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7 01:28 수정 : 2013.05.18 10:33

베이비부머는 대다수이며 부자고 힘이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지금 정치·경제·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왜 이들에게 대항할 수 없는가? <차이트>의 논쟁 기사를 요약했다.

가죽 반바지를 입은 은퇴자가 독일을 구하려면 “유로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얀 수염을 기른 그는 100마르크 지폐를 꺼내 들고 흔든다. 72살의 전 경제학 교수 요아힘 스타르바티는 그의 저서 <범죄 현장 유로>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로비에서는 전 독일산업연합회(BDI) 회장 한스올라프 헨켈(73)과 전 기독민주연합(CDU) 국무장관 알렉산더 가우란트(72)가 스쳐 지나갔다. 베를린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독일의 새로운 대안’을 위한 정당의 창립 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33년 전 녹색당이 만들어졌을 때 기존 정계를 비판하며 새로운 정당을 세운 이들은 젊은이였다. 하지만 이날 모인 정당 발기인들은 대부분 50살 이상이었다. 과거의 대안 정당인들은 장발이었지만 오늘날 대안 정당인들은 가슴에 행거치프를 꽂고 있다.

나는 ‘베이비부머(베이비붐 세대)’ 대해 도대체 언제부터 궁금증을 갖기 시작한 걸까?

지난 3월 독일 중년의 펑크가수 캄피노가 미국의 원로 록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 영국의 조 카커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반상인 ‘에코상’ 후보자로 선정되었을 때인가? 아니면 87살의 대통령과 76살의 부패한 억만장자가 70살의 전 투자은행가, 64살의 코미디언, 61살의 사회민주주의자와 함께 권력을 놓고 다투고 있는 이탈리아 총선을 지켜본 이후일까? 이 궁금증은 언제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내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다.

독일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평균연령이 높은 국가다. 1위 일본과 3위 이탈리아 사이에 끼어 있는 독일은 국민의 절반이 40살 이상이고 유권자의 3분의 1이 은퇴자다. ‘친애하는’ <차이트> 독자의 평균나이는 51살이다. 공영 방송 시청자의 평균나이는 58살 이상이다. 나는 이제 35살이다.

이것이 사회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레이디 가가보다 마돈나


독일의 베이비붐 세대(1946∼65년 출생)는 예전에도 다수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관심 갖는 일에 사 회 전체도 관심 갖는 것에 익숙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 리도 대부분의 역대 총리와 마찬가지로 베이비붐 세대다. 48살 이상의 연령대는 기업 경영진은 물론 영향력이 큰 언 론인 중에서 다수를 차지한다.

베이비붐 세대는 독일에서 새로 출고되는 자동차의 80%를 구입한다. 이들은 또한 여행업계 매출의 50% 이상을 책임지고 있으며, 은행들은 건축 자금 대출 상품을 48살 이 상 연령층을 위해 기획한다. 모든 중요한 시장에서 이들은 핵심 소비자 그룹이다. 독일경제연구소의 계산에 따르면 베 이비붐 세대는 해마다 5천억 유로어치의 상품을 구입한다. 이들은 독일 전체 구매력의 절반 이상을 소유한다.

과거에는 매번 새로운 세대가 그 시대의 생활문화를 만들었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아마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대중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을지 결정할 것이다. 그들 때문에 영국의 록밴드 롤링 스톤스는 오늘날에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콘서트를 열고, 베이비붐 세대에게 청춘의 아이콘인 ‘미니쿠퍼’(BMW의 소형차 브랜드)는 여전히 도로 위를 달린다.

그러나 나이 든 다수 세대가 우리의 인식마저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팝 문화는 언제나 젊은이들이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들여다보는 ‘거울’이었다. 오늘날 그 거울 속에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50살 이상이다. 이미 오래전에 나는 세계 최고의 팝스타가 마돈나이고, 그녀가 레이디 가가에게 왕좌를 물려주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제임스 딘이 국제적 섹스 심벌이었다면, 오늘날의 섹스 심벌은 51살의 조지 클루니다.

문화언론인 클라우디우스 자이델은 “우리는 30살 미만의 여성들을 절반쯤 어린애로 보고 그 나이대의 남성들은 애송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그의 책 <아름다운 젊은 세계>에 썼다. 자이델은 “업계에서 존중받고 싶으면 일단 35살은 넘겨야 한다. 그리고 언제 젊은 시절이 끝날지 오늘날처럼 불확실한 적은 없었다”고 전했다.

해마다 오스카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미국 아카데미 회원의 평균연령은 62살이다. 투표권을 가진 이들 중 14%만 50살 미만이다. 이 또한 왜 50살의 쿠엔틴 타란티노(영화감독)가 아직도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이라는 소리를 듣는지 설명해주는 이유 중 하나다.

3개월 전 시사 주간지 <슈테른>의 29살 기자 라우라 힘멜라이히는 당시 독일자유민주당(FDP)의 원내대표 라이너 브뤼더레에 관한 기사를 발표했다. 힘멜라이히는 브뤼더레의 성추행을 상세히 묘사했다. 미디어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이전의 어떤 토론보다 ‘새로운 균열’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남성과 여성 간 균열도 아니고, 정당 간의 균열도 아니었다. 그것은 젊은 층과 노년층 사이에 생긴 균열이다. 현재 브뤼더레는 별 문제없이 일을 계속하지만 힘멜라이히는 더 이상 FDP에 관한 기사를 쓰지 않는다. 이보다 더 힘의 역학 관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오랫동안 젊은이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준 것은 나이 든 남자들이었다. TV를 켜면 똑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도덕 문제 담당인 하이너 가이슬러(83), 경제 담당 한스 베르너 진(65), 1968년 이전 사건 전문가 아르눌프 바링(80)….

이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는 점점 더 어떤 일에 찬성하는 게 아니라 반대하는 50살 이상의 사람들이 많이 출연한다. 유로화 반대, 에너지 전환 정책 반대, 외국인 이주자 반대, 교육 시스템 개혁 반대, 여성 할당제 반대. 이들은 대부분 미래가 아닌 과거를 지향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갖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 한다.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균열


금융위기는 많은 유럽인의 삶의 기반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에 대한 확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정치에 대한 신뢰를 깨뜨렸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면 반대만 하던 베이비붐 세대는 묘하게 조용하다.

독일의 주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 발행인 중 한 명인 프랑크 쉬르마허(53)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의 에세이 <고령사회 2018>에서 자신이 속한 베이비붐 세대를 냉철한 눈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세대의 정치 프로젝트는 신자유주의였다”면서 “우리는 기꺼이 정치적 책임을 시장에 전가했다”고 말했다. 노후 대비, 유럽, 사회정의 문제 등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다. 이 생각은 “정확히 10년간 제대로 작동”했지만 이제 그의 세대는 정신적으로 소진되었다.

“과거에는 언제나 젊은이들이 기존 지배적 사고를 대체하고 수정·보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사회에 도입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젊은이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미약하다”고 쉬르마허는 말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젊은 세대의 수가 윗세대보다 적다. 낡은 패러다임을 새것으로 교체하려는 아래로부터의 압박은 없어졌다.

베이비붐 세대는 위기 앞에 눈을 감는다. 정치화된 전 세대인 68세대(19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을 주도한 대학생과 당시 청년문화를 이끈 미국과 유럽의 젊은 세대)에 질려 정치적 행동을 ‘대안 없는 관리 행위’로 축소시켰다. 그리고 이들 중 많은 사람이 기후변화는 믿지 않으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종교인 경제성장은 여전히 믿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원천적 경험은 그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유치원, 학교, 강의실에서 그들은 언제나 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의 생존 전략은 적응, 즉 대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실패를 모르게 되었고, 자신을 상대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베이비붐 세대는 ‘2008년 9월 이전에 금융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측한 이들을 종말론자라고 했다.

지금 젊은이들은 적응 전략을 선택했다. 이것이 비극이다. 우리 세대는 같은 세대의 동료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이전 세대인 나이 든 사람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연방 가족부 장관인 35살의 크리스티나 슈뢰더는 64살인 프란츠 요세프 융에게 헤센주 최고 후보 공천을 양보해야만 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헤센주 지역협회에서 동성 결혼에 대한 슈뢰더의 견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40살의 FDP 대표 필리프 뢰슬러는 젊은 크리스티안 린트너와 함께 FDP를 개혁하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너 브뤼더레에게 당의 정책을 지시받아야 했다. 젊은 세대는 왜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조차 권력을 두려워하는가? 젊은 세대는 왜 거부를 무서워하는가? 변화를 위해 우리에게 남은 단 한 번의 기회인 데 말이다.

얼마 전 독일의 사회학자 하인츠 부데가 일본을 방문했다. 세계 최고 고령사회의 노인 차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부데는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을 발견했다. 나이가 어릴수록 일본인은 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다고 느꼈다.

이것이 독일의 미래인가?

베토벤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 20곡을 30살 이전에 작곡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것은 30살이 되기 전이었다. 정보통신기술(IT) 기업가 마크 주커버그는 20살 때 페이스북(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을 만들었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적절한 조합이 중요하지만 서구 사회는 젊은이를 지원하지 않는다. 단지, 상위층과 하위층 사이의 빈부 격차에 대해서만 토론한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균열이 발생했다.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균열이다.

영국 같은 다른 나라에서는 더욱 격차가 크다. 영국의 교육부 장관 데이비드 윌릿은 그의 저서 <위기>(The Pinch)에서 “젊은이에게서 노인에게로 거대한 재분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베이비붐 세대인 윌릿은 “베이비붐 세대는 모든 부를 그들의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이들은 자본 투자자로서는 낮아지는 임금으로, 부동산 소유자로서는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이득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는 더 이상 자기 집을 살 수 없을 것이다”라고 비평했다.

베이비붐 1세대가 이미 은퇴하기 시작한 미국에서는 벌써 책과 신문기사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이 만연한다. ‘예전에는 폐수를 버리고 지금은 비아그라를 먹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세대’라는 기사가 머리글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대통령이 되어 수백만 명의 젊은이를 전쟁터에 내보내면서 동시에 세금을 줄이고, 느슨한 법률로 금융시장의 탐욕에 불을 붙인 세대라는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빚더미다. 이미 미국 정계에서는 더 이상 좌익과 우익이 아닌 ‘젊은이’(민주당)와 ‘노인’(보수당)이 대결하는 중이다.

젊은 여성 언론인 안나 카메네츠는 그의 저서 <채무 세대>(Generation Debt)에서 “우리는 엄청난 부의 세기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의 국민 중 35살 이하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주장한다.


꿈을 잃어버린 젊은이들


유럽 국가 절반에서 젊은이들의 항의가 시작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페인에서는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자들) 운동이 확산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대학생들이 ‘장로 정치’에 저항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새로운 ‘체 게바라’는 없다.

독일 젊은이를 대변하는 사람은 오직 볼프강 그륀딩거뿐이다. 28살의 연금 전문가인 그는 ‘미래 세대의 권리를 위한 재단법인’의 대변인이다. 독일의 인구학상과 세대정의상을 받았고, ‘리딩 체인지메이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가 받은 대부분의 상은 50살 이상인 사람들이 준 것이다. 그들은 마치 성실한 청소년을 칭찬하듯 박수를 보내지만 그륀딩거의 제안은 무시했다.

독일 정부가 정규 의무교육 기간을 1년 줄이고 대학 과정을 단축했을 때, 그리고 징병제와 사회복무제를 폐지해 젊은이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앞당겨 생애노동시간(노동시장 진입에서 은퇴 시점까지)을 2년에서 4년까지 연장했을 때는 미약한 항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연금 수령 나이를 2년 늦추자 노인들의 항의가 전국을 휩쓸었다.

독일의 2천만 은퇴자 중에서 겨우 40명 중 1명만 기초생활 수급을 받고 있는 반면, 15살 이하의 독일 청소년들은 4명 중 1명이 제대로 읽고 쓰고 계산하지 못한다. 한부모가정의 3분의 1이 아이들과 함께 빈곤하게 살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는 항상 노인보다는 젊은 세대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돈을 투자했다. 하지만 오늘날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그 비율이 역전됐다. 지금도 이미 75살 이상의 노인에게 드는 비용이 전체 어린이에게 드는 비용보다 많다.

독일 기독민주연합(CDU)과 사회민주당(SPD)의 당원 절반이 60살 이상이다. 짧은 시일 안에 유권자의 절반도 60살 이상이 될 것이다. 이들은 절대다수다. 노인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은 더 이상 실행에 옮길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젊은 CDU 국회의원 옌스 스판이 미래의 납세자들에게 일방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른바 ‘인구 변화 예비 자금’을 제안하자, 메르켈 총리는 그에게 이 토론은 ‘목적성이 없다’고 통지했다. 그 대신 총리는 총선이 시작하는 해에 여성에게 보조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 선거 공약을 위해서는 해마다 65억 유로의 예산이 필요한데, 이는 부모 수당과 보육 수당을 합한 것만큼 많은 금액이다. 중기적으로 이 예산액은 130억 유로까지 증가할 것이다. 이는 교육부에 할당되는 전체 예산과 비슷한 규모다.

정치인들은 현재 국고에서 연금에 800억 유로를 보조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주자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독일 사회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령화된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젊은 이주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도, 앞으로 점점 더 여성과 노인의 노동력이 필요해진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이 아는 사실을 바탕으로 행동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미래보다 현재를 더 중시하는가?

무엇보다 젊은 세대는 어떻게든 일이 돌아가게 하는 방법과, 어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법을 배웠다. 미국 9·11 테러 사건 뒤 우리는 계속해서 위기 상황만 겪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위기, 이라크 위기, 경제위기, 교육위기, 재정위기 등. 베이비부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 ‘꾸준한 상승’이라면 우리 세대를 만든 것은 단절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확신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확신에 가득 차 있고, 우리들은 의심에 좀먹히고 있다.

예전에는 노인들이 현실적이고 젊은이들은 이상적이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 그들은 한번 싸워보려고 시도조차 못한다. 이는 어림없는 일이다. 젊은이들이 나이에 앞서 늙어버리는 동안 노인들은 젊음의 특권인 무모함과 비이성을 즐기고 있다.

글 아니타 블라스베르크(Anita Blasberg) <차이트> 에디터, 번역 황수경 위원, ⓒ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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