 어떤 이야기가 생각나도록 하는 데 주력한다. 자신의 전문 지식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냉철한 전문가의 이야기,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페이스북 대표이사인 셰릴 샌드버그는 하버드대학 졸업장이 2개나 있고 자녀도 있는 여성이다. 신여성주의를 논할 때 그녀는 자신의 에피소드를 즐겨 사용한다. 어릴 때 사람들이 자기를 ‘보시’(Bossy)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배욕이 강하다’는 뜻인데, 이 말은 그녀가 만약 사내아이였다면 절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연금생활자들은 자서전 작가에게 대필을 시킨다. 그렇게 해서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의 삶이 하나의 거창한 이야기가 된다. 그뿐인가. 요즘 젊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자기 삶의 연대기를 올리고 있지 않은가. 날이면 날마다 이야기는 길어지고 내용은 확대된다.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어딜 가나 이야기 천지다. 매출을 높이기 위한 이야기, 권력을 얻게 해주는 이야기, 주인공을 인증해주는 이야기 등.

나는 기자다. 따라서 좋은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 안에서 무언가 잔뜩 반항을 하며 곤두선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쾰른에 있는 RTL(독일 오락방송) 기자학교의 세미나실에 다른 사람들(여자 6명, 남자 2명)과 함께 앉아 있다. 우리는 벽에 걸려 있는 평면TV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 화면에는 ‘이야기가 성공을 부른다’는 문장이 대문자로 큼직하게 번쩍이고 있다. 번쩍이는 문장 앞에는 우베 발터가 앉아 있다. 그는 48살인데, 다부진 몸집에 눈에는 생기가 넘친다. 발터는 상담 전문가다. 사실 독일의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그 밖에도 여러 시나리오 작가와 신문사, 광고대행사, 그리고 광고 전문가들까지 모두 그의 고객이다. 그는 자신을 ‘스토리텔링 코치’라고 부른다. 발터는 자신이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비결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이제 곧 전개될 ‘좋은 이야기 찾아내기’ 공동작업을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발터가 말문을 연다. 우리는 성경을 단지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노아며 솔로몬, 모세 개개인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굳이 성경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서 우루크라는 도시를 통치하고 영웅적 업적을 수없이 이뤄낸 바빌론의 왕, 길가메시로부터 우리의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아니면 인도의 아르유나는 어떤가. 원수 집안과 대적해서 영웅적 전투를 벌인 신의 아들 말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전대미문의 대제국을 건설한 아시리아의 군주 사르곤 전설을 우리 작업의 시발점으로 삼아도 된다.

생긴 지 수백 년이 되는 이런 신화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지구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 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구조상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항상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실망하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가 하면, 사태가 다시 악화되는 경험도 하지만, 이 모든 걸 이겨내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성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래 자기 안에서 잠자고 있던 바로 그 존재, 즉 ‘영웅’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궁전을 떠나 아내와 아이를 놔둔 채 6년 동안 전국을 떠돌던 싯다르타(석가모니)는 수많은 선생에게 가르침을 얻으려 했지만 얻지 못하고, 보리수나무 아래서 혼자 수행하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모세도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갓난아기 때 나일강에 버려진 그는 파라오의 딸 손에서 자라지만, 이집트 감독관을 때려 죽인 일로 궁전을 떠나 도피하는 몸이 된다. 숨어 살던 그에게 하느님이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실로 난감한 명을 내려서 결국 그는 유대 민족의 위대한 해방자가 된다.

노아, 모세, 길가메시, 아르유나, 나사렛 예수. 이들을 놓고 보면, 인간에게 특별히 잘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특정한 유형이 있는 게 분명하다. 신화는 이런 형태를 띠고 생겨났고, 그래서 성공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는 곧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핵심적 욕구가 바로 이 이야기들을 통해 충족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동일한 여정

세미나실에 정적이 감돈다. 우베 발터는 우리에게 이 모든 신화에 숨겨진 유전자를 해독해냈다고 믿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이름은 조지프 캠벨이다. 1949년 그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출간되었다. 캠벨은 이 책에서 모든 영웅담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유형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모험으로의 부름을 받음, 모험에 나섬, 선생을 만남, 길동무를 발견함, 첫번째 시험, 결정적인 전투, 귀환, 그간의 고생만큼 오히려 풍요하게 됨.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예수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게 되며, 길가메시는 어쨌든 ‘위대한 행위만이 그에게 불멸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칙적으로, 영웅의 여행은 언제나 동일한 여정이다. 마치 시계나 계절처럼 여행은 이미 정해진 리듬, 늘 한결같은 리듬에 맞춰 진행된다. 그리고 역시 시계나 사계절의 순환과 마찬가지로, 영웅의 여행은 원의 양쪽 끝을 마주 잇는 것으로 끝난다.

캠벨의 모델은 매혹적이리 만치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다. 옛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또는 새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이 모델을 사용할 수 있다. 캠벨의 이 설에 의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발터의 의견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깊게 파고들어가 기억에 오래 남는 스토리 말이다. 그것이 메르세데스 벤츠의 새 모델을 다룬 이야기든,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에 관한 이야기든 다 마찬가지다. 그의 책은 할리우드에서 오늘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다.

발터가 할리우드 얘기를 할 때쯤엔 세미나 참가자인 우리 9명은 놓칠세라 그의 입술만 바라보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방법만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면 당장 그를 우리의 영웅으로 만들어볼 태세로 말이다.

<별들의 전쟁>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하나같이 영웅의 여행 스토리, 즉 그들이 변화해가는 모습과 과정을 묘사하는 이야기다. 실은 우리 모두가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까닭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매혹된다고 발터는 말한다. 자신을 바꾸고, 낡은 습관을 벗어버리고 싶은 소망을, 누구나 가슴속 깊은 곳에 품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영웅이 되기 원한다는 것이 발터의 요지다.

나도 그럴까? 발터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환풍기의 스르럭거리는 음향을 들으면서, 나는 의심해보기 시작한다. 천지 사방에서 영웅들은 “자, 어서 와! 우리의 일원이 되라고!” 하면서 우리를 부른다. 모험을 권하는 이런 외침이 어디 가나 우리를 향해 울려온다. ‘강남스타일’로 전세계에 유명해진 싸이는 그의 몸 흔들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납치된 공주를 찾기 위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그야말로 끝없이 뛰어다니며 갖가지 싸움에서 이겨 낸 인물, 유명한 비디오 게임의 주인공 ‘슈퍼 마리오’가 하려는 말과 별 차이 없을 것이다. 건축자재 시장 홈바흐가 내보내는 광고에는 턱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등장한다. 폭탄처럼 쏟아지는 음악에 맞춰 땀 뻘뻘 흘리며 일하던 그는 이윽고 하나의 세계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낸다. 그러자 광고 마지막 부분에 ‘이제는 당신 차례입니다!’라는 슬로건이 삽입된다.

영웅, 영웅, 영웅….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너 자신을 믿어야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게는 왠지 이 모든 것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 같다.

발터가 한 여론조사 이야기를 꺼낸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는 관심이 최근 들어 새로이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될 거라고 하면서. 독일 <바이어른> 방송이 1953년 ‘당신은 중요한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응답자의 12%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런데 2007년에는 같은 질문에 무려 88%가 ‘예’라고 했다. 참, 이런 맥락에서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역시 1953년 일인데, 당시 일기장에 ‘월요일엔 나, 화요일에도 나, 수요일엔 나, 목요일에도 나’라고 적어놓는 사람은 폴란드 출신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 한 사람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이제 우리에게는 페이스북이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유튜브가 있다. 요즘 우리에게는 캐스팅쇼가 있다. (성악 수업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고 실업자에다 비만이었지만, 2009년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우승함으로써 국제적인 스타가 된 수전 보일을 아직 기억하는지?)

오늘날 누구든지 영웅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영웅이 되기 원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확정된 삶의 모델이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과 관계 있다. 예전에는 집안·가족·신분 같은 것이 있었다. 전통이 있었다. 전통을 가진 사람은 변형이 필요하지 않다. 자기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까. 전통이 오래되면 오래된 만큼, 그 전통도 과거의 어느 시점에선가 새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 쉽게 망각되곤 한다. 또 전통은 농부·수공업자·상인 같은 직업의 정체성을 만들어내, 마치 그것이 완전히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되게 한다. 그러나 거기도 언젠가는 최초의 농부, 최초의 수공업자, 최초의 상인, 다시말해 영웅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우리가 있다. 마를리스, 아리아네, 야니나, 마르티나, 프라우케, 필리프, 카트린, 다니엘,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9명이.

누구나 영웅이 되는 세상… 나도 영웅인가?

영웅 스토리를 이야기한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 이제 알게 되었으니, 이쯤에서 발터는 우리끼리 한번 이야기를 상상해보라고 과제를 준다. 그저 평범하고 건조한 사실 말고 자그마한 일화로 이야기를 구성해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때 특히 어려운 것은 바로 문제점까지 함께 언급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단지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할지라도, 죽음을 함께 이야기에 넣는 게 좋다. 그래야 최상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우리는 각자 새로운 삶 속으로 깊이 잠겨든다. 거리낌없이 자의식이 분명한 태도로, 다른 참가자들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에게 이야기가 금세 떠오르는 게 틀림없다. 그들의 이야기가 매우 사적인 것이어서 듣기 불편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미디어 연구자인 마를리스는 이혼하고 나서 다시 합치기를 거듭하는 부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은 학창 시절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한 이야기를 했다. 결혼식 장소에는 사이 나쁜 부모가 와서 함께 치렀지만, 서로 마주치지 않는 곳을 특별히 물색했다고 한다. 신문에 좋지 않은 기사가 난 어느 기업체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아리아네는 동종 업계 종사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발표를 위해 무대에 올라갔다가 휘파람과 야유를 받은 일을 소재로 삼았다. 역시 홍보 업무에 종사하는 야니나는 출근하기 전 소설을 쓰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도.

나중에 발터는 이 모든 이야기가 영웅의 여행, 즉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전형적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이때 초점은 항상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한 문제, ‘내 인생의 바로 그 여자/남자를 내가 발견하게 되는가?’와 ‘나에게 성취감을 주는 직업을 내가 찾게 되는가?’로 모아진다. 그리고 이때 늘 물어봐야 할 것은 바로 ‘나는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결정을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가, 아니면 밖에서 주어진 것을 그저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가?

이제 내 차례다. 뭔가 진지한 일을 말하려고 무진 애를 써보지만, 왼쪽 입꼬리 주변이 신경질적으로 움찔거리고 가슴은 꼬집히듯 아프다.

나는 내가 겪고 있는 진짜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할아버지에 관해,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아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지 못하는 내 두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내가 입 밖으로 내놓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작전으로, 그럴 목적으로 내가 조립해놓은 가설물일 뿐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이탈리아 로마로 이주할 자신이 없어서 아직도 함부르크에 살고 있다는 게 괴롭다고 허풍을 떤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임대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데, 하면서. “로마가 아니면 죽음을 다오”라는 이탈리아 독립 영웅 가리발디의 독립운동 슬로건도 인용해본다.

영웅 이후의 시대와 팝히어로이즘

나는 쉬지 않고 말을 한다. 그럴수록 내 말이 점점 공허해지는 느낌이 든다. ‘영웅’이라는 개념 역시 갈수록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영웅이란 게 현실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혹시 우리는 이제 영웅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어느 견출어의 발음마냥 ‘영웅 이후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처럼 높은 복지 수준과 낮은 출산율이 맞물리는 사회를 사회학자·정치학자들은 ‘영웅 이후 시대’라는 개념으로 요약한다. 출산율이 높은 사회와 비교해볼 때 영웅 이후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군사전략가 에드워드 러트워크의 말을 빌리면 “한 가정의 정서자본 중 대단히 커다란 부분을 구현한다”. 이 말에 대한 그의 논증은 이렇게 계속된다. “복지에 깊이 젖어 사는 영웅 이후 사회인에게는 손실 가능한 소유가 너무 많아진다. 그 결과, 옛날 영웅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공 일반의 사안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저 개인의 안일만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암으로 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양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해서 최근 영웅으로 기려지는 배우 안젤리나 졸리 역시, 엄밀히 말하면 개인의 구제를 도모한 데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우리는 영웅들로 에워싸인 것이 아니라 ‘서술체’라는 한 이야기 형태에 포위되어 있다. 이 이야기 형태의 특징을 말하기 위해서는 아마 ‘팝히어로이즘’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웅적인 행위 없이 이루어지는 영웅주의로서, 자기 실현을 해내는 인물이 곧 영웅주의의 핵심 개념을 이룬다. 이 영웅주의는 뭔가를 정복하도록, 그리하여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취하도록 가르친다. 영웅이란 언제나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승자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헤밍웨이는 아직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쪽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환기시키는 대신 말이다. 참된 영웅이 된다는 것은 축복받은, 그러나 드물지 않게 희생자라는 형태를 취하는 재능이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역사가 요한 후이징가는 영웅주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정의했다. ‘온 힘과 능력을 다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를 희생시킬지라도, 공공의 과제 실현에 참여할 소명이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개인의 고양된 의식’.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운동 선수를(사실 그들은 타이틀과 트로피를 얻기 위해 경기를 할 뿐인데) 영웅으로 부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우리에게 속이 텅 빈 팝히어로이즘을 떠맡겨버리는 게 참으로 영웅 여행의 본 모습이라면, 이는 결국 개인의 성공을 위한 노력, 흔히 아주 소소한 노력을 거창한 어휘로 합리화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우리 눈앞에 안개를 뿜어대어 정말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게끔 하는 달콤한 독.

우베 발터는 이와는 정반대의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영웅담에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확고히 믿는다. 캠벨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야기’는 퇴근 후 휴식 시간을 마무리짓는 픽션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인 우리는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웅적 여행을 하는 셈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현존을 완전히 살아내려 한다면 우리는 신화가 제시하는 방법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발터에게는 캠벨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인생의 시나리오 역할을 한다.

‘치유’에 관한 캠벨의 가르침은 세미나 참가자인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도 담고 있다. 야유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던 아리아네는 그녀가 편집하는 사내 잡지로 칭찬을 들을 것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여러 장애를 극복해야 했던 야니나는 잉게보르크 바흐만 상을 받을 것이며, 내게는 로마에 거주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세미나 마지막에 그런 기분 좋은 미래의 전망을 나누면서, 라인강변의 한 깔끔한 음식점에서 우리는 그날을 마무리했다. 발터는 그때까지도 힘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는 지치는 법이 없는 사람 같았다. 나는 녹초가 되어서 밧줄에 겨우 매달려 있는 꼴인데.

“입이 무거운 편인 것 같아요, 맞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도대체 내가 뭘 이야기해야 하는 겁니까?”

“누구라도 나름대로 이야깃거리가 있는 법이지요.”

“흠… 내 경우는 좀 달라요. 남들이 틀림없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가 나한테는 전혀 없어요.”

“그럴 리가… 당신의 삶은 어때요? 그거야말로 엄청 재미있을 텐데. 맞아, 그럴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은가요?”

“모르겠어요.”

맥주를 두 잔째 들이켰을 때,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영웅과 그 영웅을 모험으로 끌어내는 부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토론을 계속한다. ‘모험을 감행하라’는 소리가 운명적인 목소리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우연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지, 어떻게 그 둘을 분간할 수 있을까? 때로는 길을 떠나는 대신 집에 머물면서 남들이 시작해놓은 일이나 그저 계속하는 게 옳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대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의미 있는 스토리를 창출하는 듯 보이는 것에선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내게는 영웅이라는 견해가 하필 이즈음에 인기를 얻고 있는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인간은 지금까지, 크게 보아 자립이라는 방향으로 점차 해방되어 왔다. 사회보장과 국가의 지원은 갈수록 폐지되고 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을 향해 이제 “당신이 영웅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해낼 수 있어요!” 하는 것 말고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자존감을 심어주는 데는 긍정적

이 영웅 콘셉트에는 그 외에 냉소적으로 볼 만한 요소도 들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무렴,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면 그렇겠지.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상적인 출발 조건이 주어질 수 있다면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뜻밖의 장소에서 문이 열리기 마련”이라는 조지프 캠벨의 문장을 적극 찬동하면서 인용할 텐데. 하지만 여기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미국이나 개발도상국은 그만두고 우리가 사는 유럽만 해도, 현재 젊은이들은 그 문이 어디 있는지 훤히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의 코앞에서 문이 쾅쾅 닫혀버리는 데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할리우드의 영웅 스토리라는 거, 그렇게 닫힌 문 앞에서 그렇지 않아도 비틀거리는 젊은이들에게 “넌 영웅이 될 수 있었어. 하지만 되지 못했지. 자업자득이라 할 수밖에”라고 몹쓸 말을 해대며 사람을 연신 몰아대는 격이 아닐까. 이것이 발터와 맥주를 마시면서 첫 잔에서 다섯째 잔 사이에 저 영웅 스토리 운운에 대해 내가 제기한 반론이었다.

그런데 여섯 잔째가 되자, 자기도 영웅일 수 있다고 믿는 건 나름대로 장점이 많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중요하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이 시대엔 더욱 그렇다. 자존감이 크다는 건 자기의 요구를 분명히 말하고, 적절한 보수를 요구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다. 자아가 과도하게 작용하는 도박꾼들이 빵빵하게 배를 불리고 있는 한쪽에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만큼의 임금을 받으며 허우적허우적 연명해가는 대신 말이다.

“당신이 결정을 내리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그저 수용하는가?”는 발터가 거듭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제기해보자. 그러면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의 사발 안에 우레가 치면서, 이 나라의 권력과 재정을 거머쥐고 있는 엘리트들이 부들부들 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 다시 말해 ‘일 자체의 압력’ 때문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는 딱지를 붙이고 우리에게 종용되는 것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가? 영웅의 여행이라는 수사법이 단일성의 집합인 이 사회에서 하나의 혁명적인 주체가 탄생하게 할 수 없을까? 바로 지금, 전세계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그것이 이집트 카이로와 터키 이스탄불 시내의 광장이든, 미국 뉴욕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은행 구역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럼, 발터는 이런 질문에 뭐라고 답하는가? 그는 “내가 저 영웅의 여행에 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내가 종이 인간이라고. 꿍하니 생각만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돈 한 푼 없는, 참 가련한 녀석이라고. 분명히 내 화를 돋우려고 일부러 하는 말이다. 발터는 내 안의 영웅을 살살 끌어내려고 온갖 시도를 한다.

나치에 저항한 할아버지, 진정한 영웅

이야기 하나.

자정에 가까워질 무렵에야 우리는 레스토랑을 나선다. 발터는 숙소로 가고, 나는 호엔촐레른 다리 쪽으로 걸어간다. 다리를 건너 같은 방향으로 계속 가면 쾰른의 돔에 이르게 된다. 돔은 늘 그렇듯, 여전히 보수 장비로 둘러싸여 있다. 끝없이 공사 중인 곳. 나는 살면서 가끔 생각했던 일을 떠올린다. 낭만주의자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은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건 아무 시스템도 갖지 않은 것과 똑같이 불리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두 가지를 서로 연결시켜야 한다. 또한 나는 “우리는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간직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야기한다”는 니체의 수수께끼 같은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베 발터를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 내 이야기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긴 그건 내 이야기도 아니지만.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선생님이 시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가 뮌헨대학 건물 안뜰에서 반히틀러 전단이 담긴 그들의 마지막 꾸러미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장면까지 이야기했을 때다. 거기서부터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 전단을 발견한 학교 수위가 건물의 문이란 문을 모조리 닫아 걸고는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에게 전화해 두 남매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한스가 수감 중에 어떤 종이 한 장을 잘게 찢어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없애버리려고 했다. 얼마 후 게슈타포는 그 찢긴 조각을 전부 모아서 다시 이어 붙였다. 그러자 손으로 쓴 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치와 나치가 자행한 잔혹 행위를 고발하기 위해 할아버지 크리스토프 프롭스트가 작성한 전단 초안이, 그렇게 게슈타포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며칠 후, 할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체포되어 뮌헨으로 이송되었고, 한스-소피 남매와 함께 즉석재판에 회부되었다. 할아버지는 가족 때문에 석방되고자 투쟁했고, 소피와 한스도 할아버지의 죄목이 덜하도록 온힘을 다해 도왔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나치 국가 최고 정치 판사였던 롤란트 프라이슬러에 의해, 할아버지는 모의재판에서 숄 남매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정식 언도는 모의재판 후 바로 집행되었다. 할아버지는 아내와 세 자녀에게 작별인사조차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게 남긴 짧은 메모에 할아버지는 ‘내가 어려움 없이 기쁘게 죽었다고 전해달라’고 썼다.

나에게는 언제나 오로지 이 이야기, 이 참된 이야기 하나만 존재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이야기, 무엇보다 나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게 이와 비교할 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웅’이란 단어를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사용하는 걸 내가 싫어하는 이유, 독자는 이제 좀 이해가 될 것이다. 캠벨식 수사법을 빌려 말하면 각각 자기 나름의 ‘영웅 여행길’에 나선 우리 모두를 영웅으로 볼 수 없다. ‘직장생활하는 영웅’이라든지 ‘가정을 가진 영웅”으로는 속수무책이 된다. 영웅적이라는 건 우리가 사적인 영역을- 더불어 당연히 가정이라는 관련 고리도- 초월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이런 영웅 유형이 영웅 이후 시대인 오늘날엔 진부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이가 없기 바란다. 설사 의회민주주의가 자신의 평안에 좀더 신경 쓰고 싶다는 개개인의 소원을 정당화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일단 마음먹은 곳에 투표할 수 있으니까- 보일지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이미 가장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바란다. 이 영웅 이후 사회 내부에도 구조적 불의는 앞으로 오래 존재할 것이니 말이다. 그 불의는 관료주의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책임지고 행동해야 막을 수 있는 불의다. 그러려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마음의 태만함을 이겨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영웅주의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유효할 것이다. 영웅주의는 언제나, 누군가가 자기 일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자신과 직접 관계없는 공적인 일에 헌신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이를테면 차별받는 사람, 쫓기는 사람, 억압받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 살해되는 사람들을 돕는 일처럼 말이다.

우리는 모두 영웅이 아닌 사람이다

여기서, 영웅 후 시대적 사고방식이 내게 반론을 제기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보다 규모를 한 단계만 축소해도 영웅주의에는 별 탈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이다. 너무 큰 척도를 갖다대면 영웅을 오히려 ‘결과 없는 숭배’라는 영역으로 격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그보다 차라리, 영웅도 실은 그들이 살던 시대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다를 바 없었다는 걸 깨닫도록.

무척 합리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진정한 영웅을 그가 서 있는 대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언제나,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앞으로 계속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반면, 영웅이 그의 행위를 통해 우리와 확연히 구분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웅을 보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토머스 카라일의 말마따나 “오, 정말로 자기보다 높은 것을 숭상해야 스스로 성장한다는 건, 솔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사실 아닌가요?”

정말이다. 우리는 거의 모두 영웅이 아닌 사람들이다. 적어도 나 자신은 단연코 영웅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한 일에 비하면, 내가 쓰는 텍스트란 전부 보잘것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쩌면 그게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우리 개개인이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영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기억한다는 바로 그 점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의 과제를 대할 때마다 이 기억은,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글 막시밀리안 프롭스트 Maximilian Probst 자유기고가

번역 장현숙 위원

ⓒ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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